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행기가 지나간 길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면 그 궤적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삶은 복잡하지만 분명한 인과관계로 짜여있어서 늘 당신에게 크고 작은 힌트를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투투투투투... 투투투투투....
육중한 헬리콥터의 소리가 지붕 위를 떠나지 않았다. 헬리콥터의 진동이 끊임없이 머리맡의 창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하늘을 가르는 쇳덩이의 소음은 멀리 가는 것 같다가도 이내 돌아와 상공을 맴돌았다. 창가 쪽으로 놓인 녹색의 침대 프레임이 헬리콥터의 서치라이트에 밝은 흰색으로 보였다가 다시 가로등의 노란색으로 물들었다를 반복하기를 두 시간이었다.
나연은 어째서 소음이 계속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에 들기 힘들었다. 물론 임신 12주가 넘어가면서부터 내일이면 36주 0일에 접어들 오늘까지 잠을 잘 자본 적은 없었다. 5개월가량 이어진 불면의 이유는 냄새나 위염, 기침, 간지러움, 소변, 요통, 태동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이날만큼은 불면의 원인이 뱃속이 아닌 외부에 있었다. 오후 11시가 조금 지난 시간, 나연은 뒤척임을 멈추고 휴대폰을 집어 카톡창을 열었다.
[지금 헬리콥터가 너무 이 주변을 오래 도는 것 같지 않아요?] 나연이 물었다.
나연의 말풍선 옆 숫자가 4에서 2로 금방 줄었다.
나랑으로부터 답이 도착했다. 그녀는 나연과 같은 3층의 맞은편 방에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임신 37주 차로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 산모였다.
[나랑: 오 언니도 아직 안잤군여! 저도 깼어요]
수면 모자를 쓴 오리 이모티콘이 나랑의 톡에 올라붙었다.
[무슨 일 났나 봐요... 이 동네가 험하긴 한데...] 나연이 답했다.
[미주: 제가 안 그래도 찾아봤는데 이거 지금 우리 동네 맞죠?]
미주가 로컬 기사 링크를 빠릿하게 보냈다. 미주는 나연의 옆 방에 머무는 피부가 까무잡잡한 임신 38주 차 산모였다.
나연은 링크를 눌러 기사를 확인했다. '리베로대로-21번가 건물 총격 용의자 추적, 주변 도로 출입통제'
나연은 구글지도를 켜고 조리원 주변 거리 숫자를 확인했다. 18, 19... 나연이 지금 묵고 있는 조리원에서 세 블록밖에 떨어지지 않은 건물이 맞았다. 기사는 어떤 상업 건물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했고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용의자는 근처 주택가로 도주해 경찰이 해당 지역의 입주민 출입을 통제 중이라고 했다. 두 시간째 울리던 헬리콥터와 경찰 사이렌 소리가 더욱 시끄럽게 건물 주변을 위협하며 지나갔다.
[맞아요. 이 동네예요] 나연이 답했다.
말풍선 숫자가 1로 줄며 혜원이 거들었다. 혜원은 1층에서 머물고 있는 얌전하고 늘 말투가 조심스러운 산모였다. 혜원도 미주와 마찬가지로 38주 만삭 임산부였다.
[혜원: 세상에 저 지금 기사 봤어요. 지금 총을 든 강도가 근처에 있다는 건가요?]
[지금 이게 무슨 일이죠. 조리원 지금 대문이라도 잠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ㅜㅜ] 나연이 말했다.
나연은 새삼 미국에 돌아온 게 실감이 났다. 한국 사람들이 북한의 미사일 도발을 뉴스로 취급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 자신도 한 때 총기 사고 뉴스에 무디게 반응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17년이 넘는 한국 생활이 지금 그녀의 총에 대한 공포를 생생하게 끌어올렸다. 나연이 가까이서 총을 본 건 열네 살 때였다. 이제 막 미국 보스턴에 발을 디딘 완전한 외국인의 형상으로 당황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였다. 그녀의 어리바리함을 감지한 한 백인 남학생은 교문 근처에서 서성이던 그녀에게 다가가 자신이 신기한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나연의 손목을 낚아챈 그 학생은 자신의 허리춤에 나연의 손을 갖대 댔다. 그의 티셔츠를 뚫고 차갑고 단단한 쇠의 촉감이 느껴졌다. 생소한 촉감이었지만 나연은 그것이 총임을 단박에 알아챘다. 생을 위협하는 무기는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에피소드는 나연이 보스턴에서 보낸 5년이 조금 못 되는 시간 중에 가장 어처구니없는 일 중 하나였지만 그때 느꼈던 공포감은 한동안 총기사고가 터질 때마다 그녀를 바늘처럼 찔러댔다.
