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나 빠른 자기소개서
(취업 성공 사례)

- 취업 성공 사례

by 김용원


취업 성공 사례


① “누군가, 나의 취업 준비를 조목조목 따져가며 지휘해주었으면……”

- 28세 女 김희*


취업을 준비하는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보았을 법한 생각이다. 취업준비는 사실 처음이 아니었지만 처음이기도 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번이 두 번째 회사이지만 제대로 취업준비를 한 것은 처음이란 소리다.

고 3, 수능을 실패하고 도망가다시피 유학길에 올랐지만, 나는 원래 영어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고등학교 내내 영어 내신 성적은 50~70점 사이를 오고 갔고, 심지어 과외선생님까지도 “너는 영어에 대해 어떻게 진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일단 어휘나 잡고 해석으로 때려잡아라.” 라고 하실 만큼 문법에도 약했다. 더군다나 유학생활 내내 부적응자가 되어 우울증을 달고 살았던 터라, 영어는 늘 기미가 보이지도 않았다. 히키코모리 마냥 방 밖으로 나서지 않은 날이 얼마나 많았는지, 결국 아슬아슬하게 다니고 있던 대학을 때려치우고 한국에 들어 왔다. 그 즈음해서 아버지 회사가 부도가 나기도 했고.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 이상 부모님께 폐를 끼치기 싫어서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일주일 여 만에 연락이 온 파견업체를 통해 덥석 취직을 했다. 사이버 대학교에도 편입을 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나 계약이 만료되고, 본사로 발령이 났음에도 여전히 나는 계약직이었다. 2년 갓 넘은 계약직이자 스물여덟 살. 말이 연봉제 직원이지, 현실적으로는 계약직이었던 그 회사에서 20대를 날려버리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느긋하게 이직을 하자니 나이가 너무 아슬아슬하다 생각해서, 붙잡는 손들을 뿌리치고 퇴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취업에 대해 얼마나 안이하고 쉽게 생각했는지를 깨닫게 되는 계기였다. 이력서를 넣은 곳이 약 100곳. 면접 제의는 단 네 번. 그 중 두 번은 집과 회사의 거리가 왕복 4시간 가까이 되는 곳인데다, 주말 출근과 지정 업무 시간이 10시간 정도 되는 곳들이라 고민 끝에 면접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한 곳은 면접 후 그 곳에서 날 거절했다. 좌절의 나날이었다. 주변 사람들 말대로 최소한 1년만 더 버텨서 학사 학위라도 받은 다음 이직할 것을 그랬다. 취직준비를 너무 우습게 여긴 것 같아 후회가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김용원 직업상담사님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취업상담과 컨설팅을 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솔직히 처음엔 별 영양가 없는 제안을 한다 싶었다. 자기소개서를 쓸 만큼 써보았고,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이 필요할 것이라며 이틀 연속으로 확신에 찬 전화를 주셨던 직업상담사님의 강한 의지에 휩쓸려 사이트에 들어가 공지를 확인하고, 지원서를 넣고, 얼떨결에 일사천리로 청년뉴딜 3기의 멤버가 되었다. 청년뉴딜 프로그램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컸던지 얼굴에 귀찮음과 관심 없음이 대놓고 드러나 있었던 모양이다. 참가 확정이 되고, 기왕 하는 거 적극적으로 덤비자고 마음을 바꿔 먹은 내가 나타났을 때, 상담사님은 나를 몰라보셨다고 하더라.

일단 참가하기로 한 이상, 전적으로 직업상담사님의 컨설팅에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신청과 동시에 빠른 속도로 자격증을 하나라도 따자고 하셔서, 컴활 2급 필기부터 신청, 일주일 만에 통과했다. 내 성격에 맞는 직업, 내가 막연하게 희망하는 직업, 현실적으로 내가 잘 할 수 있는 직업 등을 파악하기 위한 심리 검사도 받았고, 앞으로 만날 상사와 동료직원들의 성격 유형에 대해 대처하는 방법도 배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첨삭”, 그리고 이력서가 어떻게 작성되어야 하는지, 어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가 보기 좋은지도 배웠다. 아마 이 때부터 참가자들이 가장 열성적으로 듣기 시작한 것 같다. 직업상담사님은 내가 하려고 생각했던 것들, 자기소개서에 이용하려 했던 것들을 단번에 이해하고 유리한 방식으로 다시 풀어주셨다. 약점을 강점으로 적절히 포장하면서도, 진솔함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청년 뉴딜 3기를 함께했던 여덟 명의 참가자들은 함께 준비한다는 동질감도 있었지만, 처음엔 경쟁심과 견제가 더 컸던 것 같다. 단순히 나만 뒤쳐지는 것 같은 그런 패배감이 뒤섞인 견제가 아니라, 자신의 자존감을 팍팍 깎아먹는……, 이 상황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의 자세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우리는 동지가 되었다. 서로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말로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모의면접을 할 때엔 살벌할 정도였다. 참가자들이 한마음으로 무시무시한 질문들만 쏟아냈다. 예상은 했지만, 직시하지는 못했던 내 문제점들에 대한 비판이 가감 없이 쏟아졌다. 아마, 취업에 대한 절실함이 모두를 독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모두 함께 취업해야 한다는 절박함 말이다.

