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밥풀 Apr 02. 2022

정체성의 경쟁력

탈대량과 일자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 

예수의 정체성 물음에 베드로는 이 명쾌한 답변으로 일약 열두 제자의 수석 자리를 보장받는다.


선거 때마다 돌리는 명함 전단지 뒷면을 보면 빼곡하다. 하지만 그럴듯하게 내세울 만한 경력은 별반 눈에 띄지 않는다. 광역 단체장에서 지자체로 내려갈수록 더 심하다. 


 친인척이나 지인들로부터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간혹 당혹스럽다. 

특히 IT나 네트워크 분야 종사자들은 대략 난감하다. 대기업쯤 되면 회사 이름으로 넘어가겠는데 그렇지 못할 땐 대충 얼버무린다. 하지만 별 문제가 되질 않는다. 묻는 상대방도 자세히 알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결국 특별한 관계나 이유가 아닌 다음에야 상대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모호한 채 서로의 관계를 유지한다.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이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은 결코 내 관심 영역에 들어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상대방에겐 불특정 다수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만나서 그의 이름이나 연락처를 받은 다음 전화나 연락처에 기록할 때 번호와 이름뿐 아니라 그의 직장, 직위 심지어 만나서 나눈 대화 내용이나 장소까지 메모하는가? 

그렇다면 그의 아이덴티티(정체성)는 내게 매우 명확하고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몇 명에게 그런 사람인가?

스마트 폰 없이는 한 줌의 전화번호도 외울 수 없는 세상이다. 필요할 땐 언제든 목록에 있어 마치 정보를 검색하듯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중 속 깊은 말을 나누거나 아쉬운 부탁을 하거나 꼭 필요한 자문을 구하거나 사적인 고민을 털어놓을 친구가 몇이나 될까? 

바빠서도 많아서도 아니다.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스턴트 시대다. 필요한 정보는 그때그때 찾아보면 그만이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그렇지 않다. 

외로움이 늘어나는 이유도 갈등과 분노의 골이 깊어지는 까닭도 모호한 정체성에 의한 느슨한 관계 때문이다. 

이걸 조이기 위한 노력이 지난 20년 가까이 몰아친 인문학 운동 열풍이다. 일군의 인문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촉발된 인문학 위기 담론은 그사이 증폭된 온갖 사회 인문학적 문제들의 증가 추세로 미루어 볼 때 인문학의 홀대로 인한 밥그릇 싸움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그렇게 스러져 가던 인문학이 코비드 19이라는 팬더믹과 4차 산업혁명이 몰고 온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다. 

인문학의 위기로 표현된 문제의 핵심은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사이에서 불특정 다수에 묶여 있던 집단주의적 사고 때문이다. 

우리의 학연, 혈연, 지연은 산업사회가 지향해 온 성별, 연령별, 소득별, 계층별, 학력별 등등의 집단적 구분 속에 묻혀진 것이다. 바야흐로 탈대량화, 개인화 시대다. 개인의 개성이 사회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의상과 자동차, 주거지 등에 의한 외형적 구분을 넘어서 이제 각자의 생각, 가치관, 기호, 신념 등으로 상징되는 내재화된 정체성이 표출되어야 할 때다.


“아이덴티티 경제학(메커로프, 크렌턴, 2010)”, “나는 나답게 살기로 했다(손 힘찬, 2021).”,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양창순, 2016)”, ”나는 그냥 꼰대로 살기로 했다(임영균, 2020)” 이런 책들이 팔리는 이유는 결국 정체성의 회복을 위한 자기 선언인 셈이다. 

취업이든 전업이든 창업이든 이제 사회생활의 경쟁력은 자기 정체성이다.

작가의 이전글 일과 배움과 놀이의 융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