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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테 Aug 24. 2024

포르토 베이커리

[8] 비행기가 지나간 길

기다렸던 퇴원날이었다. 나연은 3박 4일의 입원을 마치고 오전 10시 태리를 품에 안았다. 간호사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잠에 든 태리를 바라봤다. 1층으로 내려가자 현관 출입문에 서있던 사람들이 길을 비켜줬다. 아기를 안고 있는 것을 확인한 이들은 활짝 웃으며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나연은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나흘 만에 마신 공기는 차고 햇살은 따듯했다. 맑고 건조한 날씨였다. 카시트에 조그마한 신생아를 앉히고 버클을 채웠다. 차에 시동이 걸리고 나연은 휴대폰을 열었다. 퇴원을 했고 조리원으로 출발한다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여기저기 남겼다. 조리원 카톡창에서는 지난 4일 동안 일어난 뉴스가 착실하게 업데이트 됐다. 마리아나는 퇴소했고 새로운 산후 산모가 이틀 전 도착했다. 세 번의 사전답사와 집사의 대동으로 기대를 모은 '홍콩 언니'였다. 그녀의 이름은 구민희라고 했다. 대기업 오너 방계가 아닐까 하는 어설픈 추리가 이어졌다. 나연이 도착하면 점심으로 꽃게찜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례적인 메뉴였다. 조리원의 반찬은 미역국이나 호박죽, 두부, 생선 혹은 간이 덜된 고기로 늘 소소했다. 꽃게찜은 민희의 남편이 보낸 음식이라고 했다. 그녀 덕분에 산모들은 어제 전복구이를 먹었다고 했다. 민희의 남편은 나연보다 이틀 일찍 입소한 부인을 위해 매우 넉넉한 양의 음식을 조리원으로 배달시키고 있었다. 민희의 냉장고에 들어가지 못한 각종 음료와 과자는 조리원 공동 냉장고를 채워가고 있었다. 


나연은 조리원에 도착해 아이를 카시트에서 조심스럽게 꺼냈다. 태리는 햇살이 얼굴에 비추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잠들었다. 나연은 태리를 안고 한발 한발 신경 쓰며 신생아 실로 걸어갔다. 무리 없이 걷고는 있었지만 아랫배가 찢어진 느낌은 여전히 생경했다. 나연은 신생아실 맨 끝, 빈 배시넷에 태리를 올려놓았다. 관리사의 안내에 따라 아이 정보를 적었다. '산모이름: 오나연, 아기이름: 김태리, 성별: 여, 몸무게: 3.1kg.' 신생아실 관리사는 아기가 언제 분유를 먹었는지 묻고 나연의 모유량과 가슴 상태를 확인했다. 나연은 이 모든 과정이 신선했다. 한 아이의 보호자로서 경험하는 새로운 일들이 그녀에게 엄마로서의 감각을 일깨우고 있었다. 관리사는 나연에게 점심시간이 지나면 수유를 하자고 이야기했다. 나연은 뒤를 돌아 자고 있는 태리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전에라도 아이가 깨면 꼭 연락을 달라고 관리사에게 말했다. 나연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닫힌 문 앞에 가방을 그대로 떨궜다. 나연은 욕실로 직행했다. 태리와 단둘이 보낸 3박 4일은 꿈결처럼 행복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샤워가 간절했다. 샤워를 마친 나연은 마침내 깨끗하게 씻긴 자신의 몸을 침대 위에 가뿐하게 올렸다. 침대보는 방금 건조한 냄새가 폴폴 났고 창 밖의 낡은 집들 너머로는 키가 큰 야자수가 보였다. 더 멀리 시선을 옮기면 이곳이 LA임을 짐작할 수 있는 낮은 산들이 풍경의 끝을 장식하고 있었다. 하늘이 푸르렀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쉼이었다. 나연의 얼굴에 눈물이 쏟아졌다. 아기를 영영 잃어버린 기분이 나연을 완전히 덮쳤다. 쏟아지던 눈물은 이내 소리 내어 우는 울음으로 바뀌었다. 아기와 떨어져 있는 상황이 무서웠다. 나연의 전화가 울렸다. 퇴원한다는 카톡을 확인한 남편의 전화였다.


"어? 여보 무슨 일이야!" 지훈은 나연의 울음소리에 당황했다.

"오빠..."나연은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어떡하지. 수술한 데가 많이 아파? 뭔가 잘못된 거야?" 지훈이 다급히 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나 산후우울 와가지고..." 나연은 간신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산후우울?" 지훈의 목소리톤이 한결 안정됐다.

"애기 신생아실에 맡기고 왔는데 분리불안이 왔나 봐..." 나연은 웃으며 답했다. "증말 양수 터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하는 중."

"별일 있는 건 아니지?" 지훈이 다시 한번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응 다 멀쩡하고 다 건강해" 나연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근데 애기는 여보가 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가서 볼 수 있는 거 아니야?" 지훈이 물었다.

"맞아. 그냥 산후우울증이야. 아, 나도 내가 너무 웃겨." 나연이 웃었다. 

"여보 괜찮은 거지?" 지훈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냥 감정이 왔다 갔다 하는 거지 나쁜 건 아니야. 이따 점심 꽃게찜이라서 기분 곧 좋아질 것 같아, " 나연이 머쓱해 하며 화제를 돌렸다. 

"조리원에서 꽃게찜을 해줘?" 지훈이 놀란 듯 물었다.

"홍콩 언니 남편이 사왔대. 대박이지." 나연이 흐흐 웃었다.

"그?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인데 한국인을 곁들인?" 지훈이 말했다.

"응. 나 홍콩 언니랑 친하게 지내려고." 나연이 말을 이어갔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미 언니가 다 갖고 있겠지만 우린 분명히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우리 여보... 기대가 크구나." 지훈이 농담을 던졌다.

"왜 나도 언니랑 기브 앤 테이크할 수 있어, 언니는 나에게 프라이빗젯을 태워주고 나는 언니에게 사랑을 주고." 나연이 웃으며 말