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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테 Aug 24. 2024

비전 프로

[7] 비행기가 지나간 길

아기는 완벽하다. 나연은 자신이 낳은 아이라서가 아니라 모든 '아기'가 공통적으로 완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산을 경험하기 전에는 아기가 그저 크기가 작고 정신이 미성숙한 어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키우고 가르치고 보호해야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대면한 신생아는 모든 것이 완벽한 존재였다. 아기가 턱을 괴거나 팔다리로 취하는 자세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나 법당의 불화 속에 그려진 인물들의 포즈를 연상시켰다. 손가락을 가만히 들어 얼굴에 가볍게 대고 있는 모습은 반가사유상의 것처럼 우아하고 근사했다. 신생아의 느긋한 움직임은 기품이 넘치는 귀부인의 몸짓 같았다. 어디를 응시하는지 예측할 수 없는 둥그렇고 까만 눈동자는 영혼을 관통해 바라보는 것 같은 위엄이 서려있었다. 세상에 그려지고 빚어지고 전해지는 예술적인 경지의 형상과 동작은 모두 아기를 모티프로 삼고 있었다. 


간호사가 들어와 나연에게 물었다. "허니, 곧 아기 카시트 테스트 할 건데 분유 먹였나요?"

"네 방금 먹였어요. 근데 얼마나 걸려요?" 나연이 물었다. 

"한 시간 정도 생각해요. 지금 벌써 11신데 잠이라도 자요. 끝나면 깨워줄게요." 간호사가 말했다. 

"괜찮아요, 저 병동 산책하면서 기다릴게요." 나연이 답했다. 


나연의 아기는 예정일보다 일찍 태어나 2.5 킬로그램을 넘지 못했다. 건강했지만 퇴원을 위해서는 아기가 카시트에 누워있어도 심박수나 호흡에는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나연은 카시트 테스트가 바구니에 아기를 눕혀 놓는 게 전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연의 병실 바로 옆의 간호사 실에서 테스트가 이뤄지는 것 또한 알고 있지만 아기와 떨어질 생각에 불안했다. 나연은 곧 한 시간 동안 이별할 아이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배시넷에 누워있는 아기를 바라보며 예쁘다는 말을 반복했다. '아이가 예쁘다'라는 말이 사실은 사실은 아이를 애틋하게 사랑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나연은 그녀의 아이를 사랑했다. 아기가 완벽한 존재인 이유는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기는 그녀에게 한 없이 곁을 내주고 그녀의 사랑을 끝없이 흡수했다. 다양한 사랑의 표현을 차별 없이 받아들여줬다. 나연은 아이의 이름은 '태리'라고 지었는데 소리 내면 닳을까 이름을 부르기 아까울 정도였다. 배가 찢긴 고통을 이겨가며 틈틈이 걷고, 커다란 병실에서 홀로 식사하고 이틀째 씻지 못해 스스로가 무척 불결했지만, 나연은 37년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기와 단둘이 함께 있는 시공간에 영원히 박제되고 싶었다. 


태리의 얼굴을 보며 나연은 "비전 프로 비싸도 그때 살걸 그랬네" 혼잣말을 했다. 그녀는 출산의 순간부터 곤히 자고 있는 태리의 숨소리까지 이 모든 순간을 3차원으로 촬영해 두고두고 재생하고 싶었다. 나연은 LA에 도착한 지 3일 차에 애플스토어에서 비전 프로를 체험했다. 그리고는 이 기기가 이전에도 있었다면 이제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생신과 축제 같았던 여름날의 결혼식, 오픈카를 타고 남편과 달리던 제주도의 풍경과 같이 소중한 순간을 저장해 놓고 언제든지 눈앞에 재현할 수 있었다며 늦은 출시를 아쉬워했다. 물론 곧 그녀의 이성이 되살아나 500만 원이라는 가격과 코를 짓누르는 글라스의 무게를 핑계로 구매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태리와 단 둘이 보내는 이 순간이 영원히 흘러가 없어지고 기억에만 의존해 곱씹어야 한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았다. 아기에게 아무런 제한 없이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이 순간이 무척 행복했다. 


