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은 없지만 일년 내내 있는 좋은 것들도 있겠지.
사계절이 여름인 싱가포르에 왔다.
그저 잠시 떠나 온 여행이 아니라 남편의 직장을 따라 이곳에 살게되었다.
한국에서 318개의 박스를 배 컨테이너에 실어 보내고, 한 달간 살 짐을 7개의 여행가방에 담아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도착했다.
이상하리 만치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기대도 두려움도 없었다. 기대를 품었다가 앞으로 벌어질 어떤 일이 나를 실망하게 할까 봐. 두려워했다가 될 일도 안되게 만들까 봐. 마음에 반쯤 방패막을 세웠다. 적당한 거리에서 그냥 두고 보는 것. 이것이 새로운 곳에서 나를 방어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싱가포르로 떠난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지인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깨끗하다고, 영어가 통해서 편하다고, 쇼핑하기 좋다고, 볼 게 많다고 했다.
우려하는 말이 많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남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그대로 내가 좋아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기에 그저 좋아할 수는 없었다. 깨끗하기로는 내가 생활했던 서울도 뒤떨어지지 않았고, 영어가 통하기는 하나 중국식과 인도식 발음이 섞여 알아듣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알아듣고 싶을 때 다 들리는 내 나라에서 왔으니 의사소통이 되어 편하다는 다른 외국인들이 말하는 잇점이 나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쇼핑이 주관심사가 아닌 지금, 쇼핑으로 유명한 오차드 로드 근처에 머물러도 쇼핑 천국이라는 사실 역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살 집을 우선 구해야 했다. 홍콩 사태 이후 홍콩의 금융권이 싱가포르로 옮겨오면서 싱가포르의 부동산 가격이 상승했다고 했다. 코로나19 기간에 빡빡한 정부의 정책을 피해 홍콩과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로 인해 렌트 시장에 나와있는 물건도 제한적이고 가격 또한 상당히 올랐다 했다. 마음에 드는 집을 찾으면 최대한 빨리 결정해야지 시간을 끌다가는 순식간에 다른 사람에게 물건이 넘어가는 슬픈 상황들을 접하게 될거라 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는 법.
싱가포르라는 세계에 조심스럽게 발을 담그려 한다.
선입견을 갖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접해보고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하루에 하나씩 좋은 점을 찾기로 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정이 들고, 좋은 점이 더 많이 보일 테니까.
그것이 내가 독일에서든,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어디서든 살아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에서 나오는 것처럼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울 것이다. 싱가포르도 그럴 것이다.
오늘 아침에 배를 먹었다. 못생긴 모양에 기대를 하지 않고 먹었는데 아주 달았다. 사계절이 없는 나라는 지루할 것 같았는데, 맛있는 과일을 제철에만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년 내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배는 못생기지도 않았다. 그저 배처럼 생겼을 뿐.
풀꽃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