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포가 걸어다니는 세계'
환상이란, 자연의 법칙밖에는 모르는 사람이 분명 초자연적 양상을 가진 사건에 직면해서 체험하는 망설임인 것이다.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그림에 그려져 있던, 평범한 인간의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크기의 땅딸막한 사내가 별안간 내 눈앞에 실제로 나타났다. 문이 잠겨 있는 나의 집에 갑자기 나타난 그는 나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그러다 별안간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얼핏, 환상처럼 보이는 이 상황을 해석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1)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적절한 신체를 가진 배우를 고용한 몰래카메라였고, 집 곳곳에 숨겨져 있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 그가 나타났다 사라진 것처럼 연출한 것이었다. 혹은 주인공이 그저 평소에 먹던 약이나 심리상태 때문에 환각 증세가 나타난 것에 불과했다.
토도로프의 이론에 따르면 위의 상황은 '괴기'의 영역에 속한다.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지만 알고 보니 모두 '현실'의 법칙 안에서 설명이 가능한 사건이었다. 단지 그 사정을 모르는 우리가 보기에 일순간 '괴기'스러웠을 뿐이다.
2)그것은 정말로 현실의 자연법칙을 뛰어넘은 존재에 의해 발생한 일이었다. 사내는 일종의 생령이나 정령이었고, 보는 눈앞에서 일순간 확실히 나타났다 사라졌다. 평소 먹던 약도 없었고, 그 사내를 본 경험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의 분명한 증언도 있었다.
이는 '경이'의 영역에 속한다. 어떤 트릭도 없이, 그저 초자연적인 현상이므로, 인간이 느껴야 할 감정은 오직 놀라워해야 함, 경이뿐이다.
토도로프는 환상이란, 사건이 이런 1)괴기와 2)경이 사이에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어느 쪽으로 해석해야 할지 끝없이 망설이게 되는 그것이라고 말한다.
단호한 환상
그렇다면,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에 나오는, 환상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일까? 아니면 주인공의 개인적인 심리에 따라 겪게 된 일종의 환각일까.
일전에 다룬, 이런 '망설임'의 개념을 교묘하게 잘 활용했던 영화 <버드맨>과는 달리, 하루키의 소설에는 '토도로프적인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키의 소설은 명백히, 2)경이의 영역이다.
이렇게 단호하게 선언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하루키 본인의 태도가 단호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독자가 헷갈리도록 트릭을 사용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그의 소설을 잘 살펴보면, 이미 그것이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전제한 채로 서사를 진행시켜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오히려 독자가 1)괴기의 영역으로 해석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라도 하는 듯, 아마다 도모히코의 병실에서 구덩이까지 오는 '초현실적인 알리바이'를 확실히 강조하며 '현실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해변의 카프카>에서 까마귀 소년이나 커널 샌더스, <1Q84>의 '리틀 피플'처럼, <기사단장 죽이기>의 기사단장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인 '초현실적인 존재'이고, 이들은 소설 안에서는 누군가의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존재하며 그들에 의해 착실히 서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만약 그의 소설을 읽으며, 이 사건들이 2)경이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데 망설임이 생긴다면, 그것은 단지 하루키의 소설 속 인물들이 그 사건을 그다지 '경이'롭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그들(하루키의 인물들) 특유의 '쿨한 태도'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현실에 속하지 않는 '환상적인 요소'를 소설에 도입할 때, 그것이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어떤 것인지 헷갈리게 느껴지도록 연출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것이 소설을 훨씬 긴장감 있게 만들고, 입체적으로 해석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디폴트라고 전제한다면, 오히려 그런 방법을 선택하지 않고 일부러 '경이'의 영역으로 꼼꼼하게 드리블해 나가고 있는 하루키의 이 '단호함'에, 어떤 의도가 숨어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 의도란 무엇일까.
현실, 그리고 현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환상이 출현하는 때는 언제인가. 그것을 체크해본다면 하루키가 단호한(혹은 능청스러운) 태도로 환상을 소설 내에서 다루고 있는 그 의도를 파악해볼 수 있다.
