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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Kim Aug 23. 2022

박력 있는 싱글리시의 재미를 알아?

대단한 고급 영어를 구사하지는 못해도 해외에서 불편 없이 생활했다. 남편과 독일어로 의사 소통을 하기 전까지 7년 넘게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고, 독일에서 2년간 회사를 다니며 유럽 고객들과 영어로 업무를 했다. 그 이후 3년 반 동안 캘리포니아에서 살기도 했기에 싱가포르로 이사하면서 영어가 문제가 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회사를 다니며 대단한 미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주부로서 마트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혹은 관광을 하면서 쓰는 영어가 이렇게 힘들 거란 생각은 정말 해 보지 않았다.


내가 싱가포르에 와서 첫 한달 간 제일 많이 했던 말은 "Excuse me?", "Sorry?", "Can you please say that again?"이다.


At the Shopping Mall


싱가포르 사람들도 멤버십이나 포인트 혜택을 좋아하는지 결재를 할 때면 언제나 점원들이 나에게 멤버십 카드가 있는지 물어보곤 했다. 할인 혜택을 좋아하는 나는 고객 센터에 가서 멤버십 카드에 대해 알아봤다. 창구 안에 앉아 있는 점원이 설명을 하는데 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을 잘 이해하기 위해 구부정하게 몸을 구부리고, 코로나 이후 설치해 놓은 것 같은 두꺼운 비닐 장막을 슬쩍 걷으며 귀를 최대한 가까이 갖다 대고 물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꽤나 우스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Excuse me?"

다시 물어봤을 때 두 번째에 알아들을 수 있다면 고마운 일이다. 여기에서 비극은 처음에 못 알아들은 영어는 대부분 두 번째에도 못 알아듣는다는데 있다.

잘 안 들리는 이유가 점원이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라고, 비닐 장막이 두꺼워서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를 해 보지만 위로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대충 50%만 알아듣고 축 처진 어깨로 고객센터를 나섰다.


At the MRT Station


아이들과 싱가포르 보태닉 가든(Singapore Botanic Gardens)에서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지하철(MRT)을 타 보기로 했다. 매표소 직원이 표를 현금으로 살 수 없고, ezlink라는 교통카드를 충전해서 이용해야 한다고 알려줬다. 학생용 카드 두 개와 어른 카드 한 개를 사고 싶다고 얘기하며 30달러를 냈는데, 나이 드신 매표소 직원이 학생 카드와 어른 카드에 대해 뭐라고 설명했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알아들은 정보는 교통카드 당 5달러는 보증금이고 나머지 5달러만 일단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나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아이들에게도 같이 들어보라고 하고 다시 한번 물어봤는데, 셋이 힘을 합쳐도 결국 모든 정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일단 구입한 카드로 지하철을 탔는데, 지하철 개찰구에서 나오면서 찍힌 금액을 보니 아이들 비용과 내 비용이 똑같이 차감되어 있었다. 분명히 아이들이 학생이라고 설명을 했는데 제대로 적용이 안 된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학생 카드는 학생증을 제시해야 발급해 준다고 했다. 게다가 로컬 학교에 다니는 싱가포르 학생들만 해당이 되고 국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할인 혜택이 없다고 한다.


In the Taxi


택시 기사님들의 발음도 알아듣기 어려웠다. 마리나 베이 샌즈(Marina Bay Sands)에서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택시 기사분은 대화를 즐기는 분이었다. 약 15분 동안 쉬지 않고 많은 이야기를 하셨는데,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하지 않고 혼자 말씀을 하셔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요지는 싱가포르의 물가가 비싸서 살기 힘들다는 얘기였다. 눈치껏 말씀이 끊어질 때 "네." "그렇군요." 정도의 추임새를 넣으며 대화에 집중했다. 한국에서도 대화를 즐기는 기사분들의 택시를 탈 때가 있는데, 편안하게 앉아 그분들의 세상 사는 이야기를 듣던 때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90도 정자세로 앉아 초집중을 하고 들었더니 머리가 아파왔다. 그야말로 'Listen carefully'였는데, 'Listen carefully and repeat'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At the Night Safari


주말에 야간 동물원인 나이트 사파리(Night Safari)에 다녀왔다. 신기한 동물들을 보면서 즐긴 동물원 밤 산책은 아주 평화로웠다. 동물들이 갇혀 있다는 느낌보다 정글에 살고 있는 느낌이라 참 다행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어디에서 택시를 타는지 몰라 동물원 안내원에게 물었다.

난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질문을 하는 편이다. 혼자 알아내려고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그냥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본다. 이 날도 가족들이 두리번거리는 동안 난 당당하게 직원에게 질문을 했다.

질문은 언제나 잘한다. 문제는 답변을 완벽하게 알아듣지 못하는 반쪽짜리 대화라는 데 있다.


"Where is a taxi stand?" (택시 승차장이 어디 있나요?)

"멀띠 스또리 까빡."

"Excuse me?"

