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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테 Aug 24. 2024

라벤더 마차

[3] 비행기가 지나간 길

"산책 더 했으면 힘들 뻔했어요." 지혜가 조리원으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맞아요. 딱 좋았어요. 사장님 감사해요." 나랑이 뒷좌석으로 들어가며 인사했다. 

"사장님 저희 아아 하나씩 때리고 들어가면 안 돼요?" 미주가 말했다.

"마리아나 님 깼으면 조리원 계신 분들 거도 하나씩 사서 들어가요." 나연이 덧붙였다. 


한 사장은 평소라면 카페든 식당이든 기꺼이 라이드를 줬겠지만 그날은 어렵다고 했다. 내일 입원할 산모에게 마지막으로 산부인과 외래진료 라이드를 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 사장은 산모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조리원 근처의 스타벅스에 산모들을 내려주기로 했다. 조리원에서 걸음으로 8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차 안에서는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혜원이 물었다. "지금 조리원에 일곱 명인데, 입원하시는 분이 있으시다는 거죠? 조리원에 남는 방이 있어요?"

운전 중인 한 사장을 대신해 미주가 답했다. "마리아나가 모레에 나가니까 그 방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요? 내일 입원하면 모레에 조리원 입소니까." 미주가 휴대폰으로 달력을 보며 말했다. 

"그분이 서울에서 온다는 분이었나요?" 지혜가 물었다.

이번에는 사장 대신 나랑이 답했다. "서울에서 오는 분은 다음 주에 오고, 내일 입원한다는 분은 홍콩에서 왔을 거예요"

"홍콩에서 온 그 언니 사전답사만 세 번 했잖아요!" 미주는 마침 얼마 전 조리원을 둘러보던 여자가 생각났다. 


지난주 미주는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에 식당으로 나갔다가 청록색 원피스를 입은 만삭 입산부를 발견했다. 나연이 미국에 도착하기 전날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니트 셔츠에 면바지를 깔끔하게 입은 남자와 함께 신생아실과 3층 계단으로 올라가 빈 객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여자는 한국인이었고 남자는 말레이시아계로 보였다. 미주와는 눈이 마주치지 않아 인사를 하지 못했다. 남자는 방에 들어가 코너에서 방의 사진이 잘 나오도록 두세 차례 찍었다. 미주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들리는 소리로 짐작컨대 화장실과 수압, 어메너티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십여 분 동안 둘러보던 커플은 건물을 나섰고 밖에서 조리원 사장과 나누는 대화가 웅성웅성 들려왔다. 물을 마시는 미주 뒤에서 이쌤이 미주에게 자초지종을 알려줬다. 이쌤은 조리원에서 산모들의 삼시세끼를 요리하는 아주머니로 산모들은 조리사의 성을 따서 이쌤이라고 불렀다. 이쌤에 따르면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며 오늘 말고도 1주일에 걸쳐 두 번 더 방문해 조리원의 상태를 확인했다는 내용이었다. 지난번 방문에서는 점심시간에 방문해 이쌤이 만든 찬을 접시에 덜어 조금씩 맛보았다고 했다. 사장으로부터 그녀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청록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홍콩에 거주하고 있었다. 2주 전 남편과 두 돌이 지난 첫째 아이, 친정어머니와 가정교사 겸 내니를 데리고 입국했다. 미주가 마주친 남성은 남편이 아닌 함께 홍콩에서부터 함께 입국한 변호사라고 했다. 그녀와 그녀의 동행은 화장실이 5개인 집을 빌려 지내고 있었다. 출산 후에는 산모만 조리원에 입소할 예정이었다. 이쌤은 이번 방문에 시식은 없었으니 음식은 그녀의 기준을 통과한 것 같다고 말하며 입을 가려 웃었다. 


미주는 홍콩에서 오는 산모의 정보를 간략하게 차 안에서 공유했다. 경산모이며 변호사까지 다섯 명을 대동해 미국으로 입국했다는 사실에 차 안에서는 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이는 모르지만 일단 언니라고 불러야겠네요" 나연이 능청스럽게 이야기했다. 

"저도 홍콩 언니랑 친하게 지내야겠어요."나랑이 말했다.

"나이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실제로 언니한테도 언니 맞을 거예요" 미주가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한 사장이 마흔 한살이라고 그녀의 나이를 확인을 해주자 산모들은 더 신이 났다.


차는 곧 스타벅스 매장 앞에 도착했다. 회갈색 오딧세이에서 배부른 임산부가 하나 둘 내렸다. 네 명의 만삭 산모 사이에서 지혜의 몸이 유독 가벼워 보였다. 주차장의 행인들은 한국 여자들을 흘긋 쳐다보고 이내 지나갔다. 현재 근방을 지나는 사람은 토요일 아침에 일을 하러 나온 알바생뿐이라, 오늘은 서로 친구인지 묻거나, 아이를 가진 것은 축복이라는 등의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여자들은 재잘대며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미주는 디카페인 라떼, 지혜는 아메리카노, 나랑은 병에 든 사과주스, 혜원은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나연은 라벤더 마차를 주문했다. 정확히는 라벤더 크림 오트밀 마차로 녹차 라떼 위에 라벤더 크림이 올라간 라떼류의 음료였다. 지혜는 라벤더의 비누 맛이 딱 질색이라고 했지만 나연은 미국에 도착하고부터는 늘 이 메뉴를 주문했다. 한국에서는 잘 접해보지 못하는 은은하게 단 라벤더의 맛과 향이 좋았다. 녹색을 좋아하는 나연에게 라벤더 크림과 마차의 색 조합도 마음에 들었다. 나연은 조리원에서 배정받은 나연의 방에 있는 침대 프레임이 녹색에 테두리는 연두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도 재미있는 우연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길을 가다 예상치 못하게 아는 사람을 만나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요정을 발견한 듯 신이 났는데, 이렇게 작은 일이라도 우연하게 겹치는 일들이 소스라치게 놀랍고 즐거웠다. 


