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변한다’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사이. 우리는 어떻게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을까. 변하는 것도 있고 변하지 않는 것도 있겠지. 나는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 같다. 지금의 나는 20대보단 많이 변했다. 갈대처럼 흔들리던 20대의 나는 단단한 어른으로 자랐다. 반면,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건 맘편히 쉬지 못한다는 것이다. 쉬어 가는 것이 멈추는 게 아님을 아는 지금도, 나는 쉬는 것에 소질이 없다. 무언갈 하지 않으면 나태하다는 생각과 함께 불안감이 고개를 처들기 때문이다. 그 시절도 그랬다.
다시 무직자가 되면서, 나는 작게 한식당을 운영하던 엄마의 가게 일을 돕기 시작했다. 내가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집에서 놀고 먹는 것 같은 내게 반강제로 주어진 일이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나가서 뭐라도 하는게 나았다. 배달이 주업무였지만, 한가할땐 심부름부터 설거지까지 할 수 있는 일들을 도왔다. 21살이라는 나이에 식당일을 한다는 것이 내 자존감을 바닥으로 끌어내렸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다. 사계절을 온몸으로 느끼며 논으로, 밭으로, 때론 공사현장으로 배달을 다녔다. 그들은 늘상 나를 기분좋게 반겼다. 내가 왔다는 건 그들의 쉬는시간을 의미했으니까. 내 차가 보이면 일 손을 놓고 모여들었다. 오늘 반찬은 뭐냐며 살갑게 말 걸어주는 분도 생겼다. 쟁반을 내리며 그들 사이에 섞여 농담을 주고받을때면 사람 좋은 냄새에 마음이 찡하기도 했다. 그들 눈엔 나이도 어린 내가 열심히 사는 듯 보여 더 예뻐해 주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해 가을인가 추수가 한창이던 논으로 배달 간 일이 있다. 논 길이 다 그렇진 않겠지만, 유난히 좁은 길이었다. 밥을 내려놓고 후진으로 나오는 길에 논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아저씨들이 숟가락을 내팽겨치고 달려왔다. 너무 놀라 울지도 못하고 있다가 아저씨의 괜찮냐는 투박하지만 다정함이 깃든 한마디에 울음이 터졌다. 아저씨는 쉬고 있던 트랙터를 움직여 나를 끌어냈다. 죄송하다고 우는 내게 아저씨들은 껄껄 웃으셨다.
“ 괜찮아. 경험이라고 생각해. 살다 보면 거꾸러지는 날도 있는 거지 뭐. ”
하지만 그 때는 몰랐다. 살다보면 거꾸러지는 날의 의미를.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건넨 저 말이 진한 경험에서 우러나왔다는 것은 내가 배달일을 그만두고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배달일에 점점 익숙해져갔다. 뚝배기 6개가 든 쟁반 위에 반찬과 밥이 든 쟁반을 올린채 3층을 오르내릴 만큼 힘도 세졌다. 툭하면 넘어져서 쟁반을 엎던 서툰 날들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운전 실력도 나날이 늘어갔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달리기도 했고, 우울한 날이면 금빛 벼가 넘실대는 논두렁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앉아 있기도 했다. 일이 익숙해져 갈수록 ‘내가 지금 이걸 하고 있는게 맞는 건가’하는 질문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마음이 힘들때면, 없던 심부름을 만들어서 풍물시장에 가거나 엄마를 졸라 오일장에 갔다. 시장 문턱에 서서 왁자지껄한 시장통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도 잘 하고 있다는 위안이 느껴졌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 틈에 껴있으면 나도 그럴수 있을꺼라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풍파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걸 알기에 난 너무 어렸다.
그때의 흔들리는 날 보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도통 모르겠다. 엄마와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가끔은 투닥거렸고, 또 가끔은 시장에서 호떡을 사먹으며 행복했다. 점심시간이 끝날때쯤 배달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자반고등어를 구워 놓고 나를 기다렸다. 고생했다며 말을 건네는 엄마에게 좀 더 살갑게 대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그 때가 엄마와 온종일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시절이었다. 하지만 내 앞길이 안보이는 상황에서 난 나밖에 보지 못했다. 뒤에서 걱정의 눈길을 보내는 엄마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끊임없이 할 일을 찾는 내게 엄마는 말했다.
“ 뭔가 다른 걸 배워보는 게 어때? ”
내가 이 일을 언제까지고 계속 할 수 없음을 엄마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식당일이 좋은 날도 있었다. 특히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싫다는 생각이 들 때 그랬다. 이대로 엄만 음식하고 나는 배달하며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들때면 식당일이 좋은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그렇게 3년을 보낸 어느 날이었다. 어느 겨울, 방학을 맞아 친구들이 고향에 내려왔다. 간혹 만나기는 했지만, 그 날 만난 친구들은 사회인이 다되어 있었다. 곧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한다고 했다. 그들이 공부하고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을 갖게 되는 동안, 나는 아직도 후줄근한 츄리닝 차림에 식당일만 하고 있었다. 나도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 날 저녁,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엄마, 아빠에게 술주정을 했다.
“ 어째서 날 대학에 보내주지 않았어? 나도 걔네들처럼 잘 할 수 있었는데.. 왜? ”
몇 년간 쌓인 설움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술 취해 주저앉아 우는 나를 엄마가 부둥켜 안고 같이 울었다. 그 일을 계기로 엄마는 식당을 접기로 하셨다.
“ 너도 네 갈 길 가야지. 엄마가 너무 오래 붙잡아 뒀어. 미안해. ”
정리는 순식간이었다. 가게는 내놓았고, 엄마는 다른 식당으로 주방일을 다니기로 했다. 엄마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가 계속 배달 일을 하지 않을 거라는건 나도, 엄마도 알고 있었다. 그때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다. 내가 그때 배달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지금 엄마와 내 인생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지금 난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를 먹었다. 너무 늦어버린 깨달음이지만 공부하겠다는 딸, 대학에 못 보내고 식당 일을 시켜야 했던 엄마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싶다.
배달통을 들고 오가며, 논두렁에 차를 세우고 울면서, 그리고 엄마와 함께했던 식당에서, 나는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그때의 경험이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지금의 내가 되지 않았을까.삶은 학교 밖에서도 우리를 가르친다. 나는 그 시절, 배움 대신 삶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