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그들은 왜 문화재를 파괴하고 스승을 구타했나
학생이 스승을 구타하고 부모를 밀고해서는 죽음으로 내몰아버린 시기 수 천년의 역사를 자기 손으로 부정한 시기. 이들이 왜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
금지된 진실의 역사, 벌써 2부다. 금지된 진실의 역사는 인류 역사에서 중국 공산당이 얼마나 큰 재앙을 초래했는지 돌이켜보고 이런 재앙을 초래하는 집단이 다시는 세계 패권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다짐에서 시작한 시리즈이다.
2부는 그 유명한 문화대혁명이다. 학생이 스승을 고발하고, 수 만점에 달하는 문화재를 파괴하고 무형 문화재 전수자를 패 죽였던 시기, 누구나 반혁명으로 몰려 모진 고문 끝에 죽을 지 모르던 그 시기였다.
문화대혁명의 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의 제2차 경제성장 5개년 계획, 대약진운동(1958-1961)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가. 15년만에 영국의 공업과 경제를 따라잡겠다는 마오쩌둥의 무모한 계획에 인해전술로 철강 생산량을 늘린다는 정책을 피며 마을마다 재래식 용광로를 설치하여 철강 생산량을 늘리려 했지만 용광로에서 나온 건 쓰지도 못할 덩어리였다.
농촌을 한 데 묶어 인민공사라는 단위로 편입해 농민들을 관리하고 식사까지 철저히 통제한 결과 효율성이라는 명목 하 새벽 4시부터 농업이 시작되었고 굶주려도 먹을 게 없었다. 이 와중 소련의 "선진 농업"이라며 들여와 한 일로 땅을 깊게 갈고 그 자리에 작물을 빽빽하게 심는 농업인 심경밀식이라는 비과학적인 농업이 진행되었으며 과도한 비료 생산 할당량에 못 이긴 인민들이 집을 통째로 때려부숴 비료로 뿌려버리는 일이 발생했고, 참새를 곡식 도둑으로 지목하고 이를 없앤다며 벌인 제사해 운동의 결과 해충이 창궐해 곡식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농업 생산량이 급감했음에도 수 백만톤의 곡물을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에 수출하고 원조하였다. 결과는 4500만 명의 아사와 이보다 더 많은 셀 수 없는 2차 원인으로 인한 죽음. 한 국가에서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90%가량을 아사만으로 죽인 사건이며, 동시에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기근이다.
이 모든 결과의 원인에는 농업에도 공업에도 모두 문외한이던 마오에게 있었다. 마오의 훈시 단 하나로 이 모든 참사가 벌어졌거든.
중국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인 대약진운동은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종료되었다. 이유는 상술한 대로다. 국가 단위의 대재앙이 걷잡을 수도 없이 커져 수 천만명이 굶어 죽었기 때문이다.
마을마다 아사자가 속출한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이 모든 걸 주도한 마오쩌둥조차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결국 1961년 말이 되어서 전국의 간부들을 베이징으로 불러모았다. 이미 지방 간부들도 마오에게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중앙이 내린 철 생산 따위의 지령은 통하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는 뜻이 마오가 잘못을 인정하기로 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마오는 곧 열릴 회의에서 답정너식 결론을 내릴 작정이었다.
지방 실무자의 집행 오류, 일시적 시행착오
같은 말을 하며 하급자에게 책임을 전가할 작정이었다.
그리하여 1962년 1월 11일부터 2월 7일까지 약 한 달동안 전국의 공산당 간부들이 모인 7천인 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이름의 7천인 그대로 전국에서 7,000여명에 달하는 공산당 지역 간부가 모였다. 마오는 대약진 운동을 두고서 성과가 9할, 과오가 1할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혁명 원로"이자 국가주석이었던 류사오치는 마오의 의견을 지지하려고 서면 보고서와 연설문까지 작성해둔 참이었다.
마오쩌둥은 7천인 대회에서 대약진운동은 공이 9이고 과가 1이라고 말하면 분위기가 자신에게 유리해질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회의의 분위기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심각했다. 지방 간부들이 한 목소리로 경제가 붕괴하고 아사자가 속출했다는 보고를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마침 마오의 의견을 뒷받침할 작정으로 회의에 참석한 류사오치는 사실 1959년 후난성(류와 마오의 고향이다)을 시찰하며 대약진운동이 불러온 참사를 알고 있었다. 후난성에서 수 백만이 굶어죽은 참사를 직접 목격한 그는 기근이 후난성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현실을 깨닫고 생각을 바꾼다. 그는 연설을 시작하며 이미 준비한 원고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신 작은 수첩에 간략히 메모한 내용만 봤다. 공산당 간부들에게 받은 통계 수치와 핵심 포인트 등 요지만 적혀 있는 수첩이었다.
3시간에 달하는 연설동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약진운동은 천재(天災)가 3할이고 인재(人禍)가 7할이다. 어떤 지역은 과오가 9할일 수도 있다. 계속해서 성적은 9할이라고 말하는 건 현실을 직시하는 태도가 아니다. 후난성 농민들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과오가 7할이라고 말한다.
며칠간 회의가 지속되었지만 그간 마오가 성과 9할, 과오 1할이라는 논리를 반복하였고 이 회의는 도착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류사오치의 이 발언이 이후 회의가 비생산적인 논의가 아닌 경제 정책을 수정하는 논의를 하도록 선회하는 계기가 됐다.
당 간부들은 드디어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해줬다며 류사오치의 연설에 드디어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해줬다며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꼈다. 바로 마오가 자신들을 수탈한 지주들을 제거해나갈 때 농민들이 느꼈던 그것이다. 류사오치의 연설이 끝날 때 당 간부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고, 마오는 뒷편에서 그 광경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류사오치는 마오를 개인적으로 찾아가 결국 우리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역사책에는 식인 행위까지 기록될 것이라며 쏘아붙였다. 마오는 이 때 스탈린이 죽자마자 '스탈린 격하 운동'을 시작하며 스탈린의 흔적을 지워 나갔던 흐루쇼프를 떠올렸다. 더 이상 마오의 눈에 류사오치는 혁명 원로, 동지가 아닌 자신의 사후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할 중국판 흐루쇼프였다.
