그때 사지 않은 것에 대하여
2003년 1월 7일, 나는 시애틀 스타벅스 1호점에서 기념 컵을 들고 10분 넘게 서 있었다. 미국 시애틀의 스타벅스 1호점에 가면 그곳에서만 살 수 있는 기념 컵이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언젠가 그곳에 가게 된다면 꼭 그 컵을 사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막상 꿈에 그리던 장소에 서서 컵을 손에 쥐고 있으니,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 컵은 너무 못생겼기 때문이다. 벤티 사이즈로 스프를 담아도 될 것처럼 크고 무식하게 생겼고, 연둣빛 톤의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사진은 어딘가 칙칙했다. 가격은 거의 4만 원. ‘스타벅스 1호점’이라는 문구와 배경 사진 말고는 특별할 것도 없었다. 당시 스물일곱의 나는 첫 번째 회사를 그만두고, 모아둔 돈으로 캐나다 밴쿠버로 도피 여행을 떠난 상태였다.
작은 벤처회사에 다녔는데 팀에서 여자는 나 혼자였고, 처음 해본 개발 일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업무가 주어질 때마다 해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아침에 눈을 뜨고 회사에 가는 일이 늘 무서웠다. 영어가 싫어 이과를 선택한 나에게 개발 문서는 모두 영어였고, 어렴풋이도 이해하기 힘든 문서를 하루에도 몇백 장씩 읽어야 했다. 개발 일만으로도 벅찬데 영어까지 더해지니 숨이 막혔다. 영어는 늘 나를 멈춰 세웠다. 그래서 미국은, 그냥 갈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 알게 된 스타벅스는 내가 갈 수 없는 미국을 조금 들여다볼 수 있는 창처럼 느껴졌다. 당시 대부분의 카페가 전화기 놓인 테이블과 패브릭 소파로 꾸며진 아기자기한 분위기였다면, 스타벅스는 영화에서 본 미국식 인테리어 그대로였다. 회사 근처 강남역점에는 어학원 원어민 강사들이 자주 왔는데, 그들 사이에 앉아 있으면 잠시나마 미국에 와 있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그러다 알게 된 스타벅스 1호점은 나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처음 스타벅스가 시작했을 때는 초록색이 아닌 갈색 세이렌 로고였고, 로고가 바뀐 뒤에도 1호점만은 그 갈색 간판을 그대로 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으로는 많이 봤지만, 언젠가 직접 그 갈색 간판을 보고 싶었다.
그곳에 정말 가게 된다면, 뭔가 조금은 달라질 것 같았다. 그 생각 하나로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버텼다. 당장이라도 나오고 싶었지만, 딱 2년만 더 다녀보자고 스스로와 약속했다. 월급이 들어올 때마다, 이 돈으로 시애틀에 갈 거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그리고 마침내 2년 뒤,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캐나다행 비행기에 올랐다.
밴쿠버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영어 한마디 못 하는 겁쟁이였던 나에게 혼자 떠날 용기 따윈 없었다. 그래서 마침 학교 선배가 어학연수 중이던 밴쿠버를 선택했다. 게다가 밴쿠버에서 차로 두 시간 반이면 시애틀에 갈 수 있었다. 캐나다에 도착한 다음 날, 선배를 졸라 차를 렌트해 시애틀로 향했다.
사실, 그 컵이 제일 궁금했다.
하지만 막상 컵을 앞에 두고 나니, 꼭 사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 같았다. 이미 나는 시애틀에 와 있었고, 그 못생긴 컵은 더 이상 상징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을 서 있다가 사진만 찍고 컵은 내려놓은 채 가게를 나왔다. 그러나 시애틀을 등지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부터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언제 또 시애틀에 올 수 있다고, 고작 몇만 원짜리 컵 하나를 아까워했을까. 그 돈 아낀다고 누가 상이라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스스로를 궁핍하게 굴었을까. 사진을 볼 때마다 그 후회는 반복되었다. 언젠가 다시 시애틀에 가게 된다면, 그땐 고민하지 말고 꼭 사야지 생각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2008년 10월, 나는 다시 시애틀행 비행기에 올랐다. 시애틀에 본사가 있는 회사에 취직해 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동료에게 스타벅스 1호점 기념 컵 이야기를 했다. 이번엔 꼭 살 거라고.
5년 만에 다시 찾은 스타벅스 1호점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관광객으로 붐빌 것이라 예상했지만, 동네 주민들이 드나드는 평범한 가게였다. 갈색 로고와 기념 컵이 아니었다면, 그냥 동네 스타벅스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다시 기념 컵을 손에 들었다. 컵을 들고 서 있는 내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실망했다. 디자인은 더 못생겨졌고, 가격은 더 비싸졌다. 허리가 잘록한 호리병 모양의 머그컵에 촌스러운 배경 사진까지. 차라리 기본 컵에 ‘1호점’ 문구만 새겨졌다면 바로 샀을 텐데.
이번에는 사진도 찍지 않고 컵을 내려놓고 나왔다. 함께 간 동료도 너무 비싸고 못생겼다며 사지 않길 잘했다고 말했다. 호텔로 돌아와 다른 동료에게도 그 이야기를 했고, 컵을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그렇게 원하던 걸 왜 안 샀냐며 핀잔을 주었다. 그래서 다시는 그 컵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그렇게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옆에 앉은 동료에게 말했다.
“그 컵, 그냥 살 걸 그랬어.”
결국 스타벅스 1호점 기념 컵은, 나에게 사진 한 장의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