이렇게 집단 활동이 끝난 후 진행된 개인 면담 시간! 우연히 면담 도중 면접 제안 전화가 왔다. 채용 내용은, 약 7개월간의 단기 계약직 근무. 물론 또 계약직으로 취업을 해서 2년을 더 다니라면 지금의 나라도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대학 중퇴라는 거대한 걸림돌을 어찌하지 못한 채 멈추어 있었다. 일단, 나중에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통화하는 내용을 들은 직업상담사님과 의논을 시작했다. 현재 스펙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외국계 대기업이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계약직으로라도 경험을 쌓는 것이, 나중의 이력을 위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금전적인 문제로 더 이상 취업을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무엇보다도 계약 만기 즈음엔 학사 학위가 나올 것이었다. 어쩜 그리 딱딱 맞아 떨어지던지! 보수를 적게 준다 하더라도 일단 일하면서 다음을 준비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면접 결과는 합격이었다.

가까운 미래, 계약이 만료되고 다시 취업 시장에 나를 내놓아야 할 때, 나는 청년 뉴딜 3기에서 배웠던 구직 기술들을 다시 한 번 써먹어 볼 생각이다. 그때 공부했던 자료들을 모두 스크랩 해두고, 나름 신경 써서 만들었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도 수정했던 순서대로 철해두었다. 그리고 좀 더 욕심을 내서, 지금은 공기업 지원을 위한 자격증을 하나하나 천천히 취득하고 있다. 내 안의 마지노선은, 올해 가을이다.


② “취업 고민은 전문가와 함께해야 답이 나옵니다!

- 30세 男 송*종

안녕하세요. 저는 청년뉴딜 3기였던 송*종입니다. 취업 수기를 써달라고 하셨을 땐 흔쾌히 승낙을 하긴 했지만, 지금 이 글을 적으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니, 살짝 민망해지는군요. 한마디로, 청년 뉴딜 프로젝트와 함께 했던 2014년은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먼저, 청년 뉴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지금 생각해도 조금은 신기하거든요. 집에서 빈둥거릴 때 일입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주민센터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구직상담코너가 눈에 들어왔어요. 평소 같았으면 빠르게 집에 와서 게임을 했겠지만, 그날은 조금 달랐어요. 상담을 받아 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구직 신청서까지 제출하게 되었죠. 그로부터 한 달 뒤, 청년 뉴딜 프로젝트에 대한 안내 전화를 받게 됩니다. 사실 생각에도 없던 부분이었지만, 그렇기에 무언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고, 개별 상담 절차를 거쳐 청년 뉴딜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청년 뉴딜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저는 서른이었지만 세상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취업준비라는 것을 해본 적도 없고요. 한두 달 정도 했었던 두세 개의 단기 아르바이트가 유일한 생산적 활동이었죠. 저는 ‘취업’이라는 관문을 넘기 위해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렇기에 청년 뉴딜은 저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어떤 부분을 보완해야 하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조금 더 나아가서는 나의 강점을 필살기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헤매다가 주저앉아 있던 저에게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면서 같이 가준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집단상담 첫 모임 때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자신 있게 ‘무직’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언어적 스트레스가 한 방에 풀리더군요. ‘취업’이라는 문제를 공유할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에, 같은 문제로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청년 뉴딜 3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결과를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저는 ‘취업’이라는 관문을 넘게 되었습니다. 어떤 회사에, 얼마만큼의 연봉이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2014년 초, 저의 꿈은 따뜻한 곳에서 굶어 죽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참 재미있는 게 용기가 없어서 모든 것에 대해 도망을 쳤지만, 죽을 용기가 없어서 삶에 대해서도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처참함과 슬픔에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삶에 대하여 도망칠 수 없다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닫았던 ‘세상을 향하는 문’을 무섭지만 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취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돈도 필요했지만,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취업’은 단순히 ‘취업’일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그랬고, 많은 청년들이 그럴 겁니다.

취업을 위한 “집단 상담”을 홍보하자면 저 같은 사람도 취업시켜서 사람 구실하게 만든 프로그램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취업’이라는 관문 앞에서 소주를 마시며 울부짖거나, 고시원 방안에서 입을 막아가며 울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직업상담사를 찾아 가세요. “학습된 무력감”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새롭게 보일 겁니다.



③ "준비하는 사람은 위대함을 얻는다."

- 25세 女 고*헌



“지금 현재 가장 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순간은 언제입니까?”

“왜 돌아가고 싶은가요?”

“그 때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을 보면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참 딱하다. 고*헌"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면식도 없는 상담선생님 앞에서 몇 분간을 조용히 울었습니다. 첫 면담시간에 말이죠.

저는 불안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신을 더 괴롭게 만드는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 8개월이라는 긴 백수생활을 지내고 나서야 제게 이런 나쁜 습관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외로이 취업과 씨름하는 동안 ‘혼자 싸워야 해! 혼자 이겨내야 해!’라는 생각을 늘 해왔던 것 같습니다. 자신감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자존감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인사 담당자들은 ‘나를 대변해 줄 수 있을까’ 싶은 2장의 이력서로 저를 평가하고서 끝내 ‘다음 기회에’라는 기약 없는 말만 되풀이 했습니다.