7천인 대회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마오는 자아비판이라는 걸 했다. CCP 체제에서 그 자아비판이란 마오가 제시한 개념으로 나의 잘못을 스스로 고백하고 공격을 당하는 것으로 이 짓을 '당이 만족할 때까지' 하는 게 자아비판이었다. 모두가 기근의 책임을 물으니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었다. 비록 마오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교묘하게 류사오치,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공산당 혁명 원로는 물론 지역 간부들에게도 책임을 전가하는 식의 발언을 하였지만, 한 때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았던 존재가 자아비판문을 낭독하니 당 간부들이 "주석님의 인품에 감탄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마오는 자아비판을 하며 느낀 치욕을 잊지 않았다.
이 때 류사오치는 이미 1959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이었지만 실질적인 국정 주도권은 마오쩌둥에게 있었다. 류사오치는 7천인대회 종료 이후 본격적으로 국정에서 마오쩌둥을 배제하기 시작하였고 덩샤오핑이라는 인물이 당 총서기 자리에 올랐다. 둘은 공산당 소속이었지만 인간의 기본 욕망인 소유욕을 부정하지 않았다.
말도 안되는 정책이었던 전통식 용광로로 강철 만드는 거, 공동급식소같은 건 없앤지가 오래고, 호주와 캐나다에서 곡물을 구매해 인민들에게 지원했다. 인민공사라는 족쇄에서 농민들을 풀어주고 기능을 점차 악화시키다가 그 기능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류-덩은 세금을 제외한 곡물은 모두 공사가 아닌 개인이 갖게 했다. 마오 시절 국영화시킨 토지 중 일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어 개인 텃밭을 만들게 했고 거기서 나온 작물은 인민이 가지게 했다.
대약진 운동 시절 금지되었던 부업과 농작물을 시장에서 사고파는 거래도 활성화시켰다. 가격 통제를 풀고 시장 원리에 맡기자 사라졌던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인민들이 몇 년 만에 "내 것"을 손에 얻는 장면이었다. 농민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벽부터 자발적으로 밭에 나가 일했고, 식량 생산량은 불과 1년만에 급반등했다. 어느덧 시장에는 계란과 나물이 넘쳐나기 시작했으며 그 계란과 나물은 그대로 인민의 식탁에 올라왔다. 류와 덩은 이 때부터 국가의 영웅으로 불리었고 인민과 간부의 사랑을 받으며 국정을 주도하는 핵심이 된다.
마오는 이 현실이 몹시 불편했다. 마오는 대약진운동 자체의 방향성은 옳다고 믿었다. 대약진운동 내내 그랬고 기근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62년도 초에도 성과가 9할, 과오가 1할이라고 신나게 떠들었다. 수 천만명의 죽음을 두고서는 예상치 못한 오류 쯤으로 여겼다. 자신의 정책이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수정되는 현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모든 것을 부정한 것처럼 중국마저 자본주의라는 악마와 손을 잡을까, 류사오치가 자신의 사후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한편, 마오는 '반격'을 위해 균열을 찾아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인민들의 일상이 회복되어갈 무렵 마오의 눈에 시장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며 활기를 되찾는 모습은 중국이 혁명 정신을 잃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이 마오에게는 자본주의의 재림이요, 인민들이 나태해진다는 증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는 인민의 의지와 정신력으로 완성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마오는 1962년 9월 공산당을 향해 소리쳤다. "계급투쟁을 절대 잊지 말라!" 이 한 마디에 곧 사청운동(四淸運動, 1962-1965)이라는 숙청이 전개된다. 정식 명칭은 사회주의교육운동. 사청은 네 가지를 바로잡는다는 의미로 여기서 네 가지란 정치, 경제, 사상, 조직을 의미한다. 류사오치는 그의 부인 왕광메이를 도원(桃源)이라는 곳으로 위장취업시켜 간부들의 부패 행위를 조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수 만명에 달하는 비밀 공작단을 조직해 농촌으로 보냈다. 수 백만에 달하는 하급 공산당원들이 부정부패로, 혹은 불순분자로 낙인찍혀 대거 좌천되고 이 중 수 만명이 목숨을 잃는다.
수만 명에 달했던 비밀 공작단에는 대학생, 심지어 고등학생까지 있었다. "학생 공작단" 농촌으로 내려가 마을 간부들의 부패를 조사하는 일을 맡았다. 공산당 간부들이 철저히 권위를 독점한 중국 사회에서, 나보다 '높은'사람을 끌어내리고 비판하는 권력을 맛보니 짜릿했다. 훗날 대학의 교수를 공격하게 되는 심리적 문턱이 이 때 이미 낮아져 있었다.
사청 운동을 주장한 마오쩌둥의 속내는 당 내부에서 '수정주의' 노선을 걷던 당 고위층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청 운동으로 하급 간부들이 실각하는 모습을 견디기 힘들었다. 1965년 회의석상에서 마오는 류사오치에게 "당 내에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권력파(주자파)가 있다"고 말헸고, 이에 류는 마오에게 모든 것을 주자파로 몰아붙여선 안 된다고 맞받아친다. 마오쩌둥은
이 운동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사활을 건 투쟁이다.
더 이상 하급 탐관오리가 목표가 아니다. 이번 운동의 중점은 당 내부에서 자본주의 길을 걷는 권력파(주자파)를 정리하는 것이다.
라고까지 말하지만 이미 중국 공산당은 류사오치-덩샤오핑이 꽉 쥐고 있었기에 큰 호응을 받지 못한다. 여기서 주자파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뜻한다. 사청운동은 곧 종료되었고 마오는 류사오치의 사람들이, 실용주의 세력이 당을 꽉 쥐고 있단 걸 깨달았다.
