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시작은 바이엘
바이엘로 첫걸음을 떼고 체르니 100으로 진입하는 정형화된 한국의 피아노 교습 커리큘럼은 여타 다른 구시대의 한국 교육 과정이 그런 것처럼 그 뿌리는 일본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바이엘이 갖고 있는 피아노 입문서의 바이블이라는 입지는 그다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한국과 일본에서도 80년대 이후로는 서서히 바이엘의 한계를 깨닫고 알프레드, 베스틴 등등 다른 대체할만한 교재가 다수 도입되었고, 나름 성공적으로 새로운 어린 피아니스트들을 길러내 왔다고 본다.
바이엘은 처음 출간된 지 150년이 넘은 교재이기에 초기 고전시대 피아노의 그야말로 '고전적인' 손가락 주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106곡의 연습곡을 마칠 때까지 전부 이러한 '한정된 범위의 손가락 움직임' 위주의 연습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구성은 화려한 멜로디와 감정을 가득 실은 퍼포먼스가 두드러지는 낭만파 음악이 대세인 모던 피아노를 접하고 자란 현세대의 학생들에게는 아무래도 지루하다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고, 아무런 제목도 부연설명도 없이 100곡이 넘게 나열되어있기만 한 투박한 구성 덕택에 안 그래도 의욕을 가지기 쉽지 않은 피아노 초보자에게서 더욱 흥미를 빼앗아가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바이엘의 단점을 따져보자면 이밖에도 많다. 검은건반 연주가 교재 후반부에나 이루어진다는 점, 조성이 몇 가지로 한정되어 등장한다는 점, 곡마다 비슷비슷한 주법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점, 늘상 왼손 반주+오른손 멜로디 위주의 연습에 치우쳐 있다는 점 등등.
이렇듯 많은 단점을 가진 교재인 바이엘. 그렇다면 나는 첫 교재로 바이엘을 배제해야 하는 것일까.
대안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특히 유튜브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된 '메토드 로즈'라는 프랑스에서 20세기에 출간된 교재가 내 눈길을 끌었고, 직접 구매해서 살펴보기도 했다. 과연 바이엘과는 다르게 초보자를 고려하여 도입부는 악보의 악상을 모두 배제하고 오로지 음만 따라 치게끔 구성되어 있었으며, 양손의 고른 분배와 함께 초반부터 사장조가 다장조와 함께 등장한다는 점, 검은건반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점, 그리고 유명한 민요나 가곡 등에서 모티프를 따 와 생 초보용 연습곡임에도 음악적으로 상당히 아름답다는 점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내가 평생 피아노를 쳐본 일이라곤 어렸을 때 딱 1년도 안 되는 기간이 전부다. 그마저도 지금은 악보에서 어디가 미였고 어디가 솔인지 헷갈릴 정도로 대부분 까먹은 상태. 그럼에도, 머릿속에서 자꾸 떠오르는 소리가 있다.
도레도레도.
내 또래 피아노를 배웠을 모든 이들이 제일 처음에 경험했고, 첫인상이기에 너무나도 강렬하게 각인되어있는 그 단조로운 멜로디. 이 도레도레도를 잘 칠 수 있으면 세상 모든 곡을 칠 수 있다고 누군가 말했을 정도로 유명한 프레이즈. 피아노를 다시 배운다면 역시 바이엘로 돌아가는 것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한계가 있고, 단조롭고, 손가락 움직임 위주의 연습이면 어떤가. (피아노란 결국 손가락으로 치는 악기인데!) 게다가 난 이미 성인이기에 바이엘이 제시하는 이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그 단조롭다는 멜로디도 잘 쳐내기까지 분명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아예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교재로 모험을 하기보다 이미 한 번 겪어봤던 것을(비록 지금은 전부 잊혔다 해도) 다시 선택하는 것이 나와 같은 보통의 어른의 타협점 아닐까.
억지로 이유를 더 붙이자면, 비록 한국과 일본 한정일지언정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온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구관이 반드시 명관은 아닐 테지만, 한정된 영역에서는 아직 통용되는 이야기일 것이라 믿는다.
이성적인 판단은 부족할지 몰라도, 어쨌든 시작은 바이엘로. 그렇게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