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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테 Aug 24. 2024

K-타운

[4] 비행기가 지나간 길

러니언 캐년은 가벼운 산책로였지만 만삭 산모들에게는 꽤나 많은 체력을 요했다. 아침 식사 후에는 모두 방으로 돌아가며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만나기로 했다. 산모들은 점심 시간에 코리아타운을 가기로 약속했다. 멤버는 나연을 비롯해 산전 산모인 미주와 나랑, 혜원이었다. 지혜는 수유 때문에 어렵다고 했다. 나연은 마리아나에게 점심을 함께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남편과의 일정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한다고 거절했다. 나연은 아침 산책에 이어 점심에서도 마리아나와 접점을 찾는 데 실패했다. 방에 돌아온 나연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LA는 아침 8시였고 서울은 오전 12시였다. 세 번의 신호음 뒤에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활기차게 받았지만 남편의 목은 졸음에 잠겨있었다.

"오빠 졸리징. 나는 여기 아침이야" 나연이 말했다.

"알지. 오늘 산책은 잘했어?" 얼굴을 비비는 소리가 들렸다.

"응. 진짜 좋았어. 오빠 오면 우리 여기 같이 산책 가자." 나연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점심은 K타운 가서 냉면 먹기로 했어"

"여보 얼마 전에 거기서 순두부 먹지 않았어?" 나연의 남편은 흠흠하고 웃었다.

"이번엔 갈비도 먹을 거야" 나연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나연은 어릴 적 친척집에 방문하기 위해 LA에 몇 번 와본 적이 있었다. 갈빗집이나 한인마켓에서의 어렴풋한 기억이 전부였다. 17년 만에 방문한 미국의 코리아 타운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신기한 감상이 떠올랐다. 코리아 타운은 한국은 한국이지만 한국은 아니면서 어떤 구석은 한국보다 한국다웠다. 10, 20년 전의 한국이 박제되어 있는 것 같은 간판이나 건물의 외관이 주는 인상의 영향도 있지만 사람들이 주는 느낌이 가장 독특했다. 코리아 타운의 한인들은 한국계 미국인이지만 한국 사람으로서의 자아가 더 강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나연을 만난 한인들은 그녀에게 더 열심히 한국어를 썼다. 하지만 '약국'대신 '파머시'라거나 '신호' 대신 '사인'이라는 등 일상적인 단어 중 영어가 튀어나와 미국인스러운 모습을 어쩔 수 없이 내비쳤다. 한국인들은 잘 쓰지 않는 높은 음의 성조와 제스처도 한몫했다. 갈빗집을 가면 상추와 반찬이 나오고, 메뉴도 한국어로 쓰여있어 한국의 여느 갈빗집과 똑같았지만 고기는 조금 더 달고 양이 두 배는 많았다. 순두부찌개집도 마찬가지로 한국과 똑같은 순두부찌개였지만 더욱 기름지고 매콤했다. 나연은 코리아 타운을 지나가는 길에 엽기 떡볶이집이 영업 중인 것을 발견했다. 한국을 한국답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코리아 타운 구석구석에 녹아 있었다. 그곳은 평행 우주 속의 또 다른 한국 같았다.


나연은 코리아 타운에 대한 감회, 먹고 마시는 이야기, 홍콩에서 올 부자 산모의 이야기, 얼마 전부터 배가 싸르르 아프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로 남편과 한 시간가량 통화를 했다. 한국은 새벽 한 시를 지나고 있었다. 남편에게 졸리냐고 물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렇다는 말 대신 "나도 여보 보고 싶어"라고 이야기했다. 나연의 남편은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대화를 할 때면 십 대 소녀로 돌아가 풋풋한 연애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연은 2년 반 전 늦겨울에 남편을 처음 만났다. 신사동 언덕에 있는 조용한 카페였다. 두 사람 모두 점심과 저녁에 일정이 있다며 오후 세 네시 경으로 미팅 시간을 잡았다. 만나기 전 그녀의 남편은 나연에게 30분 일찍 도착했다며 미리 본인의 커피를 시켜 놓는다고 했다. 그는 본인이 남색 옷을 입고 있다고 했다. 나연도 약속 시간에 늦지 않을 예정이었지만 각자의 음료를 사들고 만나는 소개팅이 되었다는 점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나연은 차라리 이게 깔끔하다고 생각했다. 카페에 도착한 나연은 탄산수를 사들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벽 쪽 테이블에 남색의 맨투맨 니트를 입은 남자가 보였다. 그때의 남편은 지금보다 머리카락이 조금 길었다. 그는 실버 색상의 맥북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일을 하는 중이었다. 무언가 열심히 찾다가 다시 타자를 쳤다. 가지런히 접은 검은색의 헤비 울코트가 옆 의자에 걸쳐있었다. 나연은 사진으로 이미 그의 얼굴을 확인한 상태였지만 실물은 조금 달라 헷갈렸다. 눈앞의 이 남자가 훨씬 부드럽고 멋있다고 생각했다. 나연은 그에게 다가가 그가 김지훈 씨가 맞는지 물었다. 그는 빠르게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그는 키가 컸다. 나연쪽으로 빈 의자를 뺄 때 보인 손톱은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서로에 대해 아무 기대 없이 만난 두 남녀는 그 자리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 시간 동안 이어진 대화는 각자의 저녁 약속 때문에 황급하게 마무리됐다. 다음날 나연은 그로부터 다시 만날 수 있냐는 문자를 받았고 그 둘은 5개월 뒤 결혼식을 올렸다. 


