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진실의 역사: 1부, 대약진 운동

1부, 4500만명은 왜 굶어 죽어야 했나

by 고기청정기

.시진핑의 4연임이 거의 확실시되는 분위기다. 중국 공산당 제20대 회의록에 "당 중앙에서 시진핑 동지의 핵심지위를 확립한다"는 내용이 공식 문서에 적혀 있다. 기존부터 시진핑의 4연임, 아니 그를 넘어선 종신 집권이 거의 확실시되는 분위기였기에 놀랄 일은 아니다만 문제는 시진핑이 Tiktok, Hwawei 같은 회사를 들이밀어 개인정보를 침탈하고, 중화사상을 세계에 외치기 시작한 첫 지도자라는 점에 있다. 금지된 진실의 역사는 인류 역사에서 중국 공산당이 얼마나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 보여주고 이를 참고삼아 다시는 이런 집단에게 힘을 몰아주지 말자는 다짐에서 나온 시리즈이다. 서론이 길었다. 바로 시작한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설립되었다고 발표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다"라고 말하며, 이어 "새 중국의 미래는 바로 인민들의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늘엔 붉은 깃발이 물결쳤고, 수많은 중국 인민들이 그를 보러 나왔다. 마오가 이 말을 외쳤을 때, 수 억의 중국인은 제국, 반식민, 내전을 거쳐 드디어 “자기 나라”가 생겼다고 믿었다. 마오는 중국 인민들의 유례없는 지지 속에 국정을 시작한다. 강렬한 구원 서사 덕택에 마오쩌둥은 혁명가에서 곧 신적인 존재로 격상되었고, 그의 말은 과학과 논리를 초월한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을 발표하고 있다.

마오쩌둥, 그는 혁명가였지 행정가가 아니었다. 혁명에서의 승리는 달콤했지만 그 승리 끝에서는 전혀 다른 역량이 요구됐고 마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마오는 전문가와 반대파의 의견은 들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고 민주공화국보다는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이상을, 좋은 지도자가 되기보다는 철권 지도자가 되기를 꿈꾸었기에 반대파를 전부 숙청하는 결정을 내린다. 숙청은 공산당을 비판하라는 미끼를 던지고는 걸려든 이들을 처형하는 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처형은 종종 인민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진행되었다. 이렇게 1950년대 초, 토지개혁이라는 명분으로 단 2년 만에 260만 명에 달하는 국민당 지지자와 자유주의 지식인, 지주들이 처형됐다. 국민당 지지자가 사라지자 정치적 다양성이 사라졌고, 자유주의 지식인이 사라지자 마오에게 반대하는 목소리가 사라다. 후 삼반오반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해, 단 2년간 400만 여명에 달하는 사람을 처형했다.

토지개혁 시기 마오쩌둥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인구의 몇%는 '반드시' 죽이라 말했고 최종적으로 인구의 0.1%는 없애라고 훈시하는 행동을 보였다. 실제로는 당시 인구의 0.4%가 넘는 수치가 사망했다.

지주들이 사라지자 중국인들은 환호했다. 중국의 인민들은 지난 수 천년 간 농사를 지어왔음에도 찢어지도록 가난했다. 지주들이 농민들의 몫 중 상당수를 수탈하기 때문이었다. 지주들은 인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중국의 농민들에게 있어 지주의 공개처형을 보는 것은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불러왔다. 농민들은 지주들이 몰락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마오 주석을 열광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의 정치적 롤모델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지식인, 지주, 자유주의자 숙청을 비롯해 공포통치로 자신의 절대권을 구축한 것이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이후 중국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 '제1차 5개년 계획(1953~1957)을 시행했다. 농민들의 힘으로 자연도 정복할 수 있다고 믿은 마오는 도시 노동자 중심 공업화를 이룩한 소련식 모델이 '혁명성'이 부족하다고 봤다. 그는 사회주의는 인민의 의지와 정신력으로 완성된다는 신념을 내세웠다.


이 철저히 주관적이고 비과학적인 신념이, 훗날 수 천만명을 굶겨 죽이는 정책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그를 이어 소련의 최고지도자가 되는 흐루쇼프는 "탈스탈린화"를 추구한다.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 운동을 시작하는 한편 서방권과의 화해를 도모한 인물이었다. 순수한 사회주의 이념을 통한 혁명만이 진짜 이념이라고 믿은 마오에게 있어 흐루쇼프는 혁명을 더럽히는 타락한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흐루쇼프를 두고서 마오는 수정주의자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소련이 서방권과 우호 관계를 형성하는 모습을 본 마오는 이때부터 스스로 제2의 스탈린이 되어 버린다.


“소련은 수정주의로 타락했다. 우리는 순수한 사회주의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이 신념은 중국판 ‘혁명적 순수주의’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1959년 워싱턴에서 대화를 나누는 흐루쇼프(좌)와 아이젠하워(우). 소련 지도자의 역사상 첫 방미로서, 명목 상 국빈방문이나 실질적으로 정상회담으로 여겨진다.

거기에 더해 흐루쇼프는 공식석상에서 향후 15년 이내에 미국을 따라잡고 세계 1위의 공업대국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공업대국의 근거는 철강 생산량. 이 한 마디가 마오쩌둥의 열등감을 폭발시켰고 마오는 황급히 발표한다.

"우리는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을 것이다. 지금은 520만 톤의 철강을 생산하지만, 15년 뒤에는 4000만 톤이 넘는 철강을 생산할 것이다."
영국을 지목한 것은 당시 서방권 1위의 공업국가가 미국, 서방권 2위의 공업국가가 영국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은 소련식 모델에서 영감을 받은 1차 경제성장 5개년 계획(1953~1957)이 안정적으로 마무리되는 시기였다. 2차 경제성장 5개년 계획도 1차와 같이 안정적으로 진행될 참이었다. 하지만 다급해진 마오는 당초 준비되어 있던 2차 경제성장 계획을 전면 수정하여 철강을 대량 생산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선회할 것을 훈시했다. 지식인이 싹 쓸려나간 판국에 마오의 말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공산당 간부들은 "우리 현이 철강을 많이 생산하겠습니다"라며 앞다투어 충성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이게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시행된 그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이다. 그 이름의 약진(躍進)은 문자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도약의 끝은 낭떠러지였으며 그 낭떠러지에는 굶주림으로 뒤틀린 시체들이 널브러진 폐허가 인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958년 마오쩌둥의 지시로 인민공사(人民公社)가 설립된다. 공사는 농촌의 집단 단위로, 농업, 공업, 교육, 군사까지 담당하는 기구였다. 5천 가구에서 1만 가구, 인원수로는 일반적으로 2~3만 명에 달하는 인민들은 각각의 공사 소속이 되었다. 이 시기 농민 소유의 밭, 소, 농기구, 심지어 솥과 식기들이 모두 공유재산으로 몰수되었고 공동식당이라는게 등장했다. 모든 생산은 각각의 공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가족이라는 개념보다 공사라는 공동체 개념이 강조되었고 공동식당이라는 게 등장했다. 실제로는 가족 결속력이 약화되었고 개인의 사생활, 삶의 질이 하락했으며 결과적으로 농업 생산량까지도 악화되었다.