환상은, 넓게 말한다면 소설 전체를 걸쳐 출현한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말이지만, 이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장편' 소설이, 실은 누군가들의 일생의 어느 한순간, 단면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면, 이 환상이라는 것이 어떤 인생의 특정한 순간에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의 특정한 순간이란 뭘까.
1)바람을 피운 유즈와 헤어지고 이혼을 앞두고 여행을 하다 친구 아버지의 집에 잠시 머물고 있는 화가인 나.
2)자신의 자식일지도 모르는 마리에의 삶을 근처의 호화로운 집에서 지켜보고 있는 멘시키.
3)나치 간부 암살을 모의하다 실패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난징 대학살 트라우마로 동생을 잃고 노년에 죽음을 앞두고 있는 아마다 도모히코.
마리에를 포함한 주변 인물들을 모두 제외하고, 서사의 중심에 있는 이 세 남자는 어떤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다. 현실이란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발을 딛고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그 세계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우리의 특정한 소망이 거세된, 제한된 세계로서의 현실이 있다. '현실의 벽'이라는 단어의 '벽'이라는 개념이, 이미 '현실'이라는 단어 안에 내포된 상태로서의 그 현실.
'현실은 그렇지 않아.'
'현실을 좀 알아라'
라고 말할 때의 그런 현실.
그 두 번째 의미의 현실 속에서는 이미 정해진 상태로 바뀌지 않는 개념들이 있다. 바람을 피우고 불륜남의 아이를 임신하기까지 한 배우자와는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씨를 제공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만으로 여태껏 인생을 책임진 적 없었던 어떤 아이에게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 나치 독일과 같은 노선을 탔던 제국주의적 가해자였던 일본을 그 구성원으로서 스스로 가해자라 인정하고 참회할 수는 없다는 것(혹은 가해자가 되려는 길을 '암살'로서 막을 수 없었다는 것).
역사에는 if가 없다는 말처럼, 그런 현실 세계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과, 그에 따른 가치판단이 너무나 명징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 세계에서는 사랑을 사랑이라 말할 수 없고, 독재를 독재라 말할 수 없고, 침략을 침략이라 말할 수 없고, 딸을 딸이라고 말할 수 없다. 명징하기 때문에, 도리어 명징하게 호명할 수 없는 세계. '원래라면 그랬어야 하는 것'으로서의 '진실'과, '그러나 그러지 않았던(혹은 그럴 수 없었던)'현실과, 내가 가진 본능적인 감정이, 끊임없이 서로 뒤틀리고 빗나가게 되어버리는, 그런 세계로서의 현실.
바로 그런 현실 속에서, '메타포'는 꿈틀거리며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메타포가 걸어 다니는 세계
메타포란 무엇일까. 그것을 은유라거나, 비유라거나, 그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전적인 설명은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소설을 읽을 때 그다지 도움이 되는 해석은 아니지 싶다.
그것의 기능적인 측면에 주목해서 해석하자면,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메타포란 '환상'이다. 쉽게 말하면, 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온갖 비현실적인 일들,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존재나 닫힌 구덩이 속에서 들리는 방울 소리, 병실에서 구덩이까지 통하는 통로와 이상한 세계 등을 말한다.
이 환상들은, 그러니까 앞서 말한 '경이'에 속하는 이 초현실적인 존재와 서사들은 어째서 '필요'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진실, 즉 '그랬어야 하는 것'들을 명징하게 호명하기 위해서이다.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고, 침략을 침략이라고 말하기 위하여.
