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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테 Aug 24. 2024

도요타 코롤라

[5] 비행기가 지나간 길

냉면은 양이 많았다. 곱빼기가 아닌 평범한 1인분이었는데도 나연은 그릇을 비울 수 없었다. 먹어도 먹어도 불어나서 처음 받았던 양 그대로 인듯한 기분이었다. 네 명의 임산부 모두 더는 먹기 힘들다며 음식을 물렸다. 나연이 임신을 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배가 터지도록 먹어도 배가 나온 것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미주는 H마트를 구경하며 소화를 시키자고 제안했다. 다른 날이라면 나연이 가장 먼저 맞장구쳤겠지만 그녀는 오늘 다른 곳에 볼일이 있다며 임산부 무리와 헤어졌다. 


식사가 파할 때쯤 불러둔 우버가 금방 건물 앞에 도착했다. 쨍한 파란색의 테슬라 모델 Y였다. 나연이 밖에서 우버앱 화면을 보여주자 차는 나연의 앞으로 와 정차했다. 모델 Y의 손잡이가 자동으로 달칵 나왔다. 시트가 하얀색으로 무척 깨끗했다. 나연과 눈인사를 마친 우버 기사는 컵보드에 작은 접시를 올려놓고 견과류를 먹고 있었다. 그는 땅콩 하나를 입에 던져 넣고 느긋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나연은 다운타운의 교회로 향했다. 아시안이 영어로 예배하는 곳을 수소문하다 찾은 곳이었다. 나연은 지난 20여 년간 매주 교회를 가는 습관이 굳어져 건강이나 여행을 이유로 한 두 주를 건너뛰면 매일 감던 머리를 하루 감지 못했을 때처럼 찝찝함과 허전함이 올라와 마음이 힘들었다. 처음 미국에 도착한 첫 일요일은 입국 바로 다음날이라 피곤하기도 했고 적절한 교회를 추천받지 못한 상태라 가지 못했다. 나연은 물론 영어보다 한국어가 편했지만 한국 교회는 다니지 않았다. 나연이 느끼기에 한국의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통용되는 문화, 옷차림, 찬양, 몸짓 등 모든 것은 굉장히 한국적이었다. 한국 안의 어떠한 집단보다 교회가 가장 한국적인 곳이라고 생각했다. 고어(古語)나 언성을 높이는 식의 설교를 유독 참기 힘들었다. 미네소타에서 보낸 유아기와 보스턴에서의 보낸 5년으로 인해 나연 내부에 미국인으로서의 어떤 작은 정체성이 형성된 것 같았다. 때문에 나연은 유독 한국적인 공간에는 동화되고 섞여들지 못했다. LA로 떠나기 전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에 LA의 교회추천을 부탁했고 그녀는 LA에 도착한 지 3일이 지나 이 교회의 이름을 받을 수 있었다. 