마오쩌둥이 인민공사를 설립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산주의 이념의 현실화. 공산주의 이념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야 했으나, 농민들이 밭을 경작하면 작물을 보관하고, 그것이 또 다른 계급사회를 탄생시킬까 우려했다.

둘째, 농민 중심의 공업화. 당시 중국은 이미 6억 인구를 보유한 인구 대국이었다. 마오는 노동자가 아닌 농사를 짓는 농민 중심으로 공업화를 달성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고 인민공사를 통해 인민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거라고 봤다.

셋째, 마오쩌둥 개인의 정치적 선택. 상술했듯 마오는 행정가가 아닌 혁명가였다. 마오는 토지개혁과 삼반오반운동으로 수 백만명을 숙청하고도 항상 유능한 간부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것을 염려했다. 이 아이디어는 철저한 마오의 독단이었고 만일 이것이 성공한다면 마오는 행정가로서도 성공하는 개인적 서사를 완성하게 된다.

스탈린식 모델은 도시 노동자 중심의 공업화였지만 마오식 모델은 농민 중심의 공업화였다. 그 결과 농민들은 낮에는 농업, 밤에는 공업에 투입되어야 했다.

15년 안에 자유진영 2위인 영국의 철강 생산량을 뛰어넘고 공업선진국으로 탈바꿈하겠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문제는 당시의 중국에는 철강을 생산할만한 시설이 부족했다. 아편전쟁부터 시작해 국공내전, 총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외세의 침탈을 겪은 중국은 이제 막 그 트라우마를 씻어내는 단계에 있었다. 제철소를 지을 기술력도 돈도 없었다. 그 끝에 마오는 인해전술로 철강 생산량을 늘리겠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나온 게 전통 용광로인 토법고로(土法高爐). 진흙으로 만들어진 용광로였다. 마오의 훈시에 인민공사마다 수 십 개, 때로는 수 백개에 달하는 토법고로가 세워졌다. 마오는 대약진운동 첫 해인 1958년, 전년 대비 두 배의 철강 생산량을 목표로 내세웠다. 중앙은 인민공사를 관리하는 간부들에게 모든 공사마다 철 생산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반드시 달성하라는 훈시를 내렸다. 그리고 간부들은 충성 경쟁을 위해 철 생산 목표를 경쟁적으로 높게 설정하였고 인민들에게 그 목표를 달성할 것을 지시하였다.


여기서 고로(高爐)는 현대의 제철소에서도 쓰이는 쇳물을 녹이는 시설을 의미하며, 토법(土法)은 중국어로 전통 기술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그 토법고로이다. 중국 전역에 300만 개 가량이 있었다.

이리하여 전국에 용광로가 설치된다. 매 달마다 철 생산 목표치가 주어졌지 정작 중앙은 철을 생산하기 위한 철광석조차 공급하지 않았다. 처음에 철을 생산하기 위해 인민들은 굴러다니는 필요 없는 철을 녹이기 시작했다. 그 철이 모두 녹아 없어지자 인민들은 전국을 들쑤시며 금속이란 금속은 모두 긁어모았으며 밭을 일궈야 할 농기구와 집 문, 자전거도 녹여버렸다. 역시 할당량은 늘어만 갔고 인민공사에 무상으로 보급된 트럭, 굴삭기, 트랙터, 탈곡기와 같은 고급 농기계까지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녹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땅을 파서 나온 중국 고대 문명의 청동기 역시 재료로 사용됐다. 최후에는 철이 아니라 할지라도 눈에 보이는 것들은 죄다 토법고로에 넣고 녹이게 된다.

당연히 이렇게 온갖 재료들을 녹여서 나온 결과물은 강철이 아닌 Pig Iron 수준도 되지 못하는 시꺼먼 덩어리였다. 고품질의 철을 녹인 것도 아닌 상대적으로 저품질의 철인 대문짝은 물론이요 눈에 보이는 것들은 죄다 집어넣은 탓에 토법고로에서 나온 철이란 불순물이 과하게 포함된 철이었고 그 퀄리티가 실로 조악하였다. 그걸로 만든 식기는 손으로 쥐자마자 똑 끊어지고, 어떤 건 모래처럼 바스라졌다. 농기구는 땅을 파다가 자루째 부러지기 일쑤였으며, 밥솥은 밥을 짓다가, 주전자는 물을 끓이다가 터졌다.


그렇다, 대약진 운동 시기의 중국은 멀쩡한 고품질의 완제품을 녹여 저질 똥철로 역행시켜버리는 짓을 했다. 이미 존재하는 농기계를 녹여 다시 만드는 것도 비효율적이지만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건 아무거나 넣고 용광로를 돌려댔고 야금술에 대한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투입된 탓에 인민들은 그저 쇠를 넣고 녹여 굳히면 강철이 되는 줄 알았다. 인민들의 땀이 녹아있는 이 철은 실제로 산업 분야에는 더더욱 쓸모가 없는 철이어서 실제로 산업 분야에서는 품질 검증 단계에서부터 탈락하였고 수많은 철이 창고로 들어가 훗날 재처리조차 되지 못하고 사라졌을 뿐이다.

1958년 그 해의 통계는 미친 수준이었다. 1,135톤이 생산되며 전년의 535톤 대비 2배가 폭증했. 마오의 책상 위에선 중국의 모든 지역이 철강 생산량 폭증을 이룩했고 중국의 언론사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토법고로의 위대함을 홍보했다. 그러나 그 철들이 수많은 불량품을 양산해 중국의 공업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철강 생산량이 늘었다는 보고를 들은 마오는 뒤뜰 용광로로도 철강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며, 제철소를 지은 국가를 비웃기까지 했다.

