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20여 년 전의 기억들을 자꾸 더듬게 된다. 그 시절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엇을 배우고 겪었는지 곱씹게 된다. 난 어려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막연했지만 ‘나라면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형편상 대학에 가지 못했을 때에도, 늦게라도 이룰 수 있으리라 희망을 품었다. 1년 후면 대학에 갈 수 있겠지.. 그 해가 지나면 또 내년이면 갈 수 있겠지.. 하던 날들은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에서 사라져 갔다. 대학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던 것이다. 지금 나의 기억력이란 조잡스러워서 큰 줄기의 기억들만 남아 있지만, 꿈을 완전히 포기하던 순간만큼은 또렷이 생각난다.
식당일을 그만두고 여기저기 경리 사무직을 모집하는 곳곳에 이력서를 냈다. 그중엔 세무사 사무실도 있었다. ‘회계를 전공한 대졸자 우대’라는 문구가 뚜렷했지만 무슨 배짱이었는지 덜컥 지원해 버렸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다. 고졸이고, 관련 경력도 없는 나는 이미 몇 번의 탈락을 경험한 후였다. 붙을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면접 날, 세무사님은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 이 일이 쉽게 보였나요? 어떻게 지원할 생각을 했어요? ”
“ 고등학교에서 부기를 배웠습니다. 처음이니 당연히 서툴겠지만, 3개월만 주시면 열심히 공부해서 잘할 수 있습니다. ”
이렇다 할 경력도 없고 내세울 것 없는 면접에서 패기 넘치는 대답으로 세무사 사무실에 취업하게 됐다. 그곳의 동료들은 모두 대졸자였고 고졸인 내가 어떻게 뽑힐 수 있는지 의아해했다. 시기와 미움이 따라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의 입장에선 당연한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는 공부와 부단한 노력을 통해 얻은 보상이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고용보험에 입사신고를 하던 날, 직종란에 ‘전문직’이라고 찍힌 걸 보고 눈물이 날 만큼 기쁘기까지 했다. 식당일이 아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직장이 생겼다는 사실. 조금씩 돈을 모아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는 기대. 그 모든 게 내게는 미움을 상쇄할 수 있는 충분한 기쁨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인수인계도 없이 내 앞으로 배정된 거래처가 대략 서른 개, 뭘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했다. 학교에서 배운 회계 지식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고, 난생처음 써보는 더존이란 프로그램은 상상이상으로 어려웠다. 미움받는 중이라 쉽게 도움을 청할 수 없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고 싶지 않았고,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것도 싫었다. 매번 조금씩 바뀌는 세법 때문에 회사에서 보내주는 교육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선배들은 쓱 보고 넘기는 책을 집으로 가져가 밤마다 읽었다. 결국 내가 예상했던 3개월보단 훨씬 더 오래 걸렸지만, 회사생활에 잘 적응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꺼냈다.
“ 사실... 내가 그동안 카드 돌려 막기를 하고 있었어.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다.
그리고... 네가 보증 섰던 것도 못 갚았어. ”
그 말은 곧, 내가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뜻이었고, 얼마 되지 않는 내 월급에 차압이 들어올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몇 살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릴 적 아빠의 부탁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보증을 서 준 적이 있었다. 그 빚이 내게 돌아온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난 꿈에서 완전히 멀어져 버렸다.
아빠가 빚을 갚지 못하자, 빚독촉은 곧바로 시작됐다. 내가 보증서준 곳이 어딘지도 몰랐는데, 어느 날 ‘대부계 상담원’이란 중년 남자의 전화를 받고 알게 됐다. 삼성카드였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아버지와 어떤 관계인지 물었고, 보증을 섰으니 대신 변제해야 한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날부터 고작 70만 원의 월급 중 절반을 떼어 빚을 갚는 삶이 시작했다. 핸드폰 요금과 주유비를 빼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 그래도 신용불량자가 되기는 싫었다. 이를 악물고 갚았다. 빚 갚는 일 이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월급날이면 어김없이 전화하던 그 중년의 남자에게, 화도 냈다가, 애원도 했다가, 울기도 했다.
그날도 그런 날들 중 하나였다.
“ 아저씨, 저 꼬박꼬박 갚고 있잖아요. 독촉하지 않아도 드린다고요!! ”
“ 오늘은 다른 일로 전화했어요. 내 보니 내 딸뻘인 것 같은데 사정도 딱하고 안쓰러워서요. ”
“...... ”
“ 혹시 아버지 하고 같이 파산 신청을 해보는 건 어때요? ”
나는 ‘파산’이 뭔지도 몰랐다. 나라에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는 저녁에 잠깐 만나자고 했다. 나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사람이 많은 시내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정말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이었고, 이미 삼성카드에서 떼야하는 모든 서류를 정리해 가지고 나왔다. 그러면서 본인은 제안만 해줄 수 있을 뿐이고, 법무사를 알아보고 진행은 내가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 회사에는 내가 얘기했다고 말하면 안 돼요. 나도 월급쟁이인지라.. ”
나는 눈물을 주룩주룩 쏟았다. 전화기 너머에만 있던, 생면부지의 남자가 나를 가엾게 여기고 본인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나를 살리고 있었다. 파산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그는 가끔 안부를 묻는 전화를 했다. 파산선고가 나자 이제 이런 일과는 엮이지 말고 편하게 살라는 마지막 통화 후 그와의 인연은 끊겼다. 이 고마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파산을 했다고 해서 개인적인 빚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금융권의 독촉이 없어지자 이모할머니의 빚독촉이 시작되었다. 아빠는 다시 일을 시작해 돈을 보내주었지만, 늘 부족했고, 나는 내 월급을 보태며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빚을 갚았다. 난 내가 쓰지도 않은 빚을 갚아갔고, 경력도 쌓여갔다. 힘들어서 울기도 많이 울었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괴로워하며 몸부림치기도 했다. 그런 나와는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빚을 다 청산했을 때의 해방감이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에 마음이 부풀었다. 그리고 나는 월급을 더 많이 주는 곳으로 이직도 했다.
그 시절을 보낼 땐 몰랐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난 그때 많이 성장했던 것 같다. 그저 묵묵히 지나온 날들이 내 안에 힘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어려운 일을 마주하는 용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 참고 버티는 인내. 모두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바닥을 친 사람이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말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그 힘든 시절도 버텼는데 이거 하나 못하겠나’ 싶은 생각이 들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다. 지나갈 것 같지 않은 시간도 다 지나간다. 그럼 봄도 오고 꽃도 피더라. 나는 지금 봄길을 걷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는 별다른 꿈 없이 살았다. 꿈을 가져야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하고 싶은 일도 딱히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시 꿈이 생겼다. 책 읽고 글 쓰는 삶. 멋지지 않은가. 꿈 대신 현실을 짊어졌던 나의 20대와 30대를 보내고 이제는 현실 위에, 꿈을 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