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츠를 추는 동안

우리 사이의 아름다운 공간

by Goodmorning

Waltz는 ‘선회하다’라는 뜻의 독일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 쇼팽, 요한슈트라우스 등 우리가 익히알고 있는 유명한 작곡가의 왈츠 곡들과 더불어19세기부터 아름답고 우아한 실내 춤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 때 춤을 배우고 싶어 댄스 학원을 알아보다가 지독한 몸치임을 자각하고 춤은 그만두었지만 왈츠의 ‘선회하다’라는 어원은 깊은 울림으로 남았다.

선회하다!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춤은 둘의 동작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이 있기에 선회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의 여부가 각자의 부드러운 동작 연출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공간의 존재는 둘이 만들어 내는 동작이 춤이 되며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후광 역할을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도 아름다운 공간이 필요한 것처럼.


백인백색이라는 말이 있듯 인간은 자신만의 오롯한 문화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그럼에도 타인과의 교류 없이 삶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다. 각자의 작은 우주에서 살고 있지만 타인과 관계를 맺어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관계의 다리를 놓는 여정 또한 쉽지 않고 지난한 노력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사회적 활동 없인 생존이 불가능한 인간의 특성상 그런 힘든 과정을 통해 배려와 수용, 절제의 방법을 터득해 건강한 관계를 구축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선 넘었다’라는 표현은 그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성향은 너무나 다양해 일일이 예를 들 수는 없지만 배려형 인간과 건조형 인간에 대해서만 짚어 보겠다. 이 또한 그러한 성향의 편향성으로만 봐야 할 듯하다.


배려가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관계의 깊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정 많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많이 듣지만 때론 이용당하기 쉽고 그로 인해 상처투성이가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또는 나의 배려를 받는 사람들은 즐겁고 행복해할 것이라는 확신의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원하지 않는 배려에 감사함을 표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반면에 무심하고 조금은 둔한 성품의 사람들은 타인의 배려나 정성을 민감하게 느끼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상대에게 상처를 남기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또한 만남과 교류에 있어서 자신에 대한 노출도 꺼리고 타인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도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배려나 주고받음에 피로감을 느끼고 적당히 깊지 않은 관계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사실 현대사회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늘고 있는 추세이기도 하다.


이타적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언제든 선을 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쪽이 바람직하다거나 그렇지 않다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배려는 때로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반면에 상대의 배려에 무심함으로 일관하는 것 또한 그저 무례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


왈츠가 두 사람이 함께 추는 춤인 것처럼 관계 또한 두 사람이 함께 맺어가는 것이다. 발을 밟거나 밟히지 않게 세심하게 몸으로 소통하며 추어야 하는 댄스처럼 오랜 연습이 필요하다. 습득된 동작이 의식하지 않고도 아름다운 선을 그려낼 수 있을 때까지 지난한 과정도 겪어내야 한다. 관계에 있어 이런 과정은 상대가 불편해하는 것을 세심하게 살펴보고 내 동작의 완급을 조절하는 반복된 깨우침과 실행의 시간과 같다.


또한, 나의 배려가 지나치지 않도록 절제하고, 상대의 배려에 감사를 표하며 서로의 주고받음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아름답고 적당한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확보된 공간은 비로소 관계를 빛나게 하는 후광 역할을 할 것이다.

공간을 유지하며 환상적인 춤을 완성해 내는 왈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