철강 생산량 폭증에 마오는 순수한 사회주의 이념으로 중국이 곧 미국보다도 많은 철강을 생산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 시점은 토법고로가 사라지고 개혁개방이 이루어진 1996년.

철강 생산량이 폭증했다는 소식에 만족한 마오는 전년보다 더 높은 철강 생산량을 각 인민공사에 주문했다. 그 결과 용광로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기 위해서 농민들은 물론이요 아이들까지 밤낮으로 용광로를 지켜야 했다. 대약진 운동이 노동자 중심이 아닌 농민 중심의 공업화라고 했지. 그 탓에 농민들은 농사 일을 할 시간도 없어 추수 기간이 다가왔음에도 토법고로에 신경쓰느라 추수에는 손을 대지도 못했던 탓에 농작물은 썩어가기 일쑤였다. 게다가 철강 생산량을 맞추지 못한 인민공사에게는 식량 배급을 감축했기에 중국의 농민들은 농사를 신경쓸 겨를도 없이 토법고로에 매달렸고 이것이 중국의 농업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당시의 농민들은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용광로를 지켰다.

철이라는 건 엄청나게 예민한 물질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미세한 불순물이 철의 품질을 정한다. 또한 단순히 철광석을 녹이면 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철을 녹이고 나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공정을 거치고, 이 공정 안에서도 수많은 특수 공법이 사용된다. 그리하여 나오는 것이 산업의 다양한 분야에 쓰이는 강철이다. 그러나 토법고로에 투입된 인민들은 철 주조에 대한 최소한의 교육도 받지 못한 채로 투입된 탓에 금속을 녹이고 식히면 그것이 강철이 된다고 생각했다. 금술 교육도 받지 못한 데다가 저품질 철을 넣고 녹여댔으니 좋은 철이 나올 리는 없었다.

대약진 운동으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은 1973년 완공된 한국의 포항제철소로 단순히 철광석을 녹이고 굳히기는 단순 작업만을 하는 시설이 절대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중국은 석탄,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가 부족했던 탓에 토법고로의 연료로 쓰인 것이 바로 나무였다. 24시간동안 토법고로를 돌리기 위해 수많은 나무가 베어졌다. 후난성이라는 지역의 어느 한 산에서는 전체 나무의 2/3이 베어졌다. 이렇게 1958년 한 해에만 중국 전역에서 8억 그루의 나무가 베어졌다. 목재로 쓸 산의 나무가 사라지자 과수원의 나무까지 몽땅 베어내었다. 산의 나무가 모두 사라지자, 비가 올 때마다 산사태가 터져 그들의 농작물을 덮쳤다. 1959년 나무심기 운동을 전개하지만 그렇게 자란 나무는 또다시 토법고로의 연료로 돌아갈 뿐이었다.

인민공사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중국 공산당은 대대적인 숙청을 한 직후인 1952년 농민들에게 이른바 "혁명의 보상"으로서 해체된 지주들의 토지를 무상으로 배급했지만 불과 이듬해인 1953년 중국은 "제1차 경제성장 5개년 계획"에서 소련식 모델을 참고하며 산업화를 추진했다.

산업화를 이룰 기술적 토대도, 외화도 없었던 중국은 농산물을 수출해 외화를 벌겠다고 농민들에게 농산물을 말도 안 되는 값에 수매하였고 세금을 올려 농민들의 목을 조여왔다. 그 결과 농민들은 부업을 발전시켰는데 이게 제법 농민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고 농촌의 경제에도 도움이 됐다. 농민들은 가내 수공업으로 옷, 신발, 간단한 농기계를 만들어 팔았으며 닭, 오리, 돼지 따위의 가축을 길러 알, 육류로 판매하기도 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56년 문서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구성원은 적당한 범위 내에서 가정 부업을 유지할 수 있다.

돼지 사육, 가금류, 소규모 가공은 계획경제를 해치지 않는다.


이 때까지만 해도 중앙은 부업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즉, 국가가 완전히 농민의 경제를 틀어쥔 상태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중국은 넓은 나라라, 어떤 지역에선 가내 수공업으로 종이를 만들어서 팔았고, 어떤 지역에선 세금을 매기지 않는 토지에 작물을 심어서 팔았고, 어떤 지역에선 가축을 기르기에 용이했다. 부업의 규모도 상당했던지라 농가에 있어 부업은 전체 농가의 소득의 20%에서 많게는 40%까지 책임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오는 이것을 자본주의의 잔재라고 규정하였다.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모든 생산은 집단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 근거였다. 1958년 이후 인민공사 체제는 가축, 도구, 심지어 부엌까지 집체로 통합시켰다. 농민의 개인 부업은 ‘집단의 반역’으로 취급되어 가내수공업을 위한 도구와 재료가 문자 그대로 다 빼앗겼다. 그러자 농민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단순한 ‘인민공사 구성원’으로 전락하게 된다. 가내 수공업을 위한 재료, 도구와 가축마저 모두 국가의 소유물로서 몰수되었다. 그 결과 얼마 안 있어 현금 흐름이 완전히 마비되었고 이는 훗날 닥쳐올 대기근에 최소한의 대비조차 하지 못한 원인이 된다.

음식에도 손을 댔다. 농민은 농업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논리 하에 공동급식소가 인민의 끼니를 책임졌다. 기존의 식당과 식당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폐쇄되고 그 자리에 공동급식소가 들어섰다. 거기에 더해 음식을 모아 두면 그것이 새로운 형태의 계급을 유발한다며 개인적인 식사, 이른바 사식을 막기 위해 공산당원들을 가정집마다 밀어넣어 소금, 식초, 조미료, 그릇, 식기까지 모두 수거해 갔다. 매 끼니를 공용급식소에서만 해결하도록 했고 집에 음식을 조금이라도 쟁여두면 강하게 처벌했다. 몰래 음식을 하는 일을 막는답시고 집의 굴뚝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이 사식 금지는 수 천만명이 굶어죽고 난 뒤인 1961년에야 막을 내렸다.


1958년 인민공사와 공동급식소가 전국적으로 설립될 당시 공산당은 새 중국이 시작됐다며 선심쓰듯 곡식 창고를 활짝 열었다. 그 덕분에 초창기의 공동급식소의 식사는 제법 괜찮았다. 밥은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었고, 반찬도 호화스러웠다. 곡식과 반찬 재료가 동이 난 건 그로부터 불과 몇 주 뒤였지만.