당의 주자파를 없애자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전개한 운동이 되려 류사오치 체제의 권위를 드높이고 말았고 이 때부터 마오쩌둥은 당 내부에서는 영향력이 없으니 권력을 위해서 외부 세력을 동원하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류사오치를 공격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던 마오는 당시 베이징의 부시장을 지내던 우한이라는 학자가 쓴 역사 연극, 해서파관을 문제삼았다. 해서파관은 명나라에 실제로 존재하던 청렴 관료 해서가 당시 황제 가정제에게 직언하다가 실각하는 내용으로 명나라에 실제로 존재하던 해서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만든 연극이다. 역사를 좋아하던 마오는 대약진운동 당시 허위보고를 일삼던 간부들에게 해서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본받으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해서를 본받으라던 마오는 이 시기 연극 속의 '백성을 위해 상관에게 저항하는 청렴 관료'라는 이미지에서 대약진운동 당시 자신에게 직언하다 실각당한 펑더화이를 떠올렸다. 그의 눈에 해서는 펑더화이였고 해서를 실각시킨 폭군 가정제는 자신이었다. 물론 이건 마오의 뒤틀린 망상에 가까웠다.. 만, 마오 노선을 따르던 야오원위얀이라는 평론가는 마오의 망상을 근간으로 평론을 실었다.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비평함
1965년 발표된 이 논평은 이 연극은 단순한 역사극이 아니며 자본주의 회귀 노선을 옹호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 마오의 혁명과 대립된다는 내용을 담는다. 야오원위얀의 단독 판단이 아닌, 마오의 측근 그룹이 지시하여 만든 정치적 공격문이었다. 이 때가 1965년, 해서파관 연극이 발표된지 4년 만의 일이다.
마오의 진짜 속내는 우한이었다. 이미 베이징의 행정은 류사오치, 덩샤오핑 계열이 장악한 상태였고 우한은 베이징시의 부시장을 맡고 있었다. 야오원위얀의 글이 전국에 실리자 우한은 '반당 사상 보유자'로 지목되며 조사 대상이 되었다. 그는 이듬해인 1966년 베이징시 부시장직에서 해임당한다.
훗날 마오의 뜻에 따라 문화대혁명에 동참하는 당시 중국의 젊은 세대는 중일전쟁 - 국공내전 -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이라는 대격변 직후 태어났다. 1962년 이후 중국의 교육은 마오의 노선에 따라 급격히 정치화되었다.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나 류사오치에게 자리를 넘겼지만 공산당의 주석직을 유지하고 있어 영향력이 건재했다. 교과서는 '혁명'을 신격화하면서 그것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교육은 마오가 없었더라면 중국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며 학교뿐만 아니라 영화, 노래, 라디오에서 이 서사가 반복적으로 주입되었다. 이 시기 마오쩌둥 사상은 도덕과 윤리의 척도로 둔갑하였다.
본래 교육의 장 학교에서는 지식인을 양성하기 위해서 책 많이 읽는 학생, 스스로 사고하는 학생이 필요했다. 특히 기근을 수습하고, 단순히 개인에게 권력을 몰아줄 경우 어떤 일이 생길 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생긴 시기인 1962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했고 "책을 많이 읽을수록 어리석어진다"라는 마오의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다.
국어 교과서에서는 고전 문학이나 서정적인 시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마오쩌둥의 논설과 혁명 전사들의 수기가 채웠다.
높은 성적은 되려 노동자와 농민 자녀들을 소외시키는 부르주아적 장벽으로 규정된다.
농촌과 공장에 의무적으로 육체노동을 하는 것이 필수 교과과정이 된다. 그러자 학생들 사이에서 선생을 실무를 모르는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더해 "학생이 교사보다 더 혁명적일 수 있다"고 선동한다.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은 학교 행정보다 강한 권한을 갖는다. 학생 간부들은 일반 학생들의 일기장이나 평소 발언을 감시하고 이를 점수화한다.
가정 출신에 따른 신분 제도가 고착화된다. 마오쩌둥은 혁명에 있어 출신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였지만, 동시에 부모의 혈통을 중요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5권에 달하는 마오쩌둥 사상이 담긴 "모택동선집(毛澤東選集)"을 달달 외워야 했으며 시험 문항도 이 책의 이해도를 보기 위해 출제되었다. 교실에서의 토론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주제의 토론보다 더 의미있는 것이 없었다. 마오쩌둥에 대한 신격화를 주입받은 아이들은 마오쩌둥에게 열광하기 시작했으며, 열광하지 않은 아이들일지라도 살아남으려면 앞장서서 정치적으로 과격해져야 한다는 본능을 학습하고 말았다. 이 우상화 교육에 학생들은 불과 몇년 전 자신과 가족을 굶어 죽기 직전으로 몰아넣은 그 마오쩌둥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한편, 이 시기 '계급'에 따른 차별이 만연했다. 당대 중국의 교육 현장에서는 크게 홍오류와 흑오류라는 신분제 비스무리한 게 존재했다. 흑오류는 마오쩌둥이 적이라고 주장한 이가 해당됐다, 지주, 부농, 국민당 지지자, 우파... 그리고 홍오류는 노동자, 빈농·하층 중농부터 혁명 군인, 혁명 간부, 혁명 열사까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인구 비중으로 따졌을 때 당시 인구의 10%가량이 흑오류, 90%가량이 홍오류일 것으로 추정된다.
