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꾸미는 작은 기쁨들
내가 낳았지만,
나의 첫째는 언제나 상황을 즐겁게 만드는 아이였다.
며칠 사이 컨디션이 좋지 않아
내 어깨가 축 늘어졌을 때,
딸은 이를 감지하고 삐뚤빼뚤 네일 아트를 해주었다.
그러면서 작은 상황극을 펼쳤다.
“안녕하세요, 고객님~요즘은 크리스마스니까 블라블라”
그 장난스러운 말투 덕분에 나는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어젯밤에도 기분이 가라앉아 있던 나에게
딸은 마사지사를 자처했다.
딸이 시험기간이고 하면
별거는 아니고
얼굴에 팩을 붙여 주고 하면서
오늘의 마사지 시간!!
그렇게 밤 시간을 채우곤 했는데
그걸 기억했나 보다.
하지만
이 아이는
마사지 샵에서 나올만한 음악을 틀고,
초를 켜고,
마사지 샾에 간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싸와티깝~ "
어디선가 태국 풍의 옷을 입고 옆에서 또 상황극을 한다.
물론 나는 금세 잠에 빠져 그 이후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딸이 인생을 아름답게 꾸밀 줄 아는 아이임을 다시금 느꼈다.
나도 한때는 그랬다.
같은 일을 해도 남다르게,
특별하게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행위 그 자체보다 결과에만 의미를 두는 사람이 되어버린 듯하다.
더 재미있게 살 수 있는데..
이르게 출근을 하고, 책을 읽고 있는데 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바빠? 나 드림받을 게 있는데 같이 갈 수 있어?”
마침 아직 출근 시간이 아니어서
나는 흔쾌히 “응, 엄마가 옮겨 줄게”라고 답했다.
딸은 “그럼 내가 학원 쪽으로 걸어갈게”라 했고, 나는 바로 “아냐, 엄마가 픽업할게”라 했다.
그러나 그 뒤로 연락이 끊겼다.
전화도, 메시지도 닿지 않았다.
열 번쯤 전화를 걸었을까, 마침내 딸이 받았다.
“어디야?”
“엄마, 학원 앞.”
“시에나, 전화를 좀 받아야지. 네가 부탁을 했으면 전화든 메시지든 소통이 되어야지.”
“미안해…”
그때 내가 짜증이 났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미 집 앞에 다 와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이가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일까.
결국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짜증이었다.
딸을 태우고 드림을 받으러 가는데, 딸이 말했다.
“아, 엄마! 그 아파트 아니야!”
완전히 반대 방향의 아파트라고 나에게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차를 돌리려는 순간
끼어들기도 애매하고 차를 많이 가서 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다시 짜증이 올라왔다.
내가 입을 다물자 딸도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 내가 이제 전화 잘 받을게.”
나는 무심코 “이게 처음은 아니잖아”라고 했지만, 곧 잘못된 표현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딸은
“그러니까 앞으로는 잘한다는 말이지”라며 웃었다.
그래,
차 돌리는 게 무엇이 중요하다고.
전화 좀 안 받아서 여유 있는 시간에 헛걸음하는 게 모 어떻다고
딸은 인생을 즐겁고 아름답게 꾸밀 줄 아는 아이였다.
작은 실수와 엉뚱한 상황마저도 웃음과 배움으로 바꾸는 힘을 가진 아이.
나는 그 곁에서 다시금 생각했다.
인생은 완벽하게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과 불완전함을 함께 맞춰가며 꾸며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일반적으로 우리가 삶을 재밌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커다란 사건이나 특별한 성취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순간들이 모여 삶을 빛나게 한다.
아이의 장난스러운 한마디,
친구의 따뜻한 안부,
길가에 피어난 꽃 한 송이,
바쁜 하루 끝에 마시는 따뜻한 차 한 잔.
이런 소소한 순간들이 마음을 흔들고,
지친 하루를 위로하며,
삶을 다시 살아갈 힘을 준다.
우리는 종종 큰 목표와 성취에만 의미를 두지만,
사실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그 사이사이에 스며 있는 작은 기쁨들이다.
웃음소리,
손길,
눈빛,
그리고 함께 나누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행복을 발견한다.
결국 삶을 아름답게 꾸미는 힘은 특별한 누군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진 일상의 감각 속에 있다.
작은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할 때 비로소 삶은 풍요로워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