그나마도 저기서 요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떠한 대가도 없었기에 조리사들은 고생하며 맛있고 영양가 좋은 음식을 제공할 유인이 없어서 공용급식소의 식사란 시간이 갈수록 조악해져만 갔다. 현마다 달랐다고는 하지만, 불과 1년도 안되어 조용히 사라진 공용급식소도 넘쳤다. 공동급식소라는 이름 하에 개인적인 식사를 금지한 결과는 후술한다.

마오는 천재의 머리를 굴려 공업 분야에 손을 댄 것과 같이 농업에도 손을 대었으나 역시 정책 하나하나가 싸그리 안 하느니만 못한 짓들이었으니, 그 첫 번째 정책이 바로 땅 깊게 갈기, 심경(深耕)이었다.

작물을 깊게 심으면 뿌리가 단단해지고 작물도 더 잘 자란다.

어디서 저런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오의 훈시에 전국의 인민공사는 또 인민들에게 땅을 깊게 갈라고 주문한다. 기본 50cm는 땅을 파내어야 했으며 깊게는 3m가 넘는 깊이로 땅을 파야만 했다. 땅을 깊게 파지 않으면 공산당 간부가 와서 땅을 깊게 파내라고 닦달했다.

그 결과, 작물이 자라는 데 도움을 주는 비옥한 흙인 표층 토양이 완전히 사라졌고 깊고 척박한 땅에 작물이 심어졌다. 작물은 산소가 부족해 죽었고, 영양이 부족해 죽었고, 뿌리를 내리던 도중 기반암을 만나 뿌리를 내리지 못해 죽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나 현대적 방식으로나 쌀 농사는 15~20cm만 땅을 파낸다. 땅을 판다고 하는게 아닌 밭을 간다고 하는 것이 이런 맥락이다.

게다가 이 시기는 토법고로가 본격적으로 설치되어 각종 철들이 죄다 용광로에 들어간 시기였었지. 멀쩡한 농기구를 저질 똥철로 윤회시키고 만든 새 농기구로 이 짓을 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언제 부러지거나 깨질지 모르는 똥철로 만든 농기구로 그렇게나 땅을 깊게 파내어야 했으며, 그마저도 없으면 맨손으로 땅을 파내어야 했다. 기본 50cm에서 심하면 3m도 넘게 땅을 파버리는 작업은 너무나도 고됐다. 일부 지역에서는 밤에도 횃불을 켜놓고는 밤새도록 땅을 파고, 파고, 또 파내었다. 땅을 깊게 파지 않으면 공산당 간부가 와서 닦달했다.

1958년 중국의 농민들이 땅을 파내고 있다. 어찌나 깊게 팠던지 일부 지역에서는 기반암까지 보였다는 증언이 존재한다.

땅을 깊게 갈아 농사 짓기에 좋은 땅을 만들다고 본 마오의 다음 차례는 바로 비료였다. 비료를 듬뿍 뿌리면 생산량이 올라간다고 한다. 토법고로의 강철 생산 때와 마찬가지로 인민공사를 관할하는 공산당 간부들에게 비료 생산량 할당량을 설정하고 무조건 맞추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그 훈시는 인민들에게도 전달된다. 뭐, 이건 상식적으로 이해 가는 이야기만 문제는 그 비료를 생산하기 위해 투입된 재료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었다는 데에 있었다.

비료를 구하는 1958년의 중국 농민들

비료를 생산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자 아이부터 어른 할 거 없이 전 인민들이 비료로 쓸만한 것들은 싸그리 긁어모아 밭에 들이부었다. 분뇨를 운반하는 일은 당시의 중국에서도 천시되는 일이었다만 그 비료 할당량 때문에 동물의 분뇨를 지고 나르는 행렬이 밤낮으로 오갔다. 비료로 쓰겠다고 낙엽, 풀은 기본이었고 쓰레기장까지 뒤졌으며 바닷가에서는 비료로 쓴다며 해초를 땄다. 손톱, 심지어는 머리카락까지 싸그리 뽑아서는 논밭에 들이부었다. 그렇게 해도 비료가 부족하자

집을 통째로 때려부숴 비료로 활용하자는 결론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당시 중국 농촌의 가정집은 진흙과 볏짚으로 만들어졌다. 볏짚은 오늘날에도 퇴비의 재료로 쓰이는 물건으로 당시의 중국에서도 이미 그 효과가 검증되었다. 처음에는 폐가와 낡고 안쓰는 작은 건물부터 때려 부쉈지만, 이내 비료 쟁탈전이 전국적인 유행으로 번지자 비료를 구하기 위해 멀쩡히 사람이 사는 집까지 때려 부쉈다. 문자 그대로 마을이 통째로 해체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사람 사는 집을 때려 부순 결과는 여러 정황과 공산당 간부로서 마오쩌둥과 함께한 류사오치의 보고로 드러난다.

후난성 모든 주택의 40퍼센트가 파괴되었다. 이미 수 백만 명이 사망해 저택에는 공간이 더 여유로워야 할 것이나, 오히려 방당 사람의 수는 두 배로 늘어났다.

후베이성 남단에 위치한 마청은 1958년 1월에만 천 채에 가까운 수의 집이 파괴되더니 그 해 말 5만 채가 넘는 집이 때려부숴졌다. 쓰촨성과 후난성에서는 전체의 50%가 넘는 집이 파괴되었고, 이 중 쓰촨성의 일부 현에서는 전체의 70%에 달하는 가옥이 철거되었다.


전국 단위로는 '보수적으로' 잡아도 3천만 채 이상의 집이 파괴되었고 일부는 4500만 채 이상으로 집계한다. 2025년 기준 대한민국의 가구수가 2200만 가구 량으로, 이 수치는 지금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집을 다 부수고 그걸 한번 더 해야지 겨우 나올 수치인 것이다. 집을 잃은 인구는 1억 2천만명에서 2억명에 달한다.


수치로 보면 전국적으로 3~40%에 달하는 집이 단 몇 년 만에 철거되었다. 이는 2차 세계대전(WW2, 1939-1945)의 가구 파괴율(20~25%)을 아득히 뛰어넘는 치로, 전쟁 중인 국가에서조차 이렇게 단적으로 집을 파괴지 않는다.


