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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Dec 13. 2020

첫 월급

[39일차]


오늘, 첫 월급을 받았다.


인생에 있어서 첫 월급의 의미란 어떤 것일까.


돈을 받기만 하던 '학생'의 신분을 벗어나,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내딛는 첫 발걸음일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좀 많이 늦었고, 어쩌면 아직도 여전히 사회의 일원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번 일이 처음으로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내 손으로 돈을 번 최초의 기억은 아마 군대에 가기 전 휴학을 하고 소일거리로 대학교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이었다. 동아리 선배가 했던 알바였는데, 다른 할 일이 있어 그만두면서 대타자리에 나를 추천했다. 아홉 시부터 열두 시까지, 하루 단 세 시간 알바라 별로 부담도 없었고, 휴학 후 순도 100%로 주어진 자유시간 때문에 생활이 슬라임처럼 흐느적거리며 녹아내리고 있던 차였기에, 하루의 어떤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수락했던 것 같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주로 하는 일은 카운터에 앉아 책대여를 담당할 것이라는 내 기대와는 달리, 새로 들어온 책에 자기테이프를 붙이거나, 인기 없는 책들을 보존 서고로 옮기거나, 보존 서고의 수명이 다한 책들을 자루에 담아 운반하거나 하는 '음지'에서 일하는 것들이었다. 그 외에는 마지막 한 시간 정도를 컴퓨터실에 앉아 별 의미 없이 컴퓨터실 사용자들을 감독하고 안 되는 것이 있으면 봐 주는 정도.


그 정도의 일을 하고 시급 5000원씩, 하루에 15000원을 벌었다. 하루의 벌이는 대충 끼니를 해결하고 피시방에 가고 하느라 소비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는 선배의 집에 공짜로 기거하던 터라 집세는 나가지 않았고, 그러다가 은근히 모이는 돈으로 부모님께 MLB 모자(보스턴 레드삭스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하나씩 선물로 드렸던 것 같다.


월급이라고 하기에도, 알바라고 하기에도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크게 의미 있는 일은 아니었다. 기억에 남는 것이라곤 아침마다 아침식사로 챙겨 갔던 덴마크 드링킹 요구르트 사과와 삼각김밥의 맛, 그리고 컴퓨터실에서 일하면서 유튜브로 처음부터 끝까지 정주행했던 캐츠 뮤지컬 정도(럼 텀 터거는 사랑이지). 그래도 책갈피에 끼운 낙엽 정도는 되는 소소한 추억 하나 정도는 생긴 것 같은 알바였다. 아직도 덴마크 드링킹 요구르트 사과를 볼 때마다 그때의 새콤했던 알바의 생각이 난다.


그 다음 했던 것은 나름 최근에 했던 논술 첨삭 알바였다. 두 알바 사이에는 꽤나 오랜 시간의 갭이 있었는데, 거의 10년이라는 시간동안 나는 돈을 벌지 않고 살았다. 이 논술 첨삭 알바도 내 의지라기보다 지인의 소개로 둘이서 함께 하게 되었던 알바였다. 기숙 학원에서 8일 정도, 수능 직후의 가장 바쁘고 중요한 시기에 짧은 시간 동원된 알바였는데, 논술이라고는 수능을 친 후에 기억의 저편으로 완전히 던져버린 나였기 때문에 준비과정에서 상당히 긴장을 많이 했던 기억이다. 내가 정말 애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하고.


8일 정도에 120만원. 이것만 놓고 보면 무슨 수지 맞은 장사인가 싶지만, 사실 준비기간만 거의 한 달이 걸렸다. 담당하는 학교도 많아서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자료들(가방에서 뭉텅뭉텅 끝없이 나오는 A4지들을 보면서 이걸 다 읽으라고? 하고 기겁하던 기억이..)을 모조리 공부하면서 중간중간 담당 선생님과 미팅으로 체크도 하고.


걱정과 긴장이 많이 되었으나, 막상 기숙학원에 도착해서 일을 시작하자 굉장히 널널했다. 함께 갔던 지인과 학교를 나눠서 했기 때문에 좀 수월했고, 수능 언어영역이 어려워 재수를 하려는지 신청을 취소한 학생들도 많아 담당하는 학생은 겨우 8~10명 정도였다. 학원의 교사 기숙사 건물에서 지내면서 하루종일 느긋하게 있다가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만(11시였나?) 교실에 들어가 학생들을 봐주고 첨삭을 해주면 되는 시스템이었다.


학생들은 착했고, 나도 생각보다 잘 가르쳐서(?) 나중에는 일 시간이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소설 합평을 하던 느낌으로 내놓은 답안지를 하나하나 분석해서 길게길게 답을 해줬더니 반응이 좋았다. 더군다나 꽤나 수강료가 비싼 학원이라 그런지 식당 밥이 무척이나 잘 나왔는데 그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야 너희들 좋은 거 먹고 사는구나,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애들이 여기 밥이 맛 없다고 투덜투덜해서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봉인.


분식으로 나왔던 어느 날의 식단. 참 좋은 학원이었지.


마지막 날의 풍경. 그러고보니 또 수능이 지나갔네.


그때의 기억이 좋아서 다음 해에도 파이널 기간에 수락을 했다가 극한의 고통을 맛봤다. 2주 300만원의 솔깃한 제안. 그러나 이번에는 준비해야할 학교도 훨씬 많았다. 수업 자료 인쇄비만 만원 이상이 나왔던 기억.