"멀띠 스또리 까빡"


질문 딱 두 번의 법칙! 두 번이나 물어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다 알아들은 양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와 가족들에게 퀴즈를 냈다.

"택시 승차장이 '멀띠 스또리 까빡'에 있다는데, 그게 뭘까?" 안내원과 똑같은 발음과 역양으로 물어봤다.


멀띠 스또리 까빡... 멀띠 스또리 까빡...

"Ah.. multi storey car park!"

그거였다. 여러층으로 되어있는 주차장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At the Supermarket


싱가포르에서는 마트의 비닐봉지 사용량이 어마어마하다. 비닐봉지의 품질도 안 좋은 지 무거운 것을 담을 때는 심지어 봉투 두 개로 겹으로 싸준다.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는 장바구니를 꼭 들고 다니는데, 이 날도 계산을 하면서 가져간 장바구니를 점원에게 건넸다.

점원이 대뜸 말한다.

"No need!"

장바구니가 필요 없다는 말을 아주 짧게 얘기하는데 난 그녀가 화가 난 줄 알았다.

"Can I use my bag, please?" 그래도 내 장바구니를 사용하고 싶어서 이렇게 말하니,

"OK!" 바로 또 알겠다고 한다. 불친절하다기보다는 언어의 간결성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아리송한 대화


난 깔끔한 대화가 좋다. 무엇을 원하는지, 요점이 무엇인지가 명확한 대화를 좋아한다.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하는 이곳에선 매일 퀴즈를 푸는 느낌이었다. 갸우뚱한 머리를 끌고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일이 허다했다.

가만히 보니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의 발음이 더 어려웠다. 인도계 싱가포르인들의 발음은 그나마 추측하기 수월했다. 하필이면 싱가포르에는 중국계가 74% 정도로 주류를 차지한다고 하니 그냥 버틴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뜻밖의 복병을 만난 듯 매일매일이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였다.


At the Restaurant



친구와 함께 Holland Village에 있는 꽤 유명하다는 타이 레스토랑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카리스마 있는 아저씨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이곳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Pandan Leaves Chicken'을 주문하면서 이 메뉴가 메뉴판 어디에 있냐고 물으니, "Never mind."라고 한다. 바쁜데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말고 계속 주문이나 하라는 의미였다.

아저씨의 위세에 눌려 기분이 나쁜지 어떤지 인식할 여유도 없이 두 번째 메뉴인 '모닝글로리'를 주문했다. 이 메뉴는 두 가지 조리법이 있다고 설명하며 어떻게 먹겠느냐고 물었다. 25년 전 영어캠프에서 만난 친구와 나는 영어 캠프의 효력은 역사로 사라진 지 오래인 듯, 길게 설명한 조리법을 둘 다 못 알아듣고 다시 물었다. 두 번째 설명마저 못 알아듣고 둘이 서로의 눈만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으니 카리스마 있는 아저씨가 결론을 내렸다.

"I order, you eat!"


이곳이 레스토랑인가 싱가포르 군대인가 어리둥절함과 동시에, 신기하게도 박력 있는 명령법은 나의 영어 스트레스를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간결한 명령식 화법은 듣기에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재미있었다. 싱가포르에서 영어가 잘 안 들린 이유는 다양한 민족들의 다양한 발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싱가포르가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라는 인식으로 높은 영어 수준을 기대하고 듣는 나의 태도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았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이들은 모두 고급 영어라기보다는 프리 스타일의 비문법적 Broken English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도 당당하게.  이 날의 대화는 영어에 대한 나의 태도에 전환점이 되었다.



완벽한 영어로부터의 자유


한 달 동안 생활하면서 발견한 이곳 사람들의 영어 특징은 자음을 발음할 때 ㄲ·ㄸ·ㅃ·ㅆ·ㅉ와 같이 된소리 발음하기를 좋아했다. 게다가 영국 식민지였던 영향인지 미국식 영어 발음의 특징인 R 발음은 거의 생략되었다. 버터 발음의 기름기를 쏙 뺀 것이다. 또 문장을 아주 간단히 말했다. 불필요하다고 생략되는 단어는 주어든, 관사든 과감히 빼 버린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단어는 또 반복을 한다. 가령 할 수 있다고 대답할 때 "Can!"이라고 하거나, 강조를 위해 "Can, Can."이라고 대답하고, 할 수 없으면  "No Can!" 이라고 대답한다.  

영어 문장 끝에 뜬금없이 'Lah', 'Leh' 등도 붙인다.

“Ok Lah!"

갑자기  끝에 '' 붙이던 왕서방이 생각난다.

 짜장면이 좋다 !"


영어의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재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간결한 영어는 강한 중독성이 있었다.

콩글리시에 능숙한 사람이 싱글리시를 만났으니 시간이 지나면 왠지 쉽게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깔끔하고 명확한 대화를 좋아하는 나.

이날부터 난 가족들에게 먹고 싶은 메뉴를 물어보는 민주적이고 우아한 화법 대신 싱가포르식 화법으로 말하기로 했다.

"I cook, you eat!"

입 안에 박하 사탕을 물은 듯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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