집이 때려부숴지자 그 시기를 살았던 농민들은 한 가구에 여러 명이 함께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 시기를 살았던 농민 한 명은 집 한 채에 사람 20명이 살았다고 증언한다. 집을 잃고 합숙조차 하지 못한 이들은 엄동설한에 노숙을 하다가 얼어 죽었고, 빈대와 벼룩이 나오는 열악한 기숙사에서 살다가(특히 요양원은 행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국가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며 식량 배급조차 전무했다) 식량 배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집이야 어떻게 되든 마오의 뜻대로 전국의 땅이 깊게 갈아엎어지고, 그 땅에 비료를 쏟아부었으니 이제 거기에 곡식을 뿌릴 참이었다. 이 참에, 미국 유학파 출신이자 중국의 미사일 실험을 성공적으로 주도한 주도한 첸쉐썬 박사는 마오쩌둥에게 곡식을 빽빽하게 심으면 수확량이 증가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첸쉐썬(钱学森). 그는 공학자는 맞았지만 결코 농업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수학적 증명'을 들은 마오는 매료되어 "신묘한 계책"이라며 곧장 전국에 이를 시행하도록 훈시를 내린다. 이 때 그 유명한 말이 나온다.

작물은 다른 동무와 함께 잘 자라며, 함께 성장하며 더 편안할 것이다.

마오의 이 말 한마디에 중국 전역은 곡식을 밀집된 간격으로 심어버리는 농법을 경쟁하듯 시행했다. 그리고 밭을 깊게 간 것을 심경, 곡식을 빼곡히 심는 것을 밀식이라고 부르며 이를 심경밀식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벼를 하나 심을 만큼의 면적에 벼를 두 개 심는 수준이었으나, 곧 경쟁하듯 벼를 심기 시작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땅 한 평에 수 십 그루를 심었다. 처음에는 싹이 무성했지만 곧 바늘 하나 꽂을 틈도 없이 빽빽해졌다. 그러자 벼가 채 익기도 전에 습기가 차 곡식들은 곰팡이로 썩어갔다. 논밭에는 병충해가 창궐했고 햇빛이 들어올 공간이 없어 식물은 광합성을 하지 못했다. 농민들이 발을 디딜 수조차 없었고 잡초 제거와 같은 기본적인 농사일을 수행하기조차 불가능했다.


마오는 작물은 다른 동무들과 잘 자란다며 의기양양했지만 그에게는, 아니 농민들에게는 애석하게도 빽빽하게 심겨진 작물들은 서로의 뿌리를 침식했고 한정된 영양분을 두고 경쟁했다.

대약진운동 당시의 선전 사진으로, 사진 작가가 누구인지까지 알려진 매우 유명한 사진이다. 벼가 빽빽하게 자라 위에서 아이들이 뛰어놀아도 될 정도였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사진이다.

대약진운동 첫 해인 1958년, 전체 곡물 수확량은 전년 약 1억 8천만 톤에서 3억 7천톤이 넘는 수확을 거두며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인민들은 철강, 비료 생산 때와 마찬가지로 작물 수확 역시 실제 수확량보다도 훨씬 많은 양을 수확했다고 보고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인민들의 뻥튀기 보고에 더해져 인민공사를 총괄하던 간부들 역시도 중앙에 곡물 수확량을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 보고했다. 실제 수확량은 2억 톤에 달할 뿐이었다. 전년도와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토법고로가 돌아가고 밀식 재배를 시작했는데 어떻게 저 수치가 나왔는지 의아할 수 있으나 전년도 대비 1958년은 기후 상태가 매우 양호해서 가능한 수치였고 이후 1959년부터 곡물 수확량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실제 곡물 수확량을 늘리는 것보다는 곡물 수확량을 부풀려서 보고하는 행위가 더 열심히 진행되었다. 인민들은 수 십개의 밭에서 수확한 벼를 한 데 모아 사진을 찍고는 간부들에게 풍년이라고 보고했다. 그 사진은 대약진운동을 홍보하는 신문 기사와 마오의 보고서에 올라왔다. 인민공사를 관리하는 간부들은 농민들이 생산량을 부풀려 보고하면 간부들은 그보다 더 많은 생산량을 중앙에 보고하는 구조였다. 일례로, 후베이성의 마청이라는 곳은 1958년 1월 벼를 1ha당 6톤을 수확했다. 마오가 직접 방문해 이를 칭찬했고 "마청에서 배우자!"라는 인민일보발 뉴스가 전국에 휘날렸다. 그러자 그 해 8월의 마청의 벼 수확량이 1ha당 277톤을 수확하는 대기록을 세운다. 이 황당한 수치를 검증할 시스템은 없었다.

기계식 농업을 적극 활용해 농업 선진국 중 하나로 꼽히는 대한민국이 2024년 1ha당 약 5.29톤의 쌀을 생산했다.

보고된 수치에 비해 실제 생산량은 터무니없어서, 1959년 중국의 실제 곡물 수확량은 1958년 대비 3000만 톤이 감소한 1억 7천만 톤 가량으로 감소하였고, 1960년에는 1억 4천만 톤 가량으로 급감한다.


이렇게 농업 생산량이 급감한 데에는 자연 생태계를 구성하는 일환이 절멸한 것도 한몫 단단히 했는데, 역시 전 인민이 동원된 대형 캠페인이었다. 이름하여 제사해 운동(除四害運動). 직역하면 4가지의 해로운 것을 없앤다는 뜻이다.


마오쩌둥은 인간의 의지로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대약진운동 내내 인간의 의지로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말했고 이건 곧 저 대약진운동 내내 외치는 중국 사회의 구호가 되었다.


그의 눈에 사회주의 혁신에 성공한 중국은 깨끗하고 위생적이며 해충이 없는 천국이었다. 문제는 그가 내린 해충의 정의였다. 쥐, 모기, 파리… 그리고 참새. 이 네 가지가 어떻게 한 줄에 묶였는지는 지금 봐도 불가사의하다. 전염병의 매개체인 쥐, 모기와 비위생의 상징인 파리까지는 그렇다 치자. 하지만 참새라니.

