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리지앵
코코 샤넬의 옷들은 도대체 누가 입어야 잘 어울리는 거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저 옷을 잘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를 비롯한 내 주변인들만을 표본으로 삼은 지극히 편협하고 무지한 생각이었다.
샤넬은 역시 자국민의 체형에 맞는 옷을 디자인한 것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으나 빠리지앵들은 얼굴이 작고, 체형이 가늘고 길었다. 추운 날씨 탓에 대부분 비니와 목도리를 두르고 긴 코트를 입은 사람이 많았다.
비니가 참 소화하기 어려운 패션템이라 나도 여러 번 도전했다가 골무 낀 것 같다는 평판에 포기했었는데 그 비니가 그들의 머리엔 헐렁하게 얹어져 있다.
가늘고 긴 체형에 걸친 롱코트는 왜 그리 멋스러운지.
그 코트 아래로 살짝 보이는 스키니 바지와 앵클부츠를 신은 모습은 전체적인 색감의 조화와 멋스러움이 남달랐다.
톤온톤의 세련된 코디도, 비비드 한 색상의 포인트도 멋들어지게 소화하고 있었다.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박물관과 미술관을 끼고 성장하는 그들의 색상 활용과 조합은 감각적이었다.
겨울여행이라 짐을 줄이기 위한 궁리 끝에 꾹꾹 누르면 부피가 줄어드는 패딩만 두 개 가져갔다. 더구나 두 개의 패딩 중 하나는 얇아서 거의 입지 못 하고 하나만 가지고 매일 입었다. 그런 내 모습이 비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시점은 도착 3일 째부터였다. 빠리지앵의 모습과 비교하며.
남편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나만이라도... 이 비루함을 벗어나야지!
박물관 일정을 소화하면서 틈틈이 옷 가게에 들러 키작녀에게는 안 어울린다는 남편의 구박을 무시하고 롱코트를 계속 찾기 시작했다.
고르고 입어보기를 반복해도 빠리지앵의 옷 태를 따라갈 수 없다.
슬프다!
수많은 옷가게를 둘러보고 드디어 하나 건졌다. 그나마 어울리는 롱코트를.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거구나.
하지만 다음 날부터 눈, 비가 내려 감히 새 코트를 적시고 싶진 않았고, 여행 마지막날까지 꼬질 해진 패딩 입은 사진으로 마무리했다.
결국 사진만 남는데 아쉽기 그지없다.
비루하고 꼬질한 행색에 거의 도보 행진에 가까운 관광 일정을 소화하느라 노천카페에서 느긋하게 커피도 한 잔 못했다.
SNS에서는 쎄느 강변에서 와인 한 잔 꼭 하라고 추천하던데 나는 와인샵 안쪽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하몽과 치즈로 와인을 마시고 싶었다. TV에서 보고 파리 가면 해보고 싶었던 로망이었다.
와인샵은 들어가 보지도 못했고, 슈퍼에서 산 와인은 둘이서 반도 못 마시고 버리고 왔다.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있었으나 호텔만 돌아오면 침대에 누워 바로 곯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매일 2만보를 걸으며 에너지를 바닥까지 끌어 쓴 우리는 호텔만 돌아오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체력 고갈의 상태로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낭만 따위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럼에도 여행을 마무리하고 집에 오자 두 다리는 고생했지만 거리 곳곳을 더듬고 다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두 다리가 파리의 곳곳을 기억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초록이 푸른 계절에 다시 한번 더 가고 싶다. 그땐 관광이 아닌 느긋한 여유로 파리를 다시 느끼고 싶다.
옷도 좀 많이 가져가서...
멋진 모습으로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 마시고 와인샵에서 와인도 마시며 파리의 정서를 즐기고 싶다.
요즈음 나는 한국에서 빠리지앵 흉내를 내고 있다. 파리에서 사 온 코트를 입고 스키니 바지에 부츠를 신고 다닌다.
(어쩌면 마음은 아직 파리에서 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 머릿속으로 그린 모습과 구현된 현실은 아마도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남편의 눈빛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다.
첫날부터 날 못 자게 했던 그림은 체크아웃하는 날 호텔 매니저를 붙들고 기어코 물어봤다.
"이 그림 방에 있던데... 기분이 별로 안 좋았습니다."
"오우, 왜죠? 이건 그냥 아트예요."
그럴 줄 알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