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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May 15. 2017

두 결혼식

사월. 


아사가야에 봄꽃이 피어나고 있다. 목련, 왕벚나무, 그리고 산벚나무. 차례로 피었어야 할 봄 꽃들은 단번에 피어오르고는 이내 모두 함께 흩어지는 중이다. 이 봄이라는 계절. 해를 거듭할수록 점차로 짧아지고 있다는 인상이 드는 것은 한국에서나 이곳에서나 같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단지 내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시간을 포함한 외계를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점차로 둔해지기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봄은 확실히, 앞선 겨울과 뒤따라오는 여름에 조금씩 잠식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항할 만한 방법 따위 내게는 전혀 없다. 매일 산책 루트를 조금씩 연장시키며 남은 봄볕을 한 줌이라도 더 붙잡으려 노력할 뿐이다. 도쿄에서 맞는 봄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학부 때 과사람들과 의기투합하여 소규모의 영화를 하나 만들어낸 적이 있다. 감독, 연출, 촬영, 편집, 주연 할 것 없이 영화에 필요한 모든 역할을 떠맡고(학생 신분으로 스스로 기획한 일이었으니 달리 방도는 없었을 것이지만) 시나리오로 쓰일 자작 소설까지 만들어 냈었던 한 선배의 이끌림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애초에 별다른 의욕도 흥미도 가지지 않은 데다 당시 오른손에 화상을 입어 붕대를 칭칭 감고 있어 도저히 출연할 상황이 아니었던 나 같은 후배들조차 타고난 섭외의 재능으로 포획해서 여름 두 달 동안 죽도록 고생시켰던 사람. 그가 이번 봄 식을 올린다. 결혼이 정해진 것은 몇 달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며칠 전 그에게서 받은 짤막한 문자는 정말 그 다운 부탁이 아닐 수 없었다.


'축하하러 못 오는 상황인 건 알아. 대신 핸드폰으로라도 영상 하나 찍어서 보내도록. 식중에 상영한다.'


한국 국적을 가졌지만 일본에서 자란 터라 반쯤은 국제결혼이 될 그의 예식이기에 양국 어느 쪽에서 식을 올리든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생기리라는 것은 뻔한 일. 그러나 그러한 불참자들을 다른 방식으로라도 전부 참여하게 만드는 능력은 과연 그답다고 해야 할까. 잘은 몰라도 그의 연락을 받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불참자들은 흔쾌히, 그리고 상당 부분 신이 난 채로 영상편지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을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가지고 있는 옷들 중 가장 포멀하고 깨끗한 셔츠를 꺼내고, 특별한 파티가 있을까 챙겨 온 보타이를 매고, Y군에게 빌린 몇 가지 화장품으로 얼굴도 정돈한 뒤 카메라 앞에 섰다. 삼 분짜리 영상을 하나 겨우 만들어 내는 데에는 한나절이나 걸렸다.

 


이곳 도쿄에서도 또 하나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다. 사토코와 에이지의 결혼식이다. 우연히도 앞선 것과 같이, 이 결혼식 역시 반쯤은 국제결혼이다. 일본인 사토코와, 일본계 브라질인 에이지의 결혼. 두 사람 다 할 말 많고 한도 많은 청년 시절을 버티어내고 기적처럼 서로를 만나 결혼까지 도달한 터라 주변 모두가 진심으로 축복하고 또 감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늘 이벤트에 목말라 있는 Y군이 이번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아마 이 봄날의 예식은 감동적인 한 장면으로 남기도 전에 Y군의 놀이터가 될 운명일 것이다. 



하라주쿠의 작은 이벤트 홀을 빌려 식은 진행되었다. 미국에서, 브라질에서, 일본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이만큼 다양해고 특별한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열리는 파티라니. 나도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이런 식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소박한 한 편 반짝반짝 빛나는 식이었다. 정해진 격식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피로연 같은. 그런 스몰 웨딩.



신부는 언제나 그렇듯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나이나 타고난 외모와는 관계없이. 사람들의 축복 가운데에서 늘 행복하길. 사토 쨩, 에이지군.



아무리 친하다지만 친구 결혼식에 드랙 퀸 복장으로 나타나는 Y군에게도 사토코같이 건전하고 차분한 친구가 늘 곁에 있어줘야 할 것이다. Y군과 그의 친구들의 한바탕 쇼가 끝날 때까지 식장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식은 에이지가 준비한 사토코와의 추억 영상을 상연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진 토닉 몇 잔으로 이미 취해버린 나와, 하-쨩과, Y군은 같이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둘은 먼저 집에 돌아가겠어? 난 흥이 덜 풀려서 니초메에 들러야겠는데."


"모처럼이니 나도 데려가 줄래? 한 잔 더 하고 싶기도 하고. 하-쨩도 같이 가자."


따로 떨어지려는 Y군에게 왜 그런 나답지 않은 말을 꺼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도쿄에 와서 짧은 기간 동안 있었던 미묘하지만, 마음을 긁어놓은 사건들을, 이제 얼마 안 있어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면 필시 영원히 풀어낼 수 없을 마음의 응어리가 될 사건들을, 그런 것들을 오늘 같은 날 한껏 오른 흥을 빌려 떨쳐버리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에이지의 영상을 보며 가만히 눈물이 차오르던 Y군을 목격했을 때, 그의 인생에 저런 종류의 행복은 찾아오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로 친구들과 한 잔 더 하고 싶었던 것 뿐일 수도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오늘은 신주쿠에 가서 오늘을 함께한, 도쿄에서 함께한 모든 친구들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 


도쿄에서 맞는 봄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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