참새가 박멸되어야 하는 해충인 이유는 곡물을 먹어치우기 때문이었다. 중앙은 참새 한 마리가 쪼아먹는 곡식의 양이 상당하다고 발표했다. 한 마리의 참새가 일생동안 먹어치우는 곡식의 최대치를 계산한 다음, 이를 중국 전역에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참새의 수에 곱하는 "과학적 방법"이 기반이었다. 이 계산을 통해 당국은 참새가 국가 단위로 연간 수 십만 톤의 곡물을 먹어치운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캠페인은 국가위생건강위원회와 당 조직이 공동 주도했으며, '국민의 청결 의식 고취’라는 이름으로 전국 인민을 동원했다. “더럽고 곡식을 훔쳐먹는 적들을 쓸어버리자.” 이 표어 아래 수억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마오는 참새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참새는 해로운 새다.

1958년 3월 국무원은 공식적으로 "전국 제사해 위생운동 실시 통지"를 발표했다. 이는 단순한 방역이 아닌 혁명이었다. 전 인민공사와 학교가 동원되었다. 신문, 전단, 집회, 선전 방송을 통해서 대중 동원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고, 베이징에는 "포위 섬멸 참새 총 지휘부"라는 해괴한 이름의 조직이 세워졌다.

참새는 날아다닌다. 총도, 사냥 도구도 없는 인민이 잡기에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은 기발했다. 아니, 광기어린 천재적이었다.

처음에는 매일 오후 4시부터 저녁 7시 30분 사이를 활용해 사람들이 참새를 몰아내는 활동을 했다. 참새가 먹이를 찾아 나선 이후 저녁에 둥지로 돌아올 때 소란을 피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곧 양상이 총력전으로 변한다.


이 때부터 중국 전역은 일종의 전쟁터가 되었다. 새벽부터 북, 냄비, 철제 통, 꽹과리, 심지어 대야까지 총동원됐다. 사람들은 지붕에 올라가고, 광장에 모이고, 공장 굴뚝에 올라가서 두들기기 시작했다. 소리의 목적은 단 하나, 참새를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참새는 작은 새라 날갯짓을 오래 하면 피로로 인해 결국 떨어진다. 온 나라가 이 소리에 휩싸였다. "꽝! 꽝! 꽝!"

사람들이 지붕 위, 나무 위, 공장 굴뚝 위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속출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다치기 시작하자 잠자리채를 활용하고, 막대기에 천을 꽂고 휘둘러 참새를 쫓아내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 참새 둥지와 알을 파괴하고, 독이 든 미끼를 푸는 등 그 방식도 혁신을 거듭한다. 이 광경은 어떻게 보면 집단적 최면, 또 어떻게 보면 집단적 광기 상태였다. 1958년 4월 20일의 베이징에서는 한 번의 전투 끝에 83,000마리의 참새가 죽었고, 베이징보다 면적이 작은 상하이에서는 단 한 번의 전투 끝에 136만 마리가 넘는 참새가 죽었다.


이 웃지 못할 광경은 외국 언론에도 포착됐다. 1959년 타임지는 “중국, 참새와의 전쟁 선포”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기자는 이렇게 썼다.

《중국 인민은 "혁명가적 열정"으로 자연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기더라도, 아마 패배하게 될 것이다.》

제사해 운동의 상징격 되는 사진 되시겠다. 수레 위에 적힌 문구는 일일전과라는 뜻으로 단 한 차례의 전투에서 대승을 하셨단다.

일부 참새들은 외교 공관의 영토 피신했다. 광기가 어찌나 심했던지 참새들 소리를 피해 폴란드 대사관에 떼로 피신해도 중국 시민 수 백명이 대사관을 에워싸 꽹과리, 북을 쉴 새 없이 두들겼다. 2일간 쉬지 않고 두들긴 결과 참새들은 대사관 안에서 지쳐 죽었고 폴란드 대사관 직원들이 이 시체를 치워야만 했다.

제사해 운동으로 1년 만에 20억 마리에 달하는 참새가 "박멸"되었으며, 2년 만에 중국 전역에서 참새가 문자 그대로 씨가 말랐다.

참새의 시체를 모으면 산처럼 됐다.

그러나, 참새를 잡은 효과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 본색을 드러낸다. 참새는 곡식만을 훔쳐먹는 새가 아닌 곤충을 잡아먹는 새다. 그 참새가 사라지자 들판은 순식간에 해충으로 뒤덮였다. 벼멸규, 바구미류, 누에나방 등 온갖 해충들이 늘어났다. 참새가 있던 시절에는 해충의 개체수가 늘어나면 참새가 포식하며 자연스레 개체수가 조절됐지만, 참새 없는 세계에서 이 균형 장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이 중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지역이 난징 지역으로, 이 지역에서는 1959년 단 1년 만에 전체 농작물의 60%가 병충해로 갉아먹혔다. 심경밀식이라는 비정상적 농업까지 이루어진 걸 생각을 때 그 피해는 실로 궤멸적이었을 것이다.


제사해 운동에 참여한 한 농민은 처음에는 곡식을 훔쳐먹는 참새를 모두가 나와 박멸할 수 있다며 좋아했지만, 참새가 사라지자 메뚜기떼가 창궐했다며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고 훗날 소회를 밝혔다.


이쯤 되면 공업 때와 마찬가지로 농업 역시 비현실적인 목표 아래에 짓눌려 있었다. 이 시기 농업 정책은 마오에 대한 충성도와 열성만이 생산량을 결정한다고 믿는, 혹은 믿어야 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 중국의 농업 정책이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황당한 실험실이었다.

인민공사 체제 강행

사식 금지 및 개인 농경지 폐지

땅 깊이 갈이

집을 때려부숴 비료 만들기

밀식 재배

참새 박멸

모두가 자연과 인간 상식을 뿌리부터 무시한 실험이었다. 국가 단위의 재앙은 예견된 일이었다. 하지만 간부들은 실적이 필요했고 농민들은 억압 때문에 생산량이 증가했다는 보고만 할 수밖에 없었다. 철강 생산 때와 마찬가지로 마오의 책상 위에는 매년 풍년이 들었다는 보고서만 올라왔다.

기근이 시작될 무렵인 1959년 국가 주석 펑더화이(彭德懷)가 현실적 문제를 지적하며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암시하는 편지를 마오에게 보냈다. 그는 “우리의 농업 정책은 지나치게 급진적이며 인민이 굶주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마오는 이를 개인적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펑더화이는 ‘반당 우경 기회주의자’로 몰려 실각했다. 그를 지지한 간부들도 숙청됐다. 이 사건 이후 당 내부의 비판은 완전히 사라졌다. “마오 주석이 옳다”는 신앙이 정책의 전제가 되었고 정책 실패는 어져만 갔다.