나연과 그녀의 남편이 일하는 업계는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겹치는 영역이 많지 않았다. 나연이 15년 동안 속해있던 PR업계는 장기적인 행사 기획이나 언론사 접촉이 많은 반면 지훈이 일하는 광고업계는 클라이언트 미팅과 매체 관리, 촬영 등의 업무에 집중해 있었다. 그는 소개팅을 하는 날도 현장 답사 후 간단한 리포트를 공유하던 참이라고 했다. 그는 나연과 마찬가지로 그의 일을 좋아했고 본인이 이 일에 경쟁력이 있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업무가 슬로우한 시점에 그녀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나연은 지훈이 다정한 사람인 것을 두 번째 데이트 때 알아챘다. 일을 일찍 마친 지훈은 차를 몰고 나연의 회사로 그녀를 데리러 왔다. 그는 나연에게 날이 추우니 건물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라고 했다. 그동안 나연이 만난 남자친구들이 회사로 픽업을 하러 온 적은 많았다. 그때마다 나연은 늘 그녀의 남자친구가 차를 대기 쉬운 골목을 알려줬다. 혹은 정차하기 쉬운 큰 길가를 맵으로 찍어주고 몇 분을 걸어 나갔다. 항상 그랬다. 반면에 그는 나연이 추울까봐 한두 개 층을 더 내려와 주차장에서 일찍부터 기다리는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진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훈이 바쁘면 나연이, 나연이 바쁘면 지훈이 쓰레기를 버리기나 비품을 채우고, 청소, 빨래 등의 가사를 해결했다. 일 때문에 외부 약속이 많은 나연과 지훈은 공동 캘린더에 서로의 일정을 넣고 서로의 스케줄을 미리 계획할 수 있게 배려했다. 지훈은 인테리어에 관심이 있었고 나연은 정리에 의미를 두고 있었기에 성향에 맞게 역할을 분담했다. 나연이 야근하지 않는 날이면 지훈보다 먼저 도착해 저녁을 만들었다. 자연 임신이 어렵다는 사실을 고지받은 자리에서 나연과 지훈은 한두 마디를 나눈 뒤 시험관 시술을 예약했다. 두 사람 모두 서른 후반의 나이에는 오히려 시험관이 당연한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나연이 반차를 내고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는 날에 지훈은 되도록 미리 퇴근해 같이 저녁을 사 먹었다. 나연이 배에 주사를 놓다 손에 바늘이 찔려 피가 났다고 손을 보여주자 지훈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마데카솔과 일회용 밴드를 찾아와 지혈을 하고 꼼꼼하게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줬다. 지훈은 저녁 약속이 있을 때면 약속 위치를 나연에게 알려줬고 회식 중간에 한번, 집으로 돌아가며 한번 연락을 했다. 주말에 일정이 없는 날이면 교외로 드라이브를 가고 나연이 교회를 가는 아침이면 지훈은 그녀를 보내고 늦잠을 잤다. 나연이 돌아올 때쯤 그녀가 먹고 싶은 메뉴를  미리 배달시켜 기다림 없이 같이 먹었다. 나연의 시부모님은 지훈의 형과 함께 말레이시아에서 한인을 상대하는 음식점을 크게 하고 있었다. 때문에 둘의 결혼식 이후로 시부모님은 만날 수 없었다. 지훈은 자신도 부모님과 서너 해에 한 번씩 만난다고 했고 부모님도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다. 생일이나 명절과 같은 기념일에는 나연의 부모님과, 가끔은 나연의 동생과 한두 시간 식사를 했다. 나연이 입덧으로 김치와 밥냄새를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지훈은 나연이 냉장고의 김치와 모든 반찬을 버리는 것을 도와줬다. 임신 7개월 차 나연이 코로나에 걸렸을 때 지훈은 가습기를 세척하고 열을 식혀줄 패드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며 같이 밤을 지새웠다. 나연이 아이의 직업 선택권을 열어주고 싶다며 미국에서 출산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지훈은 그녀의 건강이 괜찮다면 좋은 생각이라고 동조했다. 둘은 서로 싸울 일이 없었고 언성을 높일 일도 없었다. 나연은 지훈을 만나고 진심으로 행복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지금 남편을 만나고 자신이 세상에서 기쁨을 담당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나연의 친구들은 그녀의 행복에 겨운 이야기들이 당장은 짧은 허니문에 취한 소리에 불과할지라도 이혼이라는 사건으로 나연이 두 동강 세동강으로 부서졌던 것을 기억하는 까닭에 기꺼이 귀 기울여 들어줬다.


나연은 남편에게 잘 자라고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미국에서 보낸 시간이 1주일이 지나자 어색했던 시차는 익숙해졌다. 나연은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이 자는 시간에 활동하는 자신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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