땅콩을 먹던 우버 기사는 차를 세웠다. 나연은 여기가 맞다며 차에서 내렸다. 넓은 부지에 검은색 컨테이너로 지은 일층짜리 건물이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스트릿 패션 브랜드의 팝업 매장처럼 보였다. 흑인 여성 경비원이 건물 마당 입구에서 나연에게 목례를 했다. 나연도 가볍게 인사하고 마당 안쪽으로 걸어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 작은 부스에 서있던 안내인이 나연에게 이름을 물었다. 나연은 엠마라고 답했다. 나연은 EMMA라고 쓰인 이름표를 쇄골 쪽에 붙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비스듬한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니 소방법상 4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표시가 되어 있는 커다란 예배당이 나왔다. 그리고 예배당 입구 옆에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 소리로 떠들썩한 홀이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홀을 가득 메운 사람들 중에는 백인이나 흑인, 동아시아계 사람이 종종 보였지만 대부분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그와 그녀들의 이름은 제니, 사라, 데이비드이었으며 얼굴의 생김새는 모두 한국인의 것이었다. 여자들은 크롭탑에 발레아쥬 염색을 하거나 긴 생머리에 가르마를 깊게 타고 검은색 플랫 슈즈를 신고 있었다. 남자들은 탄력 있는 천을 요령 있게 둘러 아기를 안고 있거나, 비니를 쓰고 굵은 테의 안경을 끼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보다 약간씩의 피부 트러블이 더 자주 관찰되는, 전반적으로 태닝이 잘 되어있는 살결이었다. 무엇보다 볼 양옆을 당겨 웃는 미 서부만의 진한 미소가 그들을 LA에 사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확신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나연은 보스턴에서 서부 사람들이 잘 웃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녀가 보스턴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 캐셔가 한 아시안 여자의 주문을 받으며 혹시 서부에서 왔냐고 물었다. 그녀는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어떻게 알았냐고 되물었다. 캐셔는 '네가 너무 미소를 지어서'라고 답했다. 이 홀 안의 사람들은 그 카페의 여자만큼 '너무'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나연은 예배당 입구에 놓인 웰컴 도넛을 집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안내인이 활짝 웃으며 나연에게 접시를 건넸다. 아이는 축복이라며 몇 개월인지 묻는 손동작을 했다. 나연은 오늘로 36주라고 답했다. 나연은 방금 전까지 배가 터지도록 냉면과 갈비를 먹었던 것이 생각나 도넛을 집으려던 손을 빼고 빈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안전한 출산과 아이의 안녕, 절대자로부터 오는 위안과 감사한 마음 등을 묵상했다. 나연이 예배당을 떠날 때까지 도넛 안내인 외에는 나연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고 가는 사람이 많은 규모가 큰 교회이기도 했고 그곳의 사람들도 나연이 여기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녀의 굳어버린 얼굴 근육으로 그들과 같은 미소를 짓는 것은 영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나연은 예배를 마치고 화장실에 들러 소변을 해결했다. 임신 후기로 갈수록 화장실을 찾는 빈도가 늘었다. 그녀는 건물 마당을 나서기 전 배가 다시 한번 싸르르 아팠는데 양이 많았던 냉면을 의심해 봤다. 물을 하루에 한 갤런씩 마시는 것도 문제였겠지만 뱃속의 아이가 커지며 그녀의 위장과 방광을 눌러 소화기관의 크기가 절대적으로 줄어버린 영향이 컸다. 나연은 조리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버를 불렀다. 아까와 같은 깨끗한 차량이 당첨되는 행운을 바라보았다. 3분 뒤 빨간색 도요타 코롤라가 도착한다고 했다. 나연은 휘적휘적 도로변으로 걸어 나갔다. 금방 그녀 앞에 코롤라가 정차했다. 뒷좌석 문짝이 눈에 띄게 움푹 파여있었다. 영어가 서툰 남자 운전기사가 엠마가 맞냐고 물었다. 나연은 인사를 하며 차에 타기 위해 엉덩이를 좌석으로 들이밀었다. 나연의 눈에 회색 패브릭 재질의 시트가 보였다. 시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얼룩이 눈에 띄게 남아있었다. 얼룩보다 더 경악스러웠던 것은 모래였는데 이전 탑승자가 바다에서 모래놀이를 하고 그대로 차에 올라탔거나 건설 작업부가 작업한 워커를 벗어 시트 위에 탈탈 털어놓은 것 같았다. 나연은 멈칫했지만 이내 앉을자리를 손으로 가볍게 털고 벨트를 맸다. 우버 앱이 정확하다면 조리원 도착까지 18분만 견디면 되는 일이었다. 


빨간색 코롤라는 곧 시내길을 빠져나가 하이웨이에 올라탔다. 나연은 다시 한번 아랫배가 싸르르 아팠다. 배에 손을 갖다 댄 나연은 자신이 곧 소변을 누었다는 걸 알게 됐다. 나연은 힘을 주어 막아보려 했으나 다시 한번 소변이 나연의 속옷을 따듯하게 적셨다. 차에서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버 기사는 이미 하이웨이 위의 다른 차들과 속도를 맞춰 시속 120마일로 달리고 있었다. 이내 소변이 그치는 듯해 나연은 안도했다.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소변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연은 최근 들어 밤중에 소변이 한두 방울 새어 나오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소변이 줄줄 샌 적은 처음이었다. 나연은 자신이 더러운 시트를 깔고 앉아있다는 게 사뭇 감사했다. 교회로 갈 때처럼 자동차 시트가 하얀색 가죽이었으면 수백 달러를 물어줘야 할 뻔했다. 양심에 영영 걸릴 사건이 되겠지만 이번 방뇨 사건은 우버 기사에게 자수하지 않으면 시트를 적신 범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비밀에 묻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대로 일어나 가도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시트는 더러웠다. 팁을 후하게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분이 흐른 후 나연의 가랑이가 다시 뜨뜻해졌다. 나연이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 옆팀의 이사가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나연보다 세 살이 많았고 7살 된 딸을 키우고 있었다. 그녀는 나연의 손을 붙잡고 두 번의 유산을 겪었던 이야기, 자연분만을 하다 골반이 부러진 이야기, 오랜 기간 치질과 요실금으로 고생을 한 이야기를 공유했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는 일이 다반사일 거라고 했다. 그리고 임산부를 받아주는 치질병원 리스트를 알려주고 항상 속옷은 흰색으로 입으라는 실용적인 조언으로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나연은 LA에서의 노상방뇨는 역대급으로 존엄성을 해친 수치풀 에피소드가 될 것이라고 되뇌던 찰나 그녀의 가랑이에서 새어 나는 소변이 소변 치고 양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연은 가방을 뒤져 파우치에서 팩트를 꺼냈다. 기사가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나연은 치마를 걷어 올리고 다리사이에 거울을 비췄다. 나연은 선배의 말을 잘 따랐다. 거울 속 나연의 하얀색 속옷이 핑크색으로 물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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