펑은 후에 극심한 조리돌림을 당한 후 사망한다.

생산량도 문자 그대로 폭락한다.


1958년 중국 전역에서 보고된 생산량 약 3억 7500만 톤, 실제 생산량 2억 톤
1959년 실제 생산량 약 1억 7000만 톤
1960년 실제 생산량 약 1억 4350만 톤
1961년 실제 생산량 약 1억 4750만 톤


다음으로 인민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애써 수확한 작물이 공산당의 트럭에 실려나가는 모습이었다. 공산당은 이들의 작물을 공출해 갔다.


안후이성의 평양현은 총 4억 kg에 달하는 작물을 수확했다고 보고했으나 실제로는 0.8억 kg에 달하는 작물을 수확했고 중앙은 0.34억 kg을 공출했다. 전체의 37.5%에 달하는 수치이다.


1958년 허난성은 실제로 702만 근, 약 351만 톤을 생산했다고 보고했으나 실제로는 281만 근, 140만 톤에 달하는 작물을 수확했고 공산당은 이 350만 톤을 기반으로 엄청난 양을 공출한다.


1958년 허난성에 있는 신양이라는 지역은 36억 톤의 작물을 생산했다고 보고했으나 실제로는 9억 톤 가량의 작물을 수확했고 공산당은 5억 톤이 넘는 작물을 공출한다. 50%가 넘는 작물을 공출로 빼앗겼다.


옛날부터 천부지국, 하늘이 내린 땅이라고 불리며 중국의 곡창 지대로 일컬어지던 쓰촨성 전체에서는 1959년 405억 톤 가량의 작물을 생산했다고 보고했으나 실제로는 170억 톤의 작물을 수확했다. 중앙은 쓰촨성에서 78억 톤 가량의 작물을 가져갔다. 전체의 46% 수준이다.

농경 사회에서 농업 지역이 한 해를 버티기 위해서는 지역 총생산량의 60%가량이 필요하다.
다음 해 파종용 종자로 10% 가량이 필요하고
가축 사료로서 10% 이상이 필요하다.
비상 대비분으로 10%가량을 비축한다.

이 수치를 종합해 보면, 농업 지역을 다음 해까지 정상 유지하려면 중앙이 공출해가는 양이 총생산량에서 10%, 많아도 20%를 넘기지 않아야 정상 유지가 가능하다. 중앙이 공출해간 수치는 정상적으로 유지가 가능한 수치의 4배 이상이었다.

인민공사 체제에서는 가축도 국가 자산이라 폐사하지 않게 더욱 신경써야 했다.

지역에 따라 편차는 컸지만 인민들이 정상적으로 먹을 수 있는 곡물의 수치는 2개월~4개월분밖에 되지 않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강조했듯 인민공사 체제 하에서는 사식을 원천 통제했다. 그 몇 개월치는 개인이 집에 비축한 게 아니라 인민공사가 일괄 배급하는 공동급식소 기준이었다. 즉, 공동급식소에 남은 식량이 끝나는 순간 식량도 끝이었다. 식량이 떨어지는 순간 그들은 굶을 수밖에 없었다. 인민공사 체제 하에서 부업이 막혀 현금 흐름이 끊기자 도저히 먹고 살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토법고로는 매일 밤 돌아갔 돌아가야만 했다. 식량은 없는데 노동 강도는 늘어만 갔다.

이렇게 1959년부터 1961년간 중국 전역을 휩쓴 삼년대기근이 시작된다. 수많은 공동급식소가 문을 닫았고 그나마 남아있는 공동급식소에서는 하루 한 끼 흰 죽만 나왔다. 주린 인민들은 나무껍질부터 풀뿌리, 심지어 흙도 먹었고 죽은 자의 시신을 삶아먹는 식인까지 이루어졌다.

오랜 기근으로 일할 기력이 소진된 이들은 농장에 나가지 않았다. 열심히 일해도, 대충 일해도 모두가 동등하게 공동급식소에서 밥을 받는 모습은 인민들의 의욕을 악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농장에 나가지 않는 인민들은 충성 경쟁에 미쳐버린 공산당 간부들에게 호된 매질을 당하다가 비명횡사했다.


100만 명이 사망한 신양에서는 약 6만 7천 명이 공산당의 폭력으로 사망했다. 신양은 중국 전역과 비교해 봐도 피해가 비정상적으로 집중된 지역이었고, 당국은 상황을 은폐하기 위해 도시를 봉쇄했다. 식량을 찾기 위해 신양을 벗어나려 했던 주민들, 그리고 내부 상황을 외부에 전달하려 했던 이들이 봉쇄선에서 차례로 사살됐다. 이 죽음은 단순한 통계로 처리되었고, 철저히 은폐되었다. 도시는 고립되었다. 남아있는 이들이 할 수 있던 것은 굶어 죽는 걸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해당 사태 이른바 '신양 사태'다.

신양은 유독 기근이 심한 지역이었다.

국가 전체를 붕괴 직전으로 내몰았다. 안후이에서는 900만 명(당시 전체 인구의 18%), 허난 성에서는 500만 명 이상(전체 인구의 12%)이 아사했다. 천부지국이라며 예로부터 농업 생산량이 풍부하던 쓰촨성에서는 1000만 명(전체 인구의 14%) 이상이 아사했다. 이 중 쓰촨성의 잉징 현은 인구 9만 명 중 5만 명 이상으로 절반 이상이 아사했다.


허난성 안양 지역에서는 마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사했다. 쓰촨성을 비롯한 장쑤, 안후이, 허베이, 산둥 등 주요 곡창지대가 모조리 참극의 현장이 되었다.

대약진운동 당시 살아남아 후일 작가가 되는 류티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한 현(縣) 주민의 절반 정도가 굶어 죽었고, 50% 정도만 살아남았습니다. 저는 당시 사티엔의 노동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제 몸무게는 120근에서 80~90근으로 줄었습니다. 사람들이 굶어 죽을 때는 처음에는 각자 구덩이를 파서 묻었는데, 결국 구덩이가 없어지자 큰 구덩이를 파고 열두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묻었습니다. 제 친구 한 명은 그곳에서 죽어 묻혔습니다. 그는 하루에 열두 명이 넘는 사람들을 묻었고, 모두 굶어 죽었습니다."