아사다 도모히코의 서사를 예로 들자면, 그는 자신의 수십 년간의 인생에서 마지막까지 자신이 하고자 했던 것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나치 독일 간부의 암살에 실패하고, 죽임당할 것이 뻔한 애인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혼자 돌아왔다. 그는 제국주의 침략의 심장에 총탄을 꽂아 넣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피아노를 연주해야 할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그의 동생은 강제로 징용당해서 자신의 손을 건반을 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하게 되었다. 그것은 명백한 살인이자 가해였지만, 전체주의 일본 사회에서 그것이 '살인'이라고 명명되는 일은 없었다. 그는 가해자가 되고 싶지 않았고, 피아노로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고 싶었고, 하다못해 가해자로서 속죄하고 싶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러지 못했지만, 세계는 잘도 굴러갔다. 비참한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고 결백한 자들만이 마주 보는 세계. 그러한 세계에서 '그러지 못한 것'들은 어디로 가는가? 세계가, 현실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러지 못한 것'들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허구와 같은 상상력의 산물로 취급되어야 할까? 분명히 존재하는 고통과, 현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공백을, 무엇으로 메워야 할까.
그것을 메우기 위해 환상, 즉 메타포가 '현신'하게 되는 것이다. 메타포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지 않았을 뿐인 일'로 바꾸고, 그리고 '있는 일'로 믿게 만든다. 제국주의적 침탈에 저항하기 위해 해치워야 했을 나치 간부 대신, 60cm 신장을 가진 기사단장이 칼에 찔려 피를 흘리게 만든다. 기사단장을 죽인다는 것은, 이제 고정되어 변하지 않을 현실을 죽이고, '그랬어야 하는 것'을 '그런 것'으로 바꾸어 이 세계와 비현실 세계 틈바구니 어딘가에 풀어놓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명징한 현실 세계에서는 오직 '메타포'라는 모호한 형태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주인공인 '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유즈와 내연남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다는 것, 그리고 아이가 생겼을 당시 자신은 한창 도호쿠의 도시를 여행 중이었다는 알리바이는, 나와 유즈 간에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재결합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해버린다.
나는 도호쿠의 도시를 혼자 돌아다니던 때, 꿈을 통해 잠든 유즈와 몸을 섞었다. 나는 그녀의 꿈속에 숨어들었고 그 결과 그녀는 수태해 아홉 달 하고도 며칠이 지나 아이를 낳았다-나는(어디까지나 남몰래 개인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를 즐겼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이데아로서의 나, 혹은 메타포로서의 나다.
-p596<2권>
그러나 '나'는 그 아이가 자신과 유즈의 아이라는 것을 '믿기로' 한다. 한 사람의 허황되고 일방적인 믿음이 설득력(적어도 이 소설 내에서는)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소설이 이미 비현실적인 사건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경이'의 영역이라는 것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즉 메타포의 세계에서, 그는 자신과 유즈의 재결합이라는, 비현실적인 소망을 실현하게 된다(결국 메타포에 전이되지 못했던 멘시키와는 달리).
손으로 쓴 소설
한편으로,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결국 그가 선택했던, 망설이지 않는 단호한 이 '경이'로서의 환상이, 얼마나 유효했을까?
내가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했던 것은 그가 만들어내는 이 비현실적인 세계가 분명하고 매력적인 질감을 가지고 소설 속에서 정말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현실적인 공간 어느 한구석에 능청스럽게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공간(<태엽 감는 새>의 집 옆 우물, <1Q84>의 고속도로 옆 비상계단 등), 그리고 그 세계를 구성하는 매력적인 고유명사(대부분 음악이나 요리, 옷의 명칭)들의 반짝거리는 질감이 좋았다.
그러나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소설에서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반짝이는 것들이 아니었다. 소설의 초반, 특정한 시간에 울리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그것이 진짜일까 환상일까 '망설이게' 되는 그 순간까지, 나는 오랜만에 무척 몰입하며 소설을 읽었다. 그러나 이데아로서의 기사단장이 불쑥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경이'로서의 세계관을 분명하게 선언하자, 당연하게도 내 안에 있던 두근거리던 망설임과 함께 긴장감 같은 것이 훌쩍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에 펼쳐지는 서사(그것을 서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에서 나는 하루키가 이전의 다른 소설과는 달리, 뭔가 '할 말이 떨어져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달리 말하자면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딱히 없다는 인상이었다.
