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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06. 2018

[영화] 버드맨

'버드맨은 죽었다'

Birdman 2014 -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환상이란, 자연의 법칙밖에는 모르는 사람이 분명 초자연적 양상을 가진 사건에 직면해서 체험하는 망설임인 것이다.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누구도 손을 대지 않은 사과가 저절로 움직인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누군가는 쓰러진다. 이것은 환상인가? 토도로프는 조금 더 기다리라고 말한다.


1) 그것은 분명 신기한 일이었지만, 누군가 사과를 갈라 보니 강력한 자력을 가진 자석이 나왔다. 


이는 '괴기(etrange)'의 영역에 속한다. 초자연적인 현상처럼 보이긴 했지만 결국 현실의 법칙으로 설명이 되었다. 단지 그 모습이 조금 '괴기'스러웠을 뿐이다.


 2) 누군가 사과를 갈랐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한 사람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과를 먹어치웠다. 그것은 틀림 없는 진짜 사과였고 사과가 저절로 움직인 것은 눈속임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초능력, 귀신, 혹은 스스로 걸어다니는 괴물 사과였던 것이다.


이 경우에 사건은 '경이(merveilleux)'의 영역에 속한다.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요정의 세계나 귀신의 존재 같은 전혀 새로운 자연 법칙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답이 내려진 두 상태, '괴기'와 '경이'는 진정한 환상이라 말할 수 없다. '환상'이란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도 설명되지 않은 채 독자(혹은 관객)가 끝없이 망설이게 되는 그것을 말한다. 즉 어느 쪽으로도 설명될 수 있는 여지가 아직 남아있는 상태에서의 수용자의 망설임. 그것이 환상의 본질이다, 라고 토도로프는 말한다. 


<버드맨>은 츠베탕 토도로프의 이 '망설임'이라는 개념이 아주 잘 활용된 영화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진실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이 환상인지. 영화가 끝나고도 이 망설임은 계속된다. 그래서 산 거야, 죽은 거야?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망설임은 물론 주인공 리건이 가진 초능력(염동력, 비행능력)과 그를 따라다니는 '버드맨'의 존재다. 이는 영화에서 그가 가진 신비한 능력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일방적인 망상에 불과하다는 설명이 가능하도록 장치가 되어 있다. 염동력으로 자신의 방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깨부수면서도 그의 '손'에 핏자국을 남겼고, 극장에 날아서 도착한 그의 뒤를 돈을 받지 못한 택시기사가 쫓는다. 그는 거울을 보며 중얼거린다. 이건 나의 무의식이라고. 그렇게 설명이 될 수도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그의 의식 밖 인물인 딸 '샘'이 하늘을 나는 그의 모습(새라고 억지로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을 보고 웃지만 않았더라면.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끼인 자의 고민은 극중 인물인 리건의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온전히 관객의 것이다. 시종일관 들리는 드럼연주에 이러한 망설임을 감각화하려는 시도가 담겨있다. 극중 인물들이 돌아다니는 극장의 통로는 좁고 구불구불하며 다층적이다. 그 길을 처음 리건이 걷기 시작할 때 들리는 드럼연주 소리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영화에 흔히 쓰이는 배경음인가, 혹은 종종 실제로 등장하는 드러머가 연주하는 소리가 층간 소음으로 들리는 것인가. 장치는 교묘하다. 리건이 모퉁이를 꺾을 때마다 드럼 소리는 일순간 커졌다 작아진다. 마치 드럼 연주를 하고 있는 방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듯이. 소리의 원근법이다. 이 드럼소리는 리건이 무대에 올랐을 때도, 심지어 건물 밖으로 카메라가 빠져 나갔을 때도 들린다. 그럼 배경음인가? 관객은 그 드럼소리를 무의식적으로 들으며 자연스럽게 망설이고 의심하게 된다. 지금 눈 앞에 진행되고 있는 영화 자체의 환상성을. 


또한 돋보이는 것은 영화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롱테이크 기법이다. 롱테이크 기법은 그 자체로 리얼리티와의 싸움이다(영화와 비교되는 연극의 고유한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편집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 와서는 롱테이크 기법 자체만으로 현실성이 확보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편집이 어떻게 되었든 영화 내에서 카메라가 끊기지 않는 한 그 시선에 대한 무의식적인 신뢰는 깨지지 않는다. 관객은 시선을 믿게 된다. 리건이 살아가는 영화 안의 현실도, 그렇다고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 자신의 현실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끼인 '연속된 시간의 리얼리티'를 믿게 되는 것이다. 그 중간 세계의 리얼리티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중간의 세계는 바로 내레이터의 자리다. 인격은 없으나 동선이 존재하는 그 내레이터는 인물들의 등 뒤를 따라다니며 존재감을 형성하다가도, 종종 거울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인물들의 등 뒤에 서서 비어있는 자신의 자리를 거울 안에 비추며 관객들에게 의도적으로 각인시킨다. 카메라로 표현되는 침묵의 내레이터다. 그 내레이터가 있는 중간 세계의 리얼리티를 믿는다는 것은 영화의 이야기 자체를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된다. 


