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술을 마시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심장 박동이 머리까지 전해져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다. 머리가 아프고 졸리기까지 해서 기분이 좋기는커녕 즐겁게 놀 수가 없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게 유전이 되었는지 나는 술에 약하다. 술에 약한 정도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게임을 하다 벌칙으로 레몬소주 반 잔을 마신 적이 있는데, 얼굴이 순식간에 너무 빨개지는 바람에 얼굴을 식히려고 화장실에 갔었다. 나는 분명히 똑바로 서 있었는데 어느 순간 화장실 문이 바로 눈앞에 와 있는 경험을 했다. 내 몸이 휘청거린 모양이었다. 레몬소주 반 잔 때문에 내가 몸을 내 의지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놀라웠고 무섭기까지 했다. 그 이후로 술을 마시는 게 조심스러웠다.
자꾸 마시다 보면 괜찮을 거라고, 자꾸 주량을 늘려야 한다고 먹이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별로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술이 맛이 없었고, 술을 마시면 나타나는 불편한 반응 때문에 굳이 왜 그렇게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공감이 되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면서 회식에서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셔야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한 모금만 마셔도 빨개지는 얼굴 때문에 모두들 내가 술을 많이 마신 줄 알고 많이 권하지도 않았고, 집요하게 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상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최대한 피해 다녔다. 나이가 들면서 나에게 부정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술은 더더욱 내가 탐구하는 영역에서 벗어났다. 세상에는 술 말고도 맛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고 게다가 잘 마시기까지 한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잘 취하지도 않는다. 식사를 하기 전에 식욕을 돋우기 위해 마시는 아페리티프부터 시작해서 생선에는 화이트 와인을, 육고기에는 레드 와인을 곁들여 마시고, 식사를 다 마치고 소화를 도와야 한다며 독일 슈납스(Schnapps)를 마시기도 한다. 여름날 맥주는 여느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물처럼 마시는데 우리는 현재 사계절이 여름인 싱가포르에 살고 있으니 우리 집 맥주 소비량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 초기에는 맛있는 술을 부부가 함께 즐기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하더니 언제인가부터는 모임 후에 운전할 사람이 상시 대기하고 있어 오히려 반기는 눈치다. 다른 커플들이 모임에서 집에 돌아갈 때 누가 운전할 것인지 실랑이를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자기는 공짜 대리 운전자가 항상 준비되어 있다며 의기양양해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아 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술을 사는 것은 대부분 남편 담당이다. 남편은 장 보는 것을 절대적으로 싫어하지만 와인이나 위스키는 기꺼이 사러 간다. 한남동에 살 당시 제주식당 바로 옆에 있던 '한남리커스토어'는 남편이 주류 쇼핑을 즐겨하던 곳이다. 맘 좋은 사장님은 단골고객인 우리에게 가격을 깎아 주시기도 했는데 그 친절에 보답하듯 남편은 더욱 열정적으로 주류를 사들였다. 아니나 다를까 싱가포르에서도 Wine Culture라는 와인샵에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포착했다. 내가 술을 사는 경우는 요리용으로 술을 살 때가 유일하다. 티라미수를 만들기 위해 아마레또를 사거나 파스타용 소스를 만들기 위해 보드카를 사는 정도이다.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은 언제나 집에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사러 나갈 필요도 없다.
얼마 전 나는 Penne alla Vodka라는 파스타를 만들기 위해 보드카 한 병을 샀다. 슈퍼마켓에는 다양한 보드카가 있었는데 많이 본 보드카 중에 할인 행사를 하고 있던 Absolut Vodka를 샀다. 4인 기준으로 토마토소스를 만들 때 보드카 50ml가 필요했다. 700ml짜리 보드카를 샀으니 요리를 하고도 분명 많은 양이 남아있었는데 오늘 우연히 보드카 병을 보니 반이나 비어 있었다. 유력한 용의자는 딱 하나, 남편이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기 때문에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하여 보드카를 산 당일에 남편에게 분명히 말해 두었었다.
"이 보드카는 요리용이니까 절대 탐내지 마."
남편은 냉장고에서 뭘 찾아오라고 하면 눈앞에 있는 것도 못 찾는 사람인데, 요리도 하지 않기 때문에 부엌에는 자기가 먹을 시원한 음료를 꺼내기 위해서만 들어가는 사람인데, 소금, 후추와 어지럽게 섞여 있던 보드카는 어떻게 잘 찾아냈을까? 그에게는 금속 탐지기 같은 알코올 탐지기가 있는 것일까? 한 번이라도 더 Penne alla Vodka를 만들고 싶다면 보드카 병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곳으로 숨겨놔야겠다. 치사하고 싶지 않지만 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내 식재료는 내가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