홍오류 역시 하나의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서 노동자, 중농과 혁명에 기여한 이들 사이에서 명백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 대학 입시, 직업에서 상류층 홍오류들이 우대받는 상황이 계속됐다. 그 훌륭한 예시가 대학 입시에서의 차별 대우로, 1962년 베이징대학에서는 홍오류 자녀의 비율을 50%로 유지하라는 지침이 떨어졌다. 여기서 오홍류 자녀는 명백히 혁명간부 자녀를 뜻한다. 중국의 다른 명문 대학인 칭화대학 역시도 해를 거듭할 수록 오홍류의 TO가 극도로 늘어났다.
이러한 차별 대우가, 훗날 마오의 명이라면 뭐든지 따르겠다고 충성하던 마치 단일 집단처럼 보이던 홍위병들이 분열되는 계기가 된다.
1966년, 해서를 실각시키는 데에 성공한 마오쩌둥은 해서가 시작된 지 몇 달도 되지 않은 5월 16일, 5.16 통지라는 것을 발표한다. 그는 통지에서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은 계속되어야 하며(계속투쟁론) 당 내부에도 부르주아들이 숨어 있다고 했다. 원래는 일반 대중들은 이 통지의 내용을 몰랐고 고위층 내부 비밀 문건 정도였다.. 만, 그로부터 며칠 뒤 붙은 대자보 한 장이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1966년 5월 25일 베이징대학에는 학교 교직원들이 베이징대학 측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인다. 교직원들은 베이징대학이 수정주의 노선으로 물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인 5월 29일, 칭화대학의 부속중학교(네, 중학교가 맞다)에는 마오 주석을 따라야 한다며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다. 사건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탄압대를 보내 이들을 탄압하고, 특히 칭화대학의 학생들이 감금까지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은 도보로 15분정도 거리로 매우 인접하여 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이 때 마오쩌둥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베이징대학의 대자보를 훌륭한 마르크스 사상이라고 언급하였고, 내친 김에 감금된 칭화대학의 학생들까지 자기 힘으로 몸소 석방시킨다. 학생들은 이를 기점으로, 마오쩌둥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또한 칭화대학교 부속중학교 학생들이 스스로를 지칭한 "홍위병"이라는 표현이 이 때부터 유행을 타기 시작한다. 이 시기 대학 캠퍼스에서 '마오쩌둥' 열풍이 불었고, 1천만 명이 넘는 이들이 마오쩌둥을 신적인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홍위병이란,
홍(紅, 붉을 홍): 공산주의와 혁명, 그리고 중국 공산당의 상징색이기도 하며 '붉은 태양'으로 숭배받던 마오쩌둥을 상징한다.
위(衛, 지킬 위): 지키고 보호한다는 뜻이다.
병(兵, 병사 병): 군인, 전사를 의미한다.
즉, 마오쩌둥 내지는 붉은 사상을 수호하는 병사란 뜻이다.
1966년 8월 18일, 마오쩌둥은 100만여 명에 달하는 그의 광신도를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으로 불러 사열했다. 수 년간의 마오쩌둥 신격화 교육을 받은 이들은 마오쩌둥이 교과서에만 나오는 인물이 아닌, 감금된 이들까지 친히 풀어주는 따뜻한 존재라고 확인하였고 이 '신'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천안문 광장을 뒤덮은 그들은 신의 어록을 치켜들고는 눈물까지 흘리며 열광했다.
그 자리에서 마오쩌둥을 대신해 마이크를 잡고 마오의 대변인 역할을 한 이른바 "사구"를 철저하게 타파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부르주아와 당내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세력을 철저히 타파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여기서 사구란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
을 의미한다.
린뱌오의 연설이 끝나기가 무섭게 100만 여명에 달하는 홍위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가 마오쩌둥의 초상화와 어록을 치켜들고는 그 어록을 성경처럼 암송하며 행진했다. 린뱌오가 연설한 그 바로 당일 홍위병들은 '봉건'적으로 여겨지는 가게의 간판을 철거하였고, 식당에 난입해서는 골동품을 부순 다음 그 자리에 마오의 어록을 붙였고, 지나가는 사람의 머리 모양이 '부르주아'적인 사람을 붙잡아 모욕을 주고, 소련 대사관의 간판에 '수정주의 반대'라는 문구를 적었다.
이렇게 중국을 또 한번 암흑으로 몰아넣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1966-1976)이 시작되었다. 이 미친 파괴가 4년간 지속되어 중국의 문화는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망가지고 말았다.
1966년 8월 그 달 홍위병들은 류사오치의 가택을 습격하고는 단체로 구타하고, 모욕을 줘서 그를 끌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는 곧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고, 모진 자아비판을 해야만 했다. 당 총서기 덩샤오핑 역시 이 시기 실각하여 트랙터 공장으로 하방되는 수모를 겪는다. 마오쩌둥의 목표인 국가주석 등극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홍위병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고 마오쩌둥도 이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1966년 그 해도 아닌 8월부터 9월까지 한 달 남짓한 기간의 파괴는 미친 수준이었다. 베이징에서 문화 유산으로 보존되어 관리되고 있었던 문화재 6,843곳 중 4,922곳이 파괴되었다.
베이징의 면적은 중국 전역의 1/500도 채 되지 않는다.
홍위병들은 사다리를 타고는 불상 위에 올라가 머리를 깨부쉈고, 책을 불태웠고, 비석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파괴에 동원된 물건은 창, 망치, 사다리... 가끔은 폭탄이었다. 이 분위기에 사람들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으면 자신도 습격이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 소중히 여겨오던 문화재를 불사르게 되었다.
베이징에서의 '혁명'을 완수한 홍위병들은 "우리 고향에도 부술 것이 많다!" 라는 사명감을 안고서 전국으로 흩어져 나갔다. 이 때부터 전통을 상징하는 모든 것을 때려 부수고 불태워 댔다.