나연은 돈과 커리어, 사회적 지위 등도 중요하지만 사람은 소중한 사람과 사랑을 주고받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이혼을 겪으며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할 수 있어야 온전해짐을 깨달았다. 가장 행복한 순간 가장 불행했던 기억이 강렬하게 대비되며 나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의 전 남편은 그녀가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그는 나연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들과 똑같이 일과 연애를 병행하며 평범하게 살았지만 자주 외롭고 불행했다. 그는 나연의 연락을 귀찮아했고 미리 약속한 시간에만 만날 수 있었으며 손을 잡고 팔짱을 끼는 등의 스킨십은 거부했다. 마음은 말로 꼭 표현해야만 아는 것은 아니라며 자신의 사나이정신을 강조했다. 좋을 때도 있었겠지만 그는 나연과 만나는 8년의 시간 동안 나연이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설명하고 그녀가 납득할 때까지 설득했다. 그는 그녀가 한국 교육과정에 적응하지 못해 미국으로 도망간 것이라고 해석했다. 돌아와 수능을 보고 한국의 대학에 감으로써 보스턴은 물론 12년의 교육기간을 통째로 날린 셈이라고 했다. 그런 이유로 그녀가 대학생 때 미국이나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가려는 시도를 묵살했다. 나연에게 찾아온 한 번의 해외 파견의 기회에도 그는 보스턴의 실패를 근거로 들며 출국을 막았다. 그녀가 일 때문에 피곤하다는 이유로 데이트를 거부할 때면 홍보대행사는 을도 아닌 병이라고 비유했다. 그는 직업은 선택이 아니라 계급이라는 따위의 말을 늘어놓았다. 나연은 지금 돌이켜보면 그가 대단한 가스라이터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로 인한 고립과 외로움이 당연해 그의 말들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나연이 짐작해 본 그의 가스라이팅 목표는 나연이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자존감을 위축시키는 것이었다. 나연은 그토록 비정상적인 관계를 결혼식까지 끌고 간 그의 집념이 대단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런 그의 노력은 그가 결혼식과 긴 비행으로 체력이 고갈되어 발리에서 술에 취해 잠든 사이 물거품이 됐다. 나연이 연애기간을 포함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휴대폰을 들여다봤기 때문이다. 나연은 처음부터 대단한 것을 발견을 할 목적으로 몰래 그의 휴대폰을 확인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뜻은 없었다. 다만 나타나서는 안될 얼굴이 6년 만에 결혼식장에서 보였기 때문에 그녀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고 싶다는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식장에서 그녀의 눈에 띈 것은 추운 겨울날씨에 맞지 않게 얇은 씨쓰루 셔츠를 입은 여자였다. 검은색의 브라가 멀리서도 눈에 띈 탓에 얼굴을 확인한 것 뿐이었다. 그 여자는 나연이 아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연이 대학교 2학년이던 시절 당시 나연의 남자친구였던 그와 '썸'을 타던 동아리 선배였다. 나연은 당시 그에게 헤어지자고 했으나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는다며 나연에게 확신을 줬다. 그리고 그의 말마따나 그 동아리 선배는 이후 6년 동안 나연의 연애사에 언급된 적도, 레이더에 잡힌 적도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결혼식날 씨쓰루 셔츠를 입은 채 나타난 것이다. 나연은 그녀가 홀로 방문해 전 남편에게 축하 인사를 하고 뒤돌아 가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 나연은 코를 골며 잠에 든 남편 옆에 쭈구려 앉아 휴대폰의 메신저를 열었다. 다행히 그 동아리 선배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연은 그가 그녀에게 숨긴 너무 많은 비밀을 봐버렸다. 그는 꾸준히 도박을 하고 있었고 최근에는 성추행 고소 협박을 당했다. 그가 말했던 '회식'은 대부분 룸싸롱을 의미했다. 원나잇으로 추정되는 여자들과의 카톡이 쌓여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핫한 뉴스는 그가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들었다는 소식이었다. 한두 달을 만나다 1주일 전 사귀게 되었다는 그의 문자 내용이 기어이 나연의 눈에 들어왔다. 성추행이나 끊임없는 원나잇 상대보다 단 한 명의 존재, 여자친구가 나연을 강력하게 흔들었다. 나연은 그가 친구에게 사귄 지 1일이라며 보낸 여자의 사진을 확대했다. 그에게 스파게티를 만들어주고 있는 청초한 여자의 사진이었다. 귀 뒤로 머리를 넘기로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무용을 전공한 친구라는 점도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게 되었다. 나연은 더 이상의 염탐을 할 기력이 없었다. 휴대폰을 닫고 그대로 혼절한 듯 잠에 빠졌다. 다음날 아침 나연은 그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그는 과거의 일을 용서해 달라고 말했고 몇 시간을 울던 나연은 그의 말에 수긍했다. 나연이 진정해 침대에 누웠을 때 친구들이 보낸 결혼식 사진이 도착했다. 그 속에서 웃고 있는 자신을 보며 어딘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스노클링이나 댄스쇼와 같은 여행지의 액티비티로 주의를 돌려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밤이 되면 몇 시간을 소리 내어 울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피해 하루 종일 그녀를 혼자 두는 날도 있었다. 신혼여행 마지막 밤 나연이 한 시간 넘게 통곡을 했다. 나연의 울음소리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그는 나연 위에 올라탔다.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누르며 나연이 얼마나 히스테릭하고 사람을 지치게 하는 사람인지 쏘아댔다. 그는 그동안의 그녀에게 말한 대로 그녀는 실패한 인생을 살았고 자신을 떠나서는 그녀가 이룬 것은 하나도 없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때렸다. 나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원망이나 싸울 의지는 온데간데 없었고 그를 만난 8년 만에 처음으로 이 남자에게서 도망쳐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그것도 전력으로. 나연은 한국으로 돌아와 신혼집에 미리 옮겨두었던 모든 짐을 챙겨 나갔고 그대로 그녀는 이혼녀가 되어 그와 헤어질 수 있었다.


나랑이 방문한 것은 어제였지만 예상치 못한 정보에 그녀는 전 남편으로 인해 생긴 상처 가득한 기억이 오늘까지도 뜨문뜨문 떠올랐다. 깊은 밤 조용해진 병실에 태리가 꼼지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태리 쪽으로 걸어갔다. 아기는 입을 옴짝달싹하며 자고 있었다. 여전히 완벽한 태리를 보며 그녀를 산산 조각낸 전 남편도 이런 아기였을 때가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믿기지는 않지만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이었다. 그도 한 때는 완벽한 아기였다. 한 사람이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곧이곧대로 빨아들이는 사랑의 존재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연은 사람은 완벽하게 태어나 서서히 왜곡되거나 무너지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연은 태리를 완벽한 모습 그대로 온전하게 지키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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