이 감각과 함께 총기 뉴스를 접할 때면 늘 나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치가 있었다. 나연이 시니어 하이스쿨 리딩 클래스에서 준비한 과제 속 통계였다. 그녀는 당시 10대 청소년의 자살이슈에 대한 발표를 준비한 적이 있다.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사람은 평균적으로 30대부터는 심장병이나 암 등 병으로 가장 많이 사망한다. 하지만 몸이 건강한 10대부터 20대 중반까지는 화재, 차량추돌 등 예기치 못한 사고가 사망 원인 1위이다. 2위가 자살이다. 미국뿐 아니라 선진국에서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통계겠지만 특이하게도 미국은 사망 원인 3위가 살인이었다. 자살과 비슷한 수준으로 미국의 청소년은 살인으로 인해 다수 사망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해한다는 뜻의 Homocide가 사망 3위에 올라있다는 사실이 어린 나연에게는 사뭇 충격이었다. 나연은 이 통계를 한국에 돌아와서도 미국이 얼마나 위험한지 사람들에게 겁을 줄 때 종종 써먹었다.
총은 미국의 뿌리 깊고 여러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문제였다. 하지만 나연이 체감하고 머리로 인지하는 심각성은 여기까지였다. 미국은 서류상으로는 그녀의 나라일 뿐, 서른 일곱 해 동안 그녀를 키운 건 칠 할이 한국의 뜨겁고 매서운 바람이었다. 나연은 혼란하고 불안한 마음에 휴대폰을 부여잡고 뉴스를 찾아봤다. 카카오톡의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해 뉴스 화면의 상단을 가렸다.
[나랑: 언니, 사장님한테 제가 문단속해달라고 톡 했어요!]
[미주: 아, 사장님 주무시는 건 아닐지 모르겠네요. 내일 저희 아침 일찍 산책 가니까...]
[나랑: 맞다 산책. 거기 산책로 너무 좋은데. 다들 가세요?]
[미주: 네, 아마 지혜언니도 가시는 거 맞으면요. 마리아나도 간다고 했어요]
헬리콥터는 멀어지는 것 같다가도 금방 다시 조리원 근처를 맴돌았다. 아직도 범인을 찾는 모양이었다. 나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도대체 범인은 무슨 생각으로 건물 안에서 총을 쏜 걸까. 다시 카톡. 카톡. 알람이 울렸다. 단톡방 알람은 꺼놓는 편이었지만 함께 이동하는 일이 많아 알람을 켜둔 탓에 산모들의 대화는 불안해하는 나연의 주의를 끌었다.
[나랑: 지혜언니도 아마 갈 거예요. 출산한 지 2주 넘어서 오르막길 걷는 거 괜찮다고 하셨어요.]
[미주: @방지혜 지혜언니?]
[혜원: 지금 주무실 수도 ㅎ]
말풍선 옆 숫자가 모두 없어졌다. 몇십 초가 흐른 뒤 지혜의 톡이 도착했다. 지혜는 나연의 아래층의 2호실에서 머무는 산후 산모였다.
[지혜: 저 방금 수유텀이었어요]
[지혜: 기사 뭐죠? 와 무섭네요. 조리원에 범인이 들어오진 않겠죠?]
[혜원: 밖에서 봤을 때 이곳에 귀중품은 없으니 설마요]
[미주: 여기는 배부른 산모들만 ㅋㅋㅋ]
[나랑: 에, 신생아실에 보물 있죠 지금. 아가들 세명!]
[혜원: ㅎㅎ :)]
[지혜: 그 보물님 지금 모유 20분 먹고 잠드셨네요]
[미주: 오 이 시간까지 수유하다니 멋진 엄마예요]
[지혜: 애기는 진짜 너무 예뻐요~]
[나랑: 엄마는 위대하다ㅎㅎ 아까 수유하느라 마리아나가 오늘 사온 컵케이크 못 드셔보셨죠?]
[미주: 그거 존맛탱! 내일 마리아나한테 물어봐요]
[나랑: 22222]
[나랑: 안 그래도 우버이츠에 찾아봤는데 배달되더라고요. 괜찮으면 다른 것도 같이 주문해요]
나연이 초조하게 총기 뉴스를 더 찾아보느라 바쁜 사이 카톡방의 산모들은 더 이상 상공을 맴도는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아까의 대화주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만난 지 두어 주쯤 지난 임산부와 산모들은 뱃속의 아이나 출산에 대한 이야기, 산부인과 주치의에 대한 가십, 육아용품과 LA 맛집에 대한 이야기로도 하루가 바빴다. 산모들의 해맑은 대화에 나연도 어지러운 밖의 상황이 서서히 단절되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다친 슬프고 시끄러운 밤이었다. 총을 든 범인은 어둠에 숨어들었다. 수 십 명의 경찰이 사이렌 소리와 함께 이 로스앤젤레스 도시 외곽의 허름하고 씁쓸한 주택가로 쏟아져 나왔다. 용의자도 경찰도 짐작 못할 이곳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조리원 건물 한 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도시의 이름의 기원처럼 여인들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깜깜한 지붕 밑에 앉아 고요하게 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 거리 속 조리원 건물의 이방 저 방에서 휴대폰 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나연의 마음에 드리웠던 불안감이 한꺼풀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