먼저, 유교는 부르주아의 옛 잔재라고 해서 산둥성에 있는 공자의 묘지가 파괴되었다. 홍위병들은 도끼로 공자상을 부순 다음, 묘지를 파헤쳐서 시신을 찾으려 들었지만.. 너무 오래되어 시신이 나오지 않자, 그 안에 있는 흙을 뿌리면서 "부르주아의 흙"이라고 외치고 다녔다. 공자의 76대손, 쿵링이(孔令貽)의 묘지에서는 쿵링이와 그의 부인 시신을 꺼낸 다음 대중 앞에서 모욕을 주다가, 시신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버렸다. 중국에서 존경받는 명장인 악비와 황제의 묘지는 모조리 파괴되었고, 파괴된 묘지에서 시신을 도굴해 무참히 유린했다. 그 해서파관 연극의 주인공이었던 해서의 묘 역시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었고, 그의 유골은 '지주 계급의 대표'라는 명목으로 거리에 끌려다니며 조리돌림을 당한다.
유교 경전과 전통 서적은 모두 거리로 내던져져 잿더미로 변해 버린다.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이 모조리 싹 다 약탈과 방화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 중 도서관은 전체의 1/3이 파괴되었다. 베이징·허베이·산시 일대에서는 수천 개에 달하는 사찰이 파괴되었다.
수천 개의 비석이 쓰러졌고, 고서적들은 불쏘시개가 되었다. 곡부의 비극은 자식들이 아버지의 무덤을 파헤치고, 제자가 스승의 뺨을 때리는 패륜의 상징이었다. 예(禮)를 숭상하던 유교 문화의 출발점인 국가는 그날, 스스로 예를 내려놓았다. 청나라의 강유위, 무훈, 장지동, 정성공, 악비의 묘까지.. 수 천개에 달하는 묘지가 저렇게 유린당한다.
이 시기 파괴된 문화재는 중국 전역으로는 10만 여점에 달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홍위병들은 문화재 파괴에 머물지 않았다.
이 시기, 혁명은 단순히 문화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학교수, 작가, 예술가들을 모조리 혁명의 대상으로 여겨서, 한 순간에 부르주아 반동계급으로 몰락한 이들은'높은 모자'를 쓰고 목에 죄상을 적은 팻말을 건 채 대중 앞에서 자아비판을 강요당했다. 이 과정에서 가해진 구타와 언어적 모독은 지식인들의 자존감을 철저히 파괴했다.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인 라오서는 1966년 8월, 홍위병들에게 수 시간 동안 구타를 당하고 '반혁명 분자'라는 모욕을 견디다 못해 베이징의 태평호(太平湖)에 투신 자살했다.
전통 경극(京劇)과 서구 클래식 음악은 '봉건적이고 퇴폐적인 것'으로 모조리 금지되었고 오직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이 주도한 8개의 모델 극(양판희)만이 상연될 수 있었다. 문화예술인은 모조리 탄압을 받았다. 삶에 가장 축복받는 순간인 결혼식에서도 마오쩌둥 찬가가 울려퍼졌고, 혼수로 모주석어록이라는 붉은 책자를 주고받았다. 아니, 명절 음식까지도 낡았다며 사라져야 할 대상이 되었다.
문화재 파괴 총계: 10만 여점 이상으로 추정
고서적 소각: 2,700여 권의 희귀 고서
그림 및 서화: 900여 점의 명화와 서예 작품이 찢기거나 소각
비석 파괴: 역대 제왕들이 공자를 기리기 위해 하사한 비석 1,000여 기 이상. 특히 국보급으로 평가받던 '성적도(聖蹟圖)' 석각도 훼손당한다.
무덤 도굴: 공자 묘역인 '공림(孔林)'에서 2,000여 기의 무덤이 도굴
도서관 중국 전체의 1/3 파괴, 700만 권 이상의 고서적 약탈
티베트: 3700여개에 달하는 불교 사원 파괴
사제 관계가 봉건적이라고 해 스승-제자가 수련하는 중국 무술도 박살 났다. 이는 그 유명한 소림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무승이 소림사에서 무술을 전하고 익히는 전통이 끊어졌고 실전된 무술도 많았다. 소위 쿵푸, 소림사 등 오늘날 볼 수 있는 중국 무술은 문화대혁명 이후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모아 취합한 것이라, 그것이 정말 복원된 것인가라는 논의가 끊이지 않는다.
식문화도 봉건적인 것으로 여겨져 황제의 궁중요리를 만들던 요리사 후손들이 탄압받았고, 고급 코스요리를 팔던 중식당은 한 순간에 문을 닫아야 했다. 그 훌륭한 예시가 만한전석(滿漢全席)으로, 본래는 레시피와 음식이 나오는 순서가 정해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고급 요리를 진열하는 데에 그친다.
이 시기 마오쩌둥은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황당한 개조 계획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붉은색은 멈춤이 아니라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진보와 혁명을 상징한다고 말하며, 신호등에서 빨간불에 출발하고 초록불에 멈추도록 훈시하였다. 일부 지역에서 이게 실행되자 교통사고가 속출했다. 수많은 가게가 '동풍(동쪽에서 부는 바람)', '홍기(붉은 깃발)', '공농병(노동자, 농민, 군인) 등 "공산당스러운"이름으로 사실상 개명을 강요받았고 기존의 역사적 인물이나 전통적 의미를 담은 지명은 봉건적 잔재로 공격받았다. 또한, 그는 자금성을 모조리 철거하고 그 자리에 집무실을 만드는 발상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자금성은 그 방의 갯수만 8,000여개에 달하는 큰 성으로 지금도 중국의 국보로 대접받는다.
언어와 색채, 기호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계급성과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지표로 간주되어 어떤 색을 쓰는가,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가, 어떤 노래를 부르는가가 곧 그 사람의 사상적 순도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상징은 점점 절대화되었고, 실용성과 합리성은 이념적 순수성 앞에서 후순위로 밀려났다. 복장 역시 중요한 정치적 신호가 되었다. 인민복이나 마오복은 혁명적 순수성을 상징했으며, 화려한 색상이나 서구식 옷차림은 부르주아적 사치로 비판받았다. 긴 머리, 화장, 장신구 로 치장한 사람은 반혁명적 취향의 증거로 몰려 구타당했다.
