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서른네 살이 되던 해 가을, 태어나서 처음 디지털 피아노를 샀다.
별다른 기능이 없고 스피커도 딱 두 개뿐인, 입문용으로도 썩 훌륭한 모델은 아니었지만, 콘솔 형태를 갖추고 건반만큼은 중급 이상이어야 한다는 내 기준을 간신히 만족하는, 나름 심사숙고 끝에 고른 선택이었다.
디지털 피아노를 구입한 건 반쯤은 충동에 가까운 행위였지만, 그 충동을 이끈 원인은 분명히 있었다. 몇 달 전, 지인의 권유로 따라나섰던 친목 모임에서 만난 한 친구가 그 계기였다.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지금은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소개한 그 친구는, 졸업 후에 다른 노선을 탔음에도 꾸준히 연주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드문 케이스였다(이유는 몰라도 남자인 경우에 더 드문 것 같다). 몇 년 전부터는 대학 동기와 함께 포핸즈 연주회를 비정기적으로 열고 있다는 이야기다.
주변에 음악을 전공한 친구는 몇몇 있었지만, 어쩌면 제일 흔할지도 모를 피아노 전공자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어서였을까, 난 약간 호기심이 생겼다.
흥미는 있더라도 음악에 관해 사실상 문외한인 나. 그래도 피아노가 주제라면 적어도 몇 마디 나눌 정도의 지식은 있었다. 술자리에서 으레 그렇듯 과장되고 의미심장한(그러나 속은 텅 빈) 말들을 흘려대자, 그는 내게 ‘정체가 뭐냐’라는 반응을 보였고, 곧 대화에 불이 붙었다. 모임이 끝날 무렵 그는 곧 있을 연주회에 나와 친구를 초대했고, 그 연주회를 계기로 내 안의 피아노에 대한 묵은 갈망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난 음악에 관해 별다른 배경도, 실력도 가진 게 없다. 피아노에 관한 기억도 초등학교 1~2학년 시절 약 1년간 동네 학원을 다닌 게 전부다. 그마저도 마지막은 안 좋은 기억만 가득.
당시 매우 엄격했던 학원 선생님을 무서워했던 나는 어느 날 필기구를 챙겨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크게 혼났고, 얼이 빠질 만큼 주눅이 든 난 그다음 수업부터 학원을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른’에 대한 의미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던 그 시대, 감히 선생님과 부모님을 속이고 학원을 빼먹었다는 사실은 나에겐 부담 그 이상의 것이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전화 벨소리 하나에도 덜컥덜컥 겁을 내던 나를 수상하게 여기던 어머니에게 머지않아 들통이 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국 상의 끝에 피아노 학원을 관두기로 했고, 그 사건 이후로는 피아노를 거의 쳐다도 보지 않게 된 것 같다.
하지만 트라우마란 건 세월이 지나면서 저절로 옅어지기도 하는 법. 고등학생 땐 학교 음악실에 몰래 들어가 그랜드피아노를 만져보기도 했고, 늘 문이 열려있던 동네 교회에 놓인 피아노로 좋아하는 곡을 쳐보려 애쓴 적도 있다. 물론 그 모든 시도는 그저 ‘시도’로 그쳤지만, 그래도 내 안에는 피아노에 대한 어떤 ‘갈망’이 남아있었던 게 아니었나 생각한다.
서른넷의 가을, 나는 오래 하던 일을 관두고 새 집으로 이사한 참이었다. 새로운 일상을 맞이하며 새 방에 들인, 내가 직접 고른 피아노는 그 존재만으로도 큰 만족을 주었고, 그 만족감은 일종의 고양감이 되어 혼자서도 충분히 이 악기를 숙달할 수 있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착각으로 날 이끌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그 착각도 나름의 원동력이 되기는 했다. 처음 몇 달간은 거의 매일 피아노와 마주하며 연습에 매진했으니까. 방향성도 디테일도 없다시피 한 연습이었지만, 초심자 특유의 빠른 향상 덕분에 제법 재미도 느꼈고 말이다.
그렇게 옛 기억을 더듬어가며 왼손 오른손 건반을 더듬는 사이, 나는 어릴 적 놓쳐버린 무언가를 조금씩 되찾는 기분이었다…
라고 맺으면 그야말로 아름다운 프롤로그가 되겠지만, 현실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은 법이다.
건반은 옛날 그대로였지만, 나는 변해 있었으니까. 일고여덟 살 무렵처럼 손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않았고, 악보를 읽는 눈은 그보다도 더 굼떴다.
무엇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쉽지는 않겠네. 학원을 다닌다거나 개인 레슨을 받는다는 선택지도 있겠지... 그래도, 일단은 혼자서 해 보고 싶다. 먼저 ‘교재’로 뭘 쓸지부터 고민해 볼까.
처음으로 피아노 독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