억울했고, 체력적으로 지치기도 했습니다.

이 싸움의 끝이 안보이고, 이길 자신도 없어 보였습니다. 스펙을 쌓아도 더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공기업에서 2년의 계약기간을 만료하고, 취준(취업준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몇 달은 2년 동안 수고한 저에게 휴식과 충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소위 놀고먹는 생활을 즐겼습니다. 후회는 하지 않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실속 없는 시간낭비였습니다.

그렇게 2~3개월을 허황되게 보내고, 몇 군데에 입사지원을 했지만, 면접 보러 오라는 데가 한 곳도 없었습니다. 이력서를 쓰는 시간 외에 토익 스피킹, 전산회계 1급 등의 자격증을 준비하며 동시에 취업스터디도 했습니다.

부족한 스펙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결핍 증세를 보이며, 부족한 느낌만 들었습니다. 절망의 순간에 다다를 즈음 저는 직업상담사님을 만났습니다.

우선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저를 위한 상담 선생님의 처방은 ‘자신을 사랑하라’, ‘나답지 않은 일을 해라’였습니다. 그 계기로 제 자신을 사랑하기로 다짐했습니다. 매일 아침에 거울을 보며 ‘잘 할 거야. 힘내자. 사랑해’라고 말했고, 잠들기 전에도 제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오늘도 수고 했어’라고 격려했습니다.

집단 상담은 늘 즐거웠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침울 할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보여주시는 동영상들을 통해 긍정의 기운을 얻고, 집단 상담 동기들과는 서로 의지하며 허한 마음을 채웠습니다.

자기소개서 작성법을 통해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또 다른 구직기술을 배우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표현하며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발표와 모의면접을 통해 면접 상황에 익숙해지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얻은 칭찬들에 자존감도 회복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명이 취업을 했습니다. 집단 상담에 대한 믿음은 커졌지만, 한 편으론 마음이 촉박했습니다.


6주간 10명으로 진행된 취업지원 프로그램을 종료하는 수료식에는 취업자 6명을 제외한 미취업자 4명만 참석했습니다. 패배자의 모습을 감추었으나, 속마음은 썩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모인 사람들과 대기만성을 외치며 무사히 수료해냈습니다.


“저는 대기만성 형이 되었을까요?”


직업상담사님을 통해 취업 한지도 벌써 6주가 흘렀습니다. 8개월간의 백수생활을, 얼굴에 그늘이 지고 늘 우울했던 저를 청산한지도 6주가 되었죠.

‘아침’이 두려워했던 제가 이젠 ‘출근’을 걱정하는 ‘아침형 여자’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은 아니지만, 작은 기업일지라도 한 파트를 책임지는 책임자의 길을 꿈꾸며, 신나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작은 기업이기에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게 저를 신나게 합니다. 지난 2년간 공기업에 근무하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업무 만족감이 열심히 일하게 되는 원동력입니다.


연봉을 많이 주는 곳? 회사 복지가 정말 좋은 곳? 저도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배우는 것이 즐겁고, 일하는 것이 신나는 직장을 갖기는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김용원 직업상담사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현재 직원의 자기계발과 복지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중소기업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3월 19일에 보라카이로 해외 워크샵도 갈 예정이며, 올해는 죽기 살기로 영어 공부를 할 계획입니다. 올해 미국 출장도 있을 것 같거든요. 미국에 지사가 설립될 예정이라.


제게 ‘집단 상담’은 취업을 위한 길잡이 이상으로 자존감을 찾을 수 있었던 활동이었습니다. 프로그램의 주요 목표가 취업임은 틀림없으나, 나 자신을 끊임없이 탐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기에,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건 지금 생각해도 감사한 행운이었습니다.

자기소개서 작성법, 면접 자세, 말투, 면접 복장 등을 알려주는 곳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진정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얻고 싶은지, 무엇을 고쳐나가야 하는지, 나를 얼마나 많이 사랑해야하는지 등 본질을 탐구하고 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은 집단 상담뿐이라 생각합니다. 모두가 이 과정을 거쳐 사회에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집단 활동을 하며 잊을 수 없었던 한 가지는, 제가 제 자신에게 쓴 편지를 3주 후에 받아보았을 때입니다. 부끄럽지만, 취업하기 전, 저는 저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위로의 말과 힘내라는 격려의 글만 썼습니다. 취업하기 전인 그 때는 (취업 후에는 다시 겪지 못 할) 어떤 즐거움과 어떤 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를 썼으면 좋았을 텐데요. 백조로 살던 시간들이 마냥 힘들기만 하진 않았을 텐데, 아쉽더군요.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가 좋아하는 글귀예요.

"나무를 심어야 할 가장 좋은 시기는 20년 전이었다. 그 다음으로 좋은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아프리카 속담 중


"준비하는 사람은 위대함을 얻는다."

- 「세계에서 움직이는 리더는 어떻게 공감을 얻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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