이 시기 10년간 대학 입시가 멈췄다. 교육 현장에서는 선생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저 누가 더 붉어지는지 충성 경쟁을 할 뿐이었다. 사상적으로도 서로를 완전히 적대적 계급으로 몰아넣어 버려서, 스승-제자 관계 뿐만이 아닌 당 간부-일반 인민, 심지어 부모-자식까지 적대적 계급으로 재구성했다. 1970년 중국 안후이성에서는 당시 16세였던 홍위병 장홍병이 자신의 어머니가 마오쩌둥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당국에 고발하여 공개 처형(총살)당하게 만들었다. 그는 오히려 당국에 반혁명분자인 어머니를 죽여달라고 간청까지 했다.
1967년, 문화대혁명이 선포된지 1년쯤이 지나자 홍위병들은 서로를 향해 광기의 칼날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홍위병은 단일 조직이 아니었다. 학교, 지역, 직장, 가문 배경에 따라 성격이 전혀 달랐다.
간부·군인·노동자 가정 출신
간부·부농 가정 출신
모두가 “마오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달랐다. 이미 교육부터가 대학 입시부터 홍오류 상위 계층에게 편향되어 있었고 이 긴장은 곧 노골적인 정치 노선의 차이로 폭발한다.
"아버지가 영웅이면 아들도 호걸이고, 아버지가 반동이면 아들도 개자식이다(老子英雄兒好漢, 老子反動兒混蛋)." 이는 간부, 혁명 원로 등 '보수파' 홍위병들의 구호가 되었다.
'혁명에는 이유가 있다, 조반유리(造反有理)" 이는 소작농, 노동자 등 '조반파' 홍위병의 구호가 되었다.
급기야 이들은 군부대를 향해 칼날을 빼들기 시작했다. 홍위병들은 군부대를 습격해 병사를 죽이고는 무기고를 탈취해 각 지역에서 유혈 시가전을 벌여댔다.
1967년 여름, 충칭이라는 지역에서는 수 개월간 내전을 벌였다. 초기에는 각목, 쇠파이프, 벽돌, 자전거 체인 등을 사용했다. 학생들은 공사장의 안전모를 쓰고 쇠창을 만들어 상대를 찔렀다. 그러던 도중 공장 노동자들이 가세하면서 선반을 이용해 정교한 단검, 창, 투석기 등을 제작했다. 심지어 사제 수류탄과 폭발물도 등장했다. 곧 군부대 무기고를 약탈하거나(혹은 군부가 슬쩍 흘려주거나), 군수 공장을 점령하여 소총, 기관총, 박격포, 화염방사기.... 심지어 탱크와 대공포까지 동원되었다. 학교와 공장이 요새화되었고, 서로 대포를 쏘아 건물이 반파되는 등 도시가 폐허처럼 변한다. 그들은 도시 안에서 준군사 조직으로 변모했다. 이 내전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종료된다.
"처음에는 몽둥이였지. 하지만 곧 장강(양쯔강)의 군함들이 불을 뿜었고, 수륙양용 탱크가 강을 건넜어. 우리는 정말 전쟁을 하고 있었던 거야." 훗날 홍위병으로 내전에 참여한 이가 증언한다.
"강 위로 시체들이 둥둥 떠내려갔어. 어떤 시체는 손이 묶여 있었고, 어떤 시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지. 그 시체들이 우한(무한)까지 떠내려갔다고 들었네." 이 참상을 목격한 충칭의 시민은 이렇게 증언한다.
군사적으로 무장한 이들은 공장, 철도, 방송국을 점거하였고, 군과 충돌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마오쩌둥은 홍위병들이 군과 충돌하는 사태를 인지하였음에도, 이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홍위병들이 군부대를 습격하였을 때 마오쩌둥은 군 간부들이 홍위병들을 때려잡는 행위를 묵인하였으나, 곧 그는 태도를 돌변하여 홍위병을 진압한 군 간부를 반혁명으로 몰아 실각시켜 버린다.
1967년 7월 20일, 마오쩌둥은 싸움이 심각했던 우한이라는 지역으로 비밀리에 시찰을 떠난다. 그는 조반파 홍위병과 지역 군부대가 정면으로 충돌한 이 내전에서 조반파 홍위병이 승리하였고, 자신이 우한에 있다는 걸 몰랐던 홍위병들이 자신이 머물던 건물에 난입해 군 간부를 끌고 나와서 패 죽이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다. 겁먹은 그는 그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 버린다.
마오쩌둥은 생전 비행기 타는 걸 그렇게 싫어했지만, 이 때는 비행기를 탔다. 우한에서의 참사를 목격한 마오쩌둥은 이 때 홍위병의 광기를 실감했을 것이다.
1968년 4월부터 베이징의 최고 명문대인 칭화대학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홍위병 조직인 '정강산 병단'과 '414파'가 교내 주도권을 잡기 위해 연구실을 요새로 만들고 서로를 죽이는, 이른바 '백일대무투'를 벌이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총과 대포로 무장한 칭화대학의 홍위병들에게 보내기 위해 공장 노동자 3만여 명을 소집하고는, 홍위병들이 요새를 구축한 칭화대학으로 보냈다. 노동자들로 하여금 홍위병들을 말로 설득하도록 했다.. 만, 칭화대학을 점거한 이들은 이들이 마오쩌둥이 보낸 선전대라는 사실도 몰랐고 '노동자 선전대'에게 발포해서 중상을 입히고 5명을 사망으로 내몰아 버린다.
이 때 마오쩌둥은 노동대를 진압한 홍위병 지도자와 면담을 가지며 눈물을 보였다. "너희는 나를 실망시켰다" 곧 홍위병 지도자들은 실각하였다.