'등장한 권총은 반드시 쏘아져야 한다.'는 체호프의 말처럼 신뢰를 기반으로 등장한 내레이터는 반드시 그 신뢰를 배반해야만 한다. 길고 긴 영화의 롱테이크는 언제 끊기는가. 리건이 연극의 마지막에서 진짜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을 때. 핏주머니를 차지 않고도 피가 튀기며 쓰러진 그에게 사람들이 갈채를 보내고, 비평가는 그의 죽음을 예견하고 홀로 빠져나가고, 그리고 카메라가 극장의 천정을 향해 서서히 올라가면서 롱테이크는 끝이 난다. 그간 애를 쓰며 확보했던 리얼리티에 대한 신뢰를 '일부러' 끊어버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것은 그간 망설임 속에서 간신히 이어져 오던 현실의 끝을 의미한다. 즉 주인공 리건의 죽음이다. 


추측을 하자면, 그는 죽었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서가 아니라, 총에 머리를 맞고 무대 위에서. 침묵의 내레이터가 시종일관 소중하게 유지하던 리얼리티는 주인공 리건이 죽는 순간에 깨어진다. 그것이 리건의 실존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카메라가 곧 리건의 시선이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이후에 일어난 일, 즉 병원에서 깨어나고 기사가 나고 창문을 열고 카메라가 이어 들어온 딸을 바라보는 사이 창틀에 있어야할 리건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창문 아래를 심각한 표정으로 살펴보던 딸 샘은 예상하던 것을 찾지 못했는지 곧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본다. 리건의 환상에 처음으로 외부인이 개입하는 순간이다.


롱테이크가 끊어진 이후의 서사(리건이 무대에서 총으로 스스로를 쏜 이후의 서사)는 그간 지켜왔던 몇 가지 법칙들이 무너진 모습을 보여준다. 언제나 인물들과 조금씩 거리를 두어왔던 카메라가 리건의 시선에 겹쳐저 잠시 동안 1인칭으로 진행된다. 붕대를 푼 그의 얼굴은 '비교적' 멀쩡하고, 버드맨이 화장실에 앉아 있고, 그가 창틀에서 날아가버렸는데도 그것이 그의 망상일 수 있다는 힌트가 이제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그의 개인적인 환상에 외부인인 샘이 개입해서 그의 비행을 목격한다. 

 

그런 법칙들은 영화 <버드맨>의 대부분에서 지켜지며 현실적 신뢰성을 확보했던 그 세계의 '물리법칙'이다. 그 법칙이 깨졌다는 것은 그 세계가 이전의 세계와는 다른 법칙을 요구하는 세계라는 것을 암시한다. 예를 들자면 '사후세계'와 같은 것. 혹은 그의 소망이 이루어진 세계의 모습을 스스로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환상적인 공간. 눈 주변이 망자의 그것처럼 새카맣게 분장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파란색, 주황색 조명 등으로 현란하게 바뀌어온 현실의 빛깔이 이제 눈부신 하얀색이 되었다. 병원과 하늘의 하얀색은 물론 '천국'을 의미하는 가장 흔한 색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추측이라고 할 수 있다. 결말은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다(처음 재능없는 연기자 랄프와 함께 하는 연극에서 총에 맞고도 산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이 영화의 결말이 흔히 해석의 풍요로움을 지향하는 종류의 '열린 결말'이라고 말하기에는 무책임한 경향이 있다. 그리해서 얻어지는 의미는 모호할 뿐이다. 그보다는 관객들에게 여전히 어떤 여지를 주기 위한 의도적 장치라고 설명하면 좀 더 적합할 것이다. 즉 계속 논의해 왔던 그 '망설임' 말이다. '열린 결말'과 '망설임'은 비슷해 보이지만 기능과 효과가 전혀 다르다. 망설임은 어떤 해석이 매력적인가를 묻지 않는다. 망설임은 '리얼리티'란 무엇인가 의문을 던진다. '진짜'는 뭘까.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레이먼드 카버의 전언이며 이 영화의 전언이기도 하다. '말하다'라는 것은 이 영화 안에서 '연기하다'와 동일한 맥락이다. 누군가를 연기할 때 무대에 올라가서 몸짓과 발성으로 꿈틀거리는 그 진짜 육체는 무엇인가. 스마트 폰에 담긴 연기자, 혹은 태어난 순간에 카메라 너머에 있는 진짜 샘, 연기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리건이 있어야할 가정의 자리, 성기능 장애의 마이크가 무대의 침대 안에서 세웠던 자신의 성기, 그리고 영화 속 현실을 뛰어넘어 왕년에 배트맨(버드맨)으로 유명했던 주연 배우 마이클 키튼(리건)까지. 스크린 안과 밖을, 배우와 관객 사이를 넘나드는 사실관계 속에서 '진짜'가 무엇인지 되물어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영화에서 계속되고 있는 환상(망설임)의 진정한 기능이다. 환상이란 본질적으로 현실이 무엇인지 돌이키게 하는 기제다.   


<버드맨>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영화를 구성하는 형식적인 요소에 대해 말하는 것이 필요한 건, 거기에 영화의 전언이,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령 주인공의 고뇌가 잘 느껴진 영화였는데 롱테이크 기법이 인상깊었어, 라는 식으로 영화의 내용과 분리될 수가 없다. 현대 예술은 형식 자체가 발언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며, <버드맨>은 적어도 그런 기능에 충실하다. <버드맨>이 '영화'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볼수록 현실관계 속 아이러니가 더욱 깊어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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