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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06. 2018

[영화] 커피와 담배

'공명을 바라는 패치워크 '

Coffee And Cigarettes 2003 - 짐 자무쉬


커피와 담배가 점심? 그건 몸에 해롭지 않나?

 

쓴 건 가끔 당긴다. 도수 높은 카카오, 커피... 누벨바그 풍의 난해한 느낌의 흑백 영화. 


난해한 영화가 몹시 보고 싶어 질 때가 있다. 흑백이면 좋고, 목소리가 안 나오면 좀 곤란하고. 작위적인 정도는 그야말로 정도껏만. 서사는 어디로 갔는지 없거나, 혹은 있어도 이게 무슨 이야기야 싶은 느낌. 낯선 배우(일단 내게는)가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고, 맛난 먹거리가 나오면 더 좋고. 


그런 걸 틀어놓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정말 그런 느낌이다. 쓴 기호품을 옆에 두고 홀짝홀짝 마시거나 태우는 느낌. 물론 그런 걸로 끼니를 때우려고 했다간 몸만 상할 뿐이다. 공복의 커피처럼.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양가의 기준으로 영화를 본다면 제로 칼로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그래서, 하려는 말이 도대체 뭐야?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영화를 보고 뭐가 남는 거지?). 


감독과의 머리싸움은 조금 나중으로 제쳐두자. 이야기의 큰 줄기가 사라진 영화에서 돋보이는 것은 항상 인물과 말, 사물 그 자체다. 그들은 더 이상 서사의 도구가 아니다. 커피를 따르는 종업원, 커피잔, 농담, 안부인사, 사인을 받기 위해 펼친 작은 노트, 종이컵, 일본에서 가져온 콩. 미장센은 마치 주제처럼 우리의 눈 앞에 불쑥불쑥 등장하고, 그것들이 가진 사물 특유의 질감을 즐기며 영화를 따라가는 것도 꽤나 재미난 일이다. 보통 그건 영화를 보다 한눈을 파는 일 취급을 받겠지만, 이번엔 다르다. 고맙게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따라가야할 흥미진진한 서사는 실종되고 없지 않은가? 


<커피와 담배>는 어쩌면 그런 것들에 대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겉으로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작은 챕터들 중간중간, 그들은 걱정하듯 말한다. 커피와 담배가 점심? 샌드위치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끊는 게 좋을 텐데요. 그런 걸로는 식사를 해결할 수 없죠. 그건 몸에 해롭지 않나? 요즘으로 치자면 (인스턴트)커피와 담배란 그저 끝내주는 입냄새를 만들기 위한 끔찍한 조합에 불과하겠지만, 언젠가 어딘가에선 약간 달랐나보다. 몸에는 나쁘다. 끊기도 어렵다. 하지만 끊을 생각도 없고, 나는 이걸 마시고 태울 테다. 식사 대신 커피와 담배를. 그들은 다양하게 그걸 즐긴다. 손잡이 대신 위로 잡아서, 설탕을, 혹은 연유를 넣고, 말보로를, 직접 말아 피우는 담배를, 한 잔을, 아니면 몇 잔을 늘어놓고 한 잔씩, 아니면 커피 대신 허브 차를, 홍차를, 데낄라를... 별 중요하지도 않은 그런 것들을, 마치 식사처럼. 


직업도, 취미도, 취향도, 나이도, 모든 것이 다른 그들이 공유하는 것이 있다면, 단 하나. 커피와 담배(물론 정말 '모두'는 아니지만)가 있는 테이블. 그 테이블에 둘러앉아 그들은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을까. 


음향 공명 전도체로서의 지구


그런데 서사는 정말 없을까? 열한 개에 달하는 이 챕터들이 단순히 우연히 모인, 아무 연관성 없는, 파편화된 장면의 콜라주에 불과할까? 현대 예술에서 파편화, 파편적이라는 말은 정말 사랑받는다. 무의미도 사랑받는다. '난해함'과 잘 어울리는, 해석 아닌 해석이다. 가끔 그것들은 일종의 면죄부처럼 작용한다. 어디서나 쉽게 쓰이고, 그러나 비껴나가는. 