이 시기 학교는 장기간 폐쇄되었고, 대학 입시는 중단되었다. 그 결과 수백만 명의 청년이 교육도, 일자리도 없는 상태로 도시에 머물게 된다. 무의미한 내전만 지속될 뿐이었다. 홍위병들의 '신'조차도 나중에 가면 상황을 통제하기가 어려울 거라고 판단하여, 홍위병들을 시골로 보내 버리기로 계획한다. 당시 시골은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도시에서의 혁명은 완수되었다. 이제 혁명의 최전선인 농촌에서 혁명을 완수하자
이걸 홍위병들은 철석같이 믿었고, 1968년 12월부터 1970년까지 1,700만 여명에 달하는 홍위병들이 시골로 가는 기차에 탑승하거나 혹은 트럭 짐칸에 탔다. 그리고 홍위병들이 하방되자 마오는 태도를 돌변해 "하방된 홍위병들은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도시로 돌아올 수 없다"라고 못박아 버린다. 그리하여 이들은 마오쩌둥이 사망하는 1970년대 후반까지 시골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은 부르주아를 몰아내자며 시작하였으나 상산하향으로 시골에 내려간 이들의 부모 중에서도 공산당 간부 출신이거나 돈이 많은 이들은 마오쩌둥이 사망하기 이전 뒷돈, 인맥을 활용해 그들의 자녀를 도시로 복귀시키거나, 혹은 상산하향에서 면제받는 특권을 누렸다.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말이 참으로 아이러니해지는 순간이다.
그렇게 홍위병들이 상산하향으로 시골에 감에 따라서 문화대혁명이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문화대혁명은 이들의 하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계급투쟁을 계속하라”는 노선은 그대로였다.
숙청, 자아비판, 사상검열, 출신성분 차별 같은 핵심 메커니즘은 계속 작동했다.
이 시기, 전국적으로 투쟁 대회라는 게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마을마다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쁜 분자, 우파' 등 이른바 흑오류에 대한 인민재판이 수시로 열렸다. 어제의 이웃이나 마을의 원로가 단상에 끌려나와 구타와 모욕을 당했다. 아침저녁으로 마오쩌둥에게 보고하고 춤을 추는 '충자무(忠字舞)' 등 기이한 의식이 강요되었으며, 여전히 검열은 풀리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1970년 초중반 경제침체는 중국을 강타해 중국인들은 체제에 극심한 불만을 갖는다.
1973년, 중국의 총리 저우언라이는 트랙터 공장으로 하방된 덩샤오핑을 복권시킬 것을 제안했다. 당시 그는 방광염을 앓고 있었고 덩샤오핑이 중국을 재건할 인물이라고 봤다. 마오 역시 덩의 복권을 승인한다. 그는 몇년 간 트랙터 공장에서 볼트를 조이는 일을 했지만 군부는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중국 사회 전반에 걸쳐 대규모의 애도가 확산되었다. 이는 문화대혁명 시기 극히 드문 현상이었다. 저우언라이는 폭력과 혼란의 시대 속에서도 ‘인간적인 지도자’로 인식되었고, 그 전부터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총리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사망이 아니라 문화대혁명의 광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마지막 안전선이 사라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저우언라이 사망 이후, 베이징을 중심으로 민중의 감정은 억제되지 않았다. 이 애도는 곧 정치적 의미를 띠게 된다.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저우언라이 만세를 외쳤다.
추모 열기는 곧 정치적 불만을 드러내는 자리가 되어, 화환을 바치는 단순한 추모가 점차 군중은 시와 대자보를 통해 "가짜 마르크스주의자를 타도하자", "진시황(마오쩌둥을 암시한다)의 시대를 끝내자"며 4인방과 마오쩌둥 체제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한 공안의 차량과 선전용 확성기 차들을 무자비하게 때려 부수었으며, 광장 옆에 있던 공안 지휘소를 습격한다. 분노한 군중은 건물 안으로 난입해 집기를 부쑨 뒤 불을 지른다. 화환을 치우려는 민병대와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들 사이에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진다.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고, 이 과정에서 부상자가 속출한다. 이게 제1차 천안문 사태(1976)이다. 이 때 문화대혁명 4인방들은 이들에게 무력 진압을 동원했고, 1차 천안문 사태의 배후로 덩샤오핑을 지목하며 또 한번 덩샤오핑을 실각시키는 데에 성공하고 말았다.
마오쩌둥은 1970년대 들어 고령과 지병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는 공식 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국정 운영도 측근과 지도부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제 1차 천안문 사태로부터 몇 달이 지난 1976년 9월 9일, 그는 베이징에서 향년 82세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중국 전역에 즉각적으로 전해졌으며, 대규모 국가적 애도 기간이 선포되었다. 언론은 마오를 ‘위대한 지도자’로 찬양하며 혁명적 업적을 강조했다.
그는 후계자로 화궈펑을 지목하였다. 화궈펑은 문화대혁명 시기 급진파와 실무파 어느 쪽에도 깊이 속하지 않은 중간적 인물이었다. 그는 마오의 신임을 일정 부분 얻고 있었고, 저우언라이 사망 이후 국무원 총리 대행을 맡으며 행정 경험을 쌓았다.
마오는 생전 "그대가 일을 맡으면 나는 안심한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이후 화궈펑이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핵심 근거가 되었다. 화궈청은 집권하자 군부와의 연계를 통해 문화대혁명 4인방을 체포한다. 문화대혁명이 정말로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문화대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을 계속 수행해야 하니 4개의 낡은 것을 타파하자는 명분 아래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 국가 운영에 필수적인 제도, 전문성, 조직 질서를 광범위하게 파괴했다. 사회주의는 본래 계급 해방과 생산력 발전을 목표로 하지만, 문화대혁명은 생산 관계뿐 아니라 생산 그 자체를 공격했다. 공장, 학교, 연구기관, 행정 조직은 ‘부르주아적’이라는 이유로 마비되었고, 이는 국가의 기본 기능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즉,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 사회주의 국가의 작동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그토록 타도하자고 목놓아 외쳤던 사회주의 혁명, 평등은 이루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이 시기 중국의 1인당 GDP는 북한보다도 낮은 수준으로, 세계 10대 최빈국에 달할 정도로 떨어져서 대약진운동에 이어 또 한번 중국을 붕괴 직전으로 몰아갔다.