3호선 시부야 출구로 나와서 아오야마 대로를 거쳐 요쓰야까지 가기로 했다. 일반 도로도 혼잡하기는 마찬가지라 적절한 차선을 고르기가 몹시 어려웠다. 주차장을 찾기도 녹록지 않았다. 세상은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귀찮은 곳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p96<2권>
때문에 소설의 살을 찌우는 것은 이런 식의 '에세이'적인 문장들, 생활 묘사였다. 그런 문장들은 서사를 진행시키지 않고 그저 자리만 차지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으며 종종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닌, 하루키의 목소리로 여겨지는 문장들을 자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건 분명 이전의 그의 소설들에서는 더 드물게 보이던 것들이었다. 묘사되는 나이대에 비하여 어딘지 나이 들어 보이는, 핸드폰을 거의 가지고 다니지 않는 주인공의 감성 같은 것 역시도.
그가 만들어낸 비현실 세계의 묘사는 예전과는 다르게 지루했다. 특히나 마침내 '긴 얼굴의 사내'를 만나 들어가게 되는 그 통로 안의 세계의 묘사는 정말로 흥미롭지 않았다. 그저 '내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완벽한 무음이다, 냄새도 나지 않았다, 와 같은 무미건조한 묘사의 반복만 있을 뿐이었으며, 종종 등장하는 그림 속 인물이나 뱃사공과의 선문답적인 대화들 또한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별로였던 것은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가 되어야 할 부분에, 그런 바리공주식의 전통적 통과의례 클리셰 서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간 있었던 여러 가지 복선들이, 뱃사공에게 마리에의 펭귄 액세서리를 주고 해결되었다고 퉁치고 지나가는 식으로 끝나버리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설의 주요 모티프들이 그의 예전 소설에서 이미 보았던 것들이라는 점도 아쉬웠다. 사당 옆 구덩이는 물론 <태엽 감는 새>의 그 우물 구덩이에서 온 모티프였고, <1Q84>에서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입원 중이던 덴고의 늙은 아버지 역시 아마다 마사히코의 아버지인 도모히코와 겹쳐 보인다. 비현실적 세계를 돌파할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뭔가 특별한 존재로서의 어린 여자아이 모티프 역시 <1Q84>의 후카에리에서 마리에로 이어졌을 뿐이었다.
마리에는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캐릭터였는데, 소설의 마지막에 여태껏 풀어놓은 이야기를 13살 소녀를 앞에 앉혀놓고 혼잣말로 정리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다소 무책임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종종 소설 내의 자신의 나이를 감안하여 어려워 보이는 단어의 뜻을 되물어가며 현실성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실은 주인공과의 모든 대화 그 자체를 되물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아는 작은 꼬마 정령(왜 하필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묘사되다가도, 아무것도 모르는 인형 같은 여자아이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굳이 있어야 했나 싶은, 마리에의 납작한 가슴에 대한 집착 역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때문에 전반적으로, 나이가 많이 들어버린 대작가가, 이미 반복되었던 닳은 모티프를 가지고, 단련된 '손의 근육'만으로 써버린 소설, 과 같은 인상이 들었다. 그의 소설에서 읽을 수 있는 현실적이고 진지한 메시지와는 별개로. 그렇기에 나는 그의 많은 작품들 중에서 이 소설만큼은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인상 깊은 음식은 아무래도 파스타.
도둑까치 서곡을 들으며 스파게티를 삶는 모습으로 시작되는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 첫 장면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내가 '소설'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처음으로 마주한, 독서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소설이라는 것을 읽어야겠다, 라고 생각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학교 도서관에 들어가 책을 둘러보다가, 무라카미 어쩌고 하는 사람이 뭔가 유명했던 것 같은데 하면서 무라카미 류와 무라카미 하루키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덥썩 집어 들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 내가 파스타란 음식을 가장 좋아하게 된 것도 바로 그 장면 때문은 아니었을까. 단지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아주 먼 훗날의 소설에서 마주한 것이 까메오 출현인지, 아니면 지루한 자기복제인지 혼돈스럽다는 것이 조금 슬플 뿐이다.
-멘시키는 만만치 않고 무척이나 매력적인 캐릭터였지만, 막판에가서는 그저 결벽증이 유난했던 캐릭터에만 충실한 채로 끝나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