<커피와 담배>의 '파편화'된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서서히 눈치채게 되는 것이 있다. 분명 앞에서 언급된 것 같은 어떤 개념들. 반복되어 언급되는 것들. 이를테면 (커피와 담배는 제외하고)사촌, 음악과 의사, 커피와 꿈-그리고 빠르게 지나가는 꿈들, 잘 기억하지 못하는 서로의 이름, 얼려먹는 커피, 니콜라 테슬라... 


의도된 반복 혹은 패턴. 그런 것을 작위라고 한다. 난해한 무언가가 완전한 무의미로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 마치 징검다리처럼 놓인 희미한 패턴들. 작위엔 언제나 메시지가 담겨있다. 그건 거의 불변의 사실이다. (무의미의 지향은 언제나 무의미란 의미 때문에 실패하곤 한다) 서사라는 개념을 너그럽게 확장시켜서 생각해볼 수 있다면, 나는 반복(혹은 패턴)이 서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어쩌면 서사의 최소 개념일지도 모른다. 의미는 보통 거기서부터 시작되곤 한다.


음향 공명 전도체로서의 지구란 무엇일까. 인상적인 장치가 하나 있다. 잭이 메그에게 테슬라 코일을 보여주고 떠나간 뒤, 혼자 남은 메그가 커피잔에 숟가락을 땡 치는 그 소리는 유난히 또렷하고 맑다. 그것과 거의 같은 음정의 맑은 종소리가(도저히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라곤 생각하기 어렵다), 열 번째 챕터인 '정신착란'에서 두 흑인이 찻잔을 부딪칠 때 다시 등장한다. 그들의 사소한 이야기들과 상관없는, 하지만 항상 그들의 옆에 있는 그 마실 것에서 난 소리가, 서로의 세계에 간섭하고 있다. '사촌?' 챕터에서 알프레드(어째 배우들이 죄다 실명을 극 중 이름으로 쓰고 있다)가 마주 앉은 스티브 쿠건에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을 이야기를 떠벌떠벌하는 장면에서, 그러나 의외로 진중한 실마리가 흘러나온다. A에서 B로 전이되는 작은 사건들. 인간의 삶 속에 내재된 사소한 것들. 11개의 챕터의 인물과 이야기들(심지어 한 챕터 내의 인물들도 서로 간에)이 서로 다른 사정들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세계엔 항상 커피잔과 재떨이, 담배가 놓인 테이블이 놓여 있다(그리고 그것들은 거의 모든 챕터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탑뷰 형식의 시선을 잠깐씩 받는다). 그것들은 항상 큰 것이 아니라 작은 사건이며, 사소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분명 그들의 이야기 사이사이마다 끼여 공명하고 있다. <커피와 담배> 말이다. 


11. 샴페인


그런데 그런 것들이 무슨 위안이라도 줄 수 있을까? 그러니까 커피와 담배는 '식사'가 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그것들은 기호품에 불과하다. 그런 것들로 식사를 때웠다간 '건강을 해치기' 십상이다. 마지막 챕터에서, 한껏 늙은 두 청소부(아마도 청소부겠지)들은 힘이 빠진 듯 테이블 곁에 걸터앉아, 건배를 해도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는 테이크아웃 종이컵에 정말 맛없는 커피를 담아 홀짝거리고 있다. 그들은 이미 점심을 든든하게 먹었고, 쉬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있다. 커피와 담배에겐 그것들을 위한 커피브레이크라는 쉬는 시간이 따로 주어져있다. 이제 끼니를 그런 것들로 때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휴식시간이다.


아 이렇게 우울할 수가. 노인은 그것에 대해 절망한다. 그는 사실 커피와 담배 따위로 끼니를 때우길 바랐던 사람처럼 말한다. 그의 귀엔 아름다운 마지막 공명 소리가 들린다. 샴페인. 그는 마법의 주문을 외운다. 커피도 맛있어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곧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다. 커피와 담배를 위한 휴식시간이 주어진 곳. 누구도 그런 사소한 것들로 끼니를 때우지 않게 된 시대. 사소한 것을 위한 사소한 시간(겨우 10분)이 따로 있는 세계. 그는 이제 무기력하게 잠에 빠져든다. 더 이상 건강을 해치진 않겠지만,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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