마을마다 사망자가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한 사회가 되었고, 공산당 간부들도 하나 둘 인민들이 굶어 죽는다는 보고를 올렸지만 마오는 이야기했다.

먹을 게 부족하면 끼니를 줄이면 된다

중국인들은 채식동물이다

굶어 죽는 건 예전에도 흔했으니 보고할 일도 아니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인민이 당을 배신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식량 은닉자 처형이 일상화됐다. 곡식을 조금 숨겨 가족을 살리려 한 농민은 ‘반혁명분자’로 몰려 맞아 죽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마을이 아사로 사라졌고, 남은 자들은 서로를 의심하며 버텼다. 약진과 혁명이 약속했던 평등과 해방은, 생존을 위한 전쟁으로 바뀌었다.

책상 위에 저런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했을 무렵 마오는 국제무대에서 허위 보고서의 생산량을 바탕으로 인민들에게 중국에 풍년이 들었다는 허세를 멈추지 않았다. 인민이 굶어 죽는데도 생산량이 늘었다는 라디오 방송과 포스터가 휘날렸다. 국제 사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니 세계에 중국에 풍년이 들었다고 홍보하며 곡물 수출에 박차를 가했다.

이 기만적인 포스터는 1960년에 제작되었다. 1960년은 삼년대기근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피해를 받았던 해이다.

여기에 더해 중국식 사회주의 모델이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보다 우월하다고 떠들고 싶었던 마오는 소련에게 지불해야 했던 무기, 군사 물자에 대한 부채 및 기술 제휴비를 농축산물로 상환하기로 계획하는데 그 결과 1959년 한 해에만 400만 톤 이상의 곡물이 소련 부채 상환용으로만 해외에 반출되었다. 400만 톤의 곡물은 그 해 기근으로 사망한 천 만명이 넘는 이들에게 1년 간 최소 칼로리 이상을 제공할 수 있는 수준의 양이었다.

기근으로 수 천만명이 사망한 1959년~1961년 사이, 960만 톤의 곡물이 전 세계에 수출되거나 혹은 무상으로 공여된다.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서구권 국가에서 중국산 곡물이 팔리기 시작했고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에는 무상으로 공여됐다. 이러한 곡물 수출은 서방권에는 중국식 사회주의 모델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함이었고, 곡물 공여는 후에 일대일로의 토대가 된다.


이 미친 시기의 중국은 세계 5대 곡물 수출국이었다. 중국은 내부에서 수 천만 명이 굶어죽는 와중에도 식량 순수출국(Net Grain Exporter)의 지위를 가졌다. 960만 톤의 곡물은 3천만 명 이상의 인구가 3년 동안 생존에 필요한 칼로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양이다. 그 기간 동안 수 천만 명이 굶어 죽는다는 소식은 듣지도 보지도 않았다.

후에 1960년,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미국 적십자와 UN, 일본은 중국에 식량 원조를 제안하지만 자존심 강한 마오는 이마저도 거부했다. 그의 눈에는 미국은 제국주의 적대 국가고, UN은 미국의 꼭두각시이며, 일본은 미국의 우방국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존심 때문에 식량 원조를 거절한 중국은 1961년대 들어 500만 톤 가량의 곡물을 호주, 캐나다 등으로부터 사들였지만, 이미 수 천만 명이 아사한 뒤였다. 그마저도 이 시기 마오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어 가능했다.

호주, 캐나다는 그 미국의 최대 우방국이다.

당에서는 마오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들끊었다. 철권통치를 유지하며 숙청을 일삼는 그였지만 모두가 한 목소리로 그를 비판하니 그 역시 반박에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대약진운동 당시의 가장 유력하다고 추정되는 사망자 규모가 4500만 명, 일부는 6000만 명 이상으로 집계하기도 한다. 이는 2025년 한국 인구의 90% 수준이며, 우크라이나 전쟁 직전 우크라이나 전체 총인구를 능가하는 수치이다. 이조차도 아사자를 한정으로 한 추정치이며 실제로 기근 상황에서 의료를 받지 못해서, 영양분 부족으로 면역력이 약해져서, 집을 잃어 노숙을 해서 사망한 이들은 집계되지도 않는다. 지구 상에는 오늘날도 인구가 500만명을 채 넘기지 못하는 국가가 110개가 넘는다. 수치는 지구본의 어느 한 부분을 아예 붓칠해서 삭제할 만큼의 수치인 것이다.


생활 기반인 집은 때려부숴진 지 오래에, 인민들이 할 일은 늘어만 갔다. 마을과 공동체는 수 천만명이 아사하는 동안 와해되며 중국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1958년의 들판은 땀으로 젖었지만, 1961년의 들판은 시체가 쌓였다. 곡식이 아니라 거짓이 자랐고, 수확된 건 쌀이 아니라 굶주림이었다. 그 시기 중국의 농부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들은 명령을 심고, 절망을 거두었다. 대약진(大躍進)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중국은 그 운동을 통해 기술이나 생산력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대신 마오 그 자신의 어리석음, 권력의 잔혹함, 그리고 체제의 자멸 본능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마오쩌둥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대약진 운동에서 4500만 명이 굶어 죽었음에도 정책 시행 과정에서 발생한 일시적 오류 쯤으로 취급했고, 훗날 후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인민의 죽음을 생리적으로 전혀 느끼지 못했.


이 인재(人災)를 창시한 유일한 책임자, 마오쩌둥의 초상은 지금도 천안문에 걸려 있다. 하지만 그 초상 뒤에는 수 천만명의 죽음이,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굶주림에 시달린 기억이 남아있다.

높이 6m, 가로 4.6m에 달하는 이 초상화는 매년 새로 그려진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마오는 당 내에서 거센 비판에 직면하고 권력을 상실한 채, 명목 상 국가주석이었지만 국정에 의견도 내지 못하며 사실상 권력 2선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리고, 권력 2선으로 후퇴한 마오는 또다시 중국의 오야붕이 되겠다고 중일전쟁 때 발휘했던 천재적 혁명 능력을 다시금 발휘하니, 그것이 또다시 중국을 수 십 년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은 1966년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다. 문화대혁명은 대약진운동과는 다른 방식의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그 파장이 중국을 완전히, 완전히 후퇴시키고 말았다.


2부, 문화대혁명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