이번에는 하루 12시간의 가혹한 일정이었고, 기숙이 아니라서 1시간 거리의 대치동 학원까지 출퇴근을 해야했다. 학생들도 많았고 대면첨삭해야할 답안지도 많아서, 그야말로 출근 후 식사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쉬지 않고 머리를 굴려가며 첨삭을 해줬다. 그때 사람이 뇌 활동을 멈추지 않고 하루종일 돌리면 정신이 하얗게 타버린다는 사실을 처음 경험했다.


그래도 함께 일을 나눠서 봐줄 선생님이 한 분 더 계시다고 해서 위안을 받고 첫출근을 했었는데, 그 선생님이란 사람은 작년에 내가 봐 줬던 학생(안경도 벗고 화장도 해서 처음에는 아예 못 알아봤었다)이 아닌가. 작년에 무사히 합격해서 한창 대학 새내기 생활을 하고 있을 그 학생이 한편으로는 반가운 마음도 잠시, 시작한지 5일만에 개인사정으로 인해 가게 되어서 결국 혼자 남게 되고, 2주가 지났을 때에는 정신이 완전히 지쳐서 그로기 상태가 되었던 기억이다.


그때 받았던 그 300만원. 그것 역시 '월급'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한탕으로만 받은 돈이라 좀 느낌이 다르다(거의 쓰지 않고 아직 고이 모셔두고 있다). 보수라고 해야 할지.


'서론'이 길었지만, 그래서 오늘 내 통장에 들어온 이 돈을 이제 월급이라도 불러도 좋지 않을까. 물론 지금 하는 일을 일자리라든지 취직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전공과 관련된 일도 아니고, 경력에 넣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딱히 열정이 생기는 일도 아니다. 비록 단기 계약직인 알바인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반 년을 일해서 정기적으로 벌게 된 돈이니, 그리고 만약 제대로 6개월 간 일을 한다면 어쨌든 네자릿수 만원 대의 돈을 모으게 될 거니까. 말 그대로 '(금전적으로)의미 있는' 돈을 벌게 되는 것이다.


일단 들어온 돈은 사실 터키에 입국한 10월 중순부터 계산해서 14일치였기 때문에 온전한 월급은 아니었다. 그러나 14일치 치고는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어와서 조금 놀랐는데, 알고보니 첫 월급은 온전한 한 달을 일한 것이 아니라서 세금을 제하지 않고 준다나 뭐라나. 여튼 그런 계산법은 잘 모르겠고, 상상보다 많은 돈을 받은 것 같아서 생각지도 못하게 마음은 즐겁다. 그 동안 야근이다 조기출근이다 철야다 식사 연속 작업이다 고생한 것들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게 금융치료라는 건가. 이제 은근히 야근을 기대하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일단 경험(일 경험보다는 휴일과 휴가 때 터키를 여행하는 경험을 원하긴 했지만)이 우선이고, 금전적인 것은 딱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통장에 차오른 돈을 보니 든든하기는 하다.


그리하여 첫 월급이라고 불릴 만한 돈을 마주한 나는 이제는(너무 늦었지만) 어른이 되어 사회에 진입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돈을 보고도 집이니 결혼자금이니 현실적인 것들보다 여행 같은 허무맹랑한 것들이 먼저 생각이 나는 것을 보면 아직은 멀은 것 같다.


현장에 와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것이 있는데, 이제 나를 말할 때 더 이상 '학생'이라는 단어를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학생'이 아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된 이후에 굉장히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학생이 아니다. 학생의 의미를 여러모로 확장시켜 본다고 해도, 이제는 학생이라고 말할 수 없다(물론 양심을 좀 더 버리자면 가능하기는 하겠지만). 학생이 아닌 나는 그럼 무엇일까. 직장인일까?


언젠가 휴대폰으로 모교에서 설문조사 전화가 온 적이 있다. 선배님~ 하고 시작된 설문조사는 내가 무슨 사람인지를 스무고개처럼 물었다.


졸업하시고 지금 직장에 다니세요?


아니요.


그럼 대학원에 진학하셨나요?


아니요.


그럼 취업 준비 하고 계신 거군요?


아니요.


아, 그럼 시험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그것도 아닌데요.


이쯤에서 상대방의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상대방의 세계관에 의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이 다음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그...그럼 백수신가요?) 몰라 쩔쩔매고 있는 상대방을 위해, 그냥 혼자 소설 공부 하고 있어요 정도로 답변을 해줬다. 그제야 아, 하고 상대는 안심했다. 그리고 원래 진행하려고 했던 뭔가를 하지 않고 서둘러 작별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친구의 상상력을 탓하기에는, 사실 내 상황이 꽤나 예외적이기는 했다. 나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피터팬 증후군이니 캥거루족이니 하는 단어들을 꺼내면 좀 이해가 빠르려나. 그러나 그런 단어들을 꺼내버리면 그 다음부터 차곡차곡 쌓이게 될 쉽고 재미 없는 그 생각들로, 지금의 내 상태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속해 있던 세계의 반대편에서,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일을 해서 내 통장에 들어온 이 소소한 돈이, 내 무언가를 설명해줄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딱히 이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과거의 몇몇 추억들을 떠올려보고, 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대충 상상해보면서, 기대도 꿈도 최대한 담담하게 배제한 채로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첫 월급,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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