나연은 이른 아침부터 음료를 만들어줘서 고맙다며 점원에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산모들은 각자의 음료를 들고 천천히 조리원 쪽으로 걸어 나갔다. 크게 부푼 배가 좌우로 조금씩 몸이 흔들렸다. 나연은 임산부 사이에서 배가 많이 들어간 지혜 옆에 서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출산 후유증,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 스케줄 등을 이야기했다. 지혜는 아들이 지금 신생아실에서 수유타임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다. 신생아실에는 지혜의 아들을 포함해 3명의 아기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아들이었다. 약 3주 전 태어난 마리아나의 아이인 알렉산드로 최. 알렉스보다 5일 늦게 태어난 지혜의 아이 에이든 킴. 그리고 다음 주 말이면 조리원을 떠나는 중국계 여자 하이윤의 아이 브라이언. 나연은 신생아실을 둘러볼 때 하이윤의 아들의 이름을 보고 의아했다. 배시넷의 인식표에 브라이언이라는 이름 외에 성이 쓰여있지 않았다. 하이윤은 출산을 한 직후였음에도 팔다리가 늘씬하고 탐스러운 상체를 가진 여자였다. 세련된 머리세팅이나 화장법으로 봐서 그녀는 홍콩이든 상해든 중국의 대도시에 생활기반을 둔 여자 같았다. 하이윤은 한국어는 할 줄 모르는 것 같았고 조리원 사장과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영어는 가능해 보였다. 나연은 기회가 되면 말을 걸어보려고 했으나 하이윤은 나연을 포함한 산모들에게 눈길을 잘 주지 않았다. 그녀가 한국인이 운영하는 조리원에 온 것이 특이했지만 사실 조리원 내부에서 더 눈에 띈 것은 가슴이 깊게 파인 실크로 만든 란제리 셋업을 입고 어깨에 숄을 걸친 채 조리원을 돌아다닌 다는 점이었다. 조리원에 나연보다 오래 묵었던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녀는 출산 전에는 식사 시간에 내려와 한국인 산모들과 스몰 토크도 하고 농담에 웃기도 했다. 하지만 출산 이후부터는 점차 히스테릭하게 변했다고 했다. 오늘과 같은 아침 산책은커녕 식사 시간에도 두문불출했다. 무엇보다 하이윤은 브라이언을 보러 신생아실에 잘 내려오지 않는다고 했다. 나연은 산후 우울증 때문인 것일까 궁금했다. 자신도 출산을 하면 모든 게 달라질까 불안했다. 그리고 여유롭게 걸어가는 산모들을 보며 아직 출산하지 않은 혜원, 미주, 나랑 중에 가장 먼저 출산을 할 사람은 누구일지 생각했다. 나연 자신에게는 아직 3주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연을 포함해 네 명의 산모들은 지금 당장 아이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배가 불러있었다. 또다시 공교롭게도 네 명의 산전 산모가 품은 아이의 성별은 모두 딸이었다.


"지혜님 아기 한국 이름은 뭐예요?" 약간의 정적 후 나연이 물었다. 

"윤이요. 외자로 지었어요" 지혜가 답했다.

"이름 예뻐요." 나연이 말했다. "수유는 잘 돼요?"

"잘 안 먹어요. 우리 아들 엄마말 잘 들어야 하는데" 지혜가 한숨을 쉬었다..  

"수유가 어렵죠" 나연이 맞장구쳤다. 

"애가 고집이 있어 보이더라고요, 커서도 말 안 들으면 상속 안 해준다고 할 거예요." 지혜가 웃으며 말했다.

"와, 아무래도 엄마말 잘 들어야겠다 윤이야." 나연이 조리원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색시도 제대로 된 사람으로 데려와야 할 텐데!"지혜가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30년 뒤긴 하겠지만 일어나긴 일어날 일이긴 하네요." 나연이 웃었다.

"남편은 혼자 쿨해서 흑인이랑 이혼녀만 아니면 된다고 얘기해요." 지혜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네에 그러시구나... 여기 흑인들 많이 사는데..." 나연이 당황해서 말끝을 흐렸다.

"뭐, 한국에서 살 건데 좀 그렇잖아요" 지혜가 야무지게 말을 이어갔다.


나연은 대꾸를 할 수 없어 다시 지혜가 질색한다는 라벤더 마차를 권해보며 화제를 돌렸다. 대단히 솔직한 의견일 테지만 한국 밖의 땅에서 인종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털어놓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나연은 지혜가 한국에서만 살아왔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나연 본인이 이혼 경력이 있다는 점은 끝까지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연의 부모님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나연이 이혼한 게 아니라고 늘 말했지만 나연은 이혼한 사실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고 했다. 나연이 스물여덟 살이던 여름 그녀는 8년을 연애한 남자와 식을 올렸다. 결혼식 다음날 발리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녀의 인생이 가장 처참하게 고꾸라지기 시작한 발리에서의 5박 6일이 지나고 나연은 공항에서 곧장 신혼집으로 가서 자신의 짐을 모두 챙겨 친정으로 돌아갔다. 한두 달 정도 신혼집과 친정집, 구 시댁집에서는 막장 드라마에 나올법한 대사와 장면들이 재연됐지만 나연은 그대로 헤어졌다. 때문에 나연은 서류상으로는 미혼이었다. 하지만 일가친척과 직장 동료, 친구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결혼을 약속한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이혼은 이혼이었다. 나연은 인생 9일 차에 상속을 걱정해야 하는 윤이네의 며느리로는 들어갈 수 없는 이혼녀로서 7년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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