홍위병들은 봉건에 반대하자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진짜 봉건의 최상단은 털끝도 건드리지 못했다. 홍위병 자신들도 마오의 권위를 거의 신격화해서 그의 어록을 치켜들고는 성경처럼 암송하며 행진했고, 위에서 내려온 노선에 조금이라도 어긴다고 여겨지면 극심하게 탄압했다. 이게 봉건적 위계다. 왕 대신 위대한 국가주석이 있었을 뿐이다. 유교 경전은 불태우면서도 마오 주석의 어록은 성경처럼 암송하고, 조상의 위패를 파괴하면서도 그 자리에 마오의 초상화를 걸었다.
혁명 지도자의 권위가 이들에게 “역사의 필연”이라는 면죄부를 얻었으니 비판이 곧 역사 자체에 대한 반역이 됐다. 결국 왕이 사라진 자리에 국가주석이 앉았고, 귀족 대신 “정통 노선”이 귀족 노릇을 했다. 계급투쟁을 외치던 사람들이 가장 단단한 계급 구조를 재건한 아이러니. 봉건을 부순다고 소리치며, 봉건의 최상단에는 손도 대지 못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장면은 블랙코미디다.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먼저 튀어나오는 종류. 권력이 얼마나 쉽게 서사를 자기 마음대로 가져다 붙이는지를 드러내는 가장 잔혹한 농담이다.
부모를 죽음으로 내몰고 고개 돌려 마오에게 용서를 구하는 장면은 도덕이 완전히 외주화된 상태를 보여준다. 죄의 기준이 양심이나 관계에 있지 않고, 권력이 허락한 방향에만 있는 세계다. 잘못한 상대가 이웃인지, 부모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누구에게 사과해야 내 마음이 편안한가”다. 그 대상이 마오였을 뿐이다. 부모보다도 국가 주석이 더욱 가까웠다.
그리고, 그 마오는 다름이 아니라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참새 잡게 만들고, 뒷마당 용광로에 쇳덩이 던지게 해서 밤잠도 못 자게 하고, 농사 망쳐서 굶어죽게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자기 인생을 망가뜨린 사람에게 도덕적 판결권을 넘겨준 셈이다. 이건 충성도 아니고 신념도 아니다. 피해자는 부모인데, 용서는 주석에게 구한다. 고통의 원인은 위에 있는데, 분노는 아래로 향한다. 자기 삶을 파괴한 권력은 숭배하고, 자기 삶을 만든 부모는 제거한다. 그래서 혁명이라는 이름이 이토록 괴상하게 들린다.
이쯤 되면 개인의 잔혹함을 넘어서 구조의 문제다. 그런 선택을 한 개인은 비판받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 선택 말고는 살아남을 언어를 주지 않은 체제도 같이 봐야 한다. 마오는 신이 됐고, 신 앞에서 부모도 인간도 다함께 제물로 바쳐졌다.
화궈펑 이후, 다시 복권한 덩샤오핑은 권력의 실세가 된다. 화궈펑은 새로운 행정부를 신임하고 그들과 노선도 비슷했다만 그는 "마오가 한 것은 모두 옳다"라는 노선을 고수하며 당 내의 마오파까지 끌어안으려는 전략을 펼쳤다. 이 전략은 문화대혁명이라면 이를 갈던 군 간부들의 큰 반발을 사서, 그는 곧 권력의 변두리로 물러났고 군부의 신임을 얻던 덩샤오핑이 끝내 권력의 정점이 된다.
문화대혁명 당시 덩샤오핑은 이념에 미친 군중의 광기가 국가와 개인을 얼마나 쉽게 파괴하는지 직접 겪었다. 권력투쟁에 휘말려 실각했고, 그의 아들이 홍위병들의 고문을 이겨내지 못해 건물 밖으로 뛰어내려 하반신이 마비되는 모습을 봤다. 홍위병의 폭력과 이념적 순수성 경쟁이 사회 전체를 마비시키는 장면을 눈앞에서 봤다. 이 경험은 그에게 한 가지 확신을 남겼다. 이념이 밥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유명한 말로 사회주의의 형식보다 성과를 중시했다.
덩의 중국은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라고 선언했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시장 메커니즘을 대폭 도입했다. 계획경제의 경직성을 완화하고, 농촌에는 인민공사를 해체한 뒤 가구 책임제를 도입해 농민 개인의 생산
의욕을 자극했다. 1962년 대약진운동의 종료 이후 류사오치가 채택한 그것이다.
또한 그는 점진적 개혁을 택했다. 소련식 급진 개혁이나 대약진운동 식 일괄 동원은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정책을 낼 때 특정 지역부터 실험하고 성공하면 전국으로 확대하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가 경제특구다. 선전, 주하이 같은 지역에서 외자 유치와 수출 중심 산업을 허용해 자본주의적 요소를 시험했고, 이는 중국 전체 성장의 엔진이 되었다.
수출 중심 산업을 통해 서구 세계를 경험하게 된 중국인들은 서구의 정치적 자유를 보며 권력에 대한 투명성, 개혁을 요구했다. 그렇게, 백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모였다.
그러나, 문화 대혁명으로 성난 군중들이 얼마든지 자신을 끌어내릴 수 있음을 확인한 덩샤오핑은 그들을 홍위병 시즌 2 정도로 생각했다. 덩샤오핑의 시민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은 결국 천안문 광장을 빨갛게 물들였다.
3부, 천안문 사건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