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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이피는섬 Jul 03. 2023

살다 보면 손절도 당하는 거지

에세이가 아닌 그냥 일기

한 10년 전, 아주 오래된 친구와 크게 다투었다.

오랫동안 친구에게 가지고 있던 불만이 그날 갑자기 터져버렸다.

늘 똑같은 패턴으로 반복되었던,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친구의 행동이 그날도 어김없이 나왔고

왜 그랬는지 그날은 나도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그 친구에게 불만이나 힘든 점이 있으면 그 상황에 솔직하게 말했으면 됐을 텐데 아무 말 없이 10년 넘게 참고 있다가 갑자기 폭발하는 건 그 친구 입장에서는 어이없었을 것 같다.

말하자면 '김치찌개 먹을까?'라는 질문에 10년 동안 '응, 그래.'라고 답해놓고

갑자기 '또 김치찌개야!'라며 상을 엎어버린 느낌이랄까.


지금 생각하면 애초에 나를 불편하게 했던 친구의 잘못 보다 내 행동이 몇 배는 더 이상했다는 걸 인정한다.

지금이야 아무리 친한 친구도 말하지 않는 내 속마음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20대 때나 그보다 더 어렸을 때는 그 사실을 몰랐다. 당연히 내 마음 정도는 아는 줄 알았다.


그걸 몰랐던 어린 시절엔 나와의 약속에 매번 변수를 만드는 친구에게 허탈함과 배신감마저 느끼면서도 내 감정을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친구는 예를 들면 '토요일 12시에 만나자.'라고 나와 약속을 하고, 3시에는 다른 사람을 만날 약속을 잡는 식이었다. 나는 토요일 12시에 만나서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고 쇼핑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날의 일정을 함께 보낼 생각을 하는데, 그 친구에게는 3시에 다른 약속이 있는 거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토요일에 친구와 만나서 밥 먹고 커피를 마시다가 2시 50분에 알게 되는 식이다.

그런 일도 있었다. 친구랑 둘이 놀이공원에 가기로 했는데 막상 약속 장소에 가보니 다른 친구들까지 서너 명이 더 와 있는 거다. 물론 거기 나온 사람들도 내가 오는지 모르고 있었다. 당황한 얼굴의 나를 보며 친구는 '여럿이 같이 놀면 더 재밌으니까.'라고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그저 한숨을 한번 내쉬고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쩌면 그날의 일정을 혼자서 생각해 놓은 내 잘못인가, 혹은 꼭 둘이서 가자고 정한 건 아니니 다른 친구들을 부르는 게 틀린 건 아닐지도, 그리고 친구 말대로 그런 곳은 여러 사람이 함께 가면 좋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바꿔먹었지만 당황스러움과 친구에 대한 불만은 차곡차곡 쌓였던 것 같다.   


결국 10년 동안 얹힐 대로 얹힌 감정은 아주 작은 꼬투리에 터져버렸다.


대폭발!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대폭발이 일어났고 나는 친구를 향해 속사포 같은 불만과 비난과 분노를 쏟아냈다. 



그리고 그 이후. 그 친구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느냐!


한 마디로 말하면 나는 그 친구에게 손절당했다.


10년 전, 내가 한 레스토랑에서 묵은 감정들을 쏟아낼 때, 친구는 묵묵히 들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동문서답처럼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방금 내 말을 못 들은 사람처럼.


그 태도에 황당했던 나는 자리를 옮겨 카페에 가서도 주절주절 과거의 사례들을 나열했다.

그때도 친구는 듣기만 했다.


사과를 하거나 차라리 화를 내거나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건 뭐지? 싶었다.



그 뒤로 그 친구와는 오랫동안 형식적인 친구로 남아있었다.

계절이 바뀌면 안부를 묻고 가끔씩은 얼굴도 보면서.



그러다 최근에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이 친구는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걸.

먼저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해도 바로 답하지 않고 며칠 지나서

'바빴다.', '일이 있었다.' 같은 답이 오고는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기를 몇 년.


어느 순간 나도 이 관계의 끝을 받아들였다.



돌아보면 내가 폭발했던 10년 전, 그 친구가 사과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던 그때가 끝이었던 걸까 싶기도 하다. 친구는 오랜 시간 동안 착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갑자기 혼자서 쌓아놓은 불만을 끝도 없이 주절주절 되뇌는 나에게 질렸는지도 모른다.



내 감정에 솔직한 법도,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도 몰랐던 미숙했던 나와 남들과는 생각하는 법이 조금 다른, 독특했던 친구. 두 사람의 환장의 콜라보 같은 끝이었다.



우리 둘 사이엔 오랜 시간만큼이나 소중하고 애틋한 추억도 많다.

어느 여름날 훌쩍 떠난 짧은 오토바이 여행,

나만 알고 있던 아름다운 풍경을 둘이서 말없이 오래오래 바라보았던 일...

함께 했던 시간만큼이나 달고 쓰고 짠 추억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 친구와의 관계가 다시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기에는 나는 그런 추억들의 힘을 믿었던 것 같다.

(그 친구 입장에서) 아무리 내가 정 떨어지는 행동을 했더라도 우리는 헤어질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추억이 관계를 지켜주지는 않는다.

추억은 말 그대로 과거이고 관계는 언제나 진행형이니까.


어떤 것들은 부단한 노력으로 지켜지기도 하지만 어떤 것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결과를 더 이상 '내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10년 전 그날,

나를 이미 놓았던 친구의 마음을 나는 이제야 받아들인다.


누구의 잘못이 더 큰지가 중요하지도 않고,

어쩌면 그 싸움이 있었는지조차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관계는 자연스럽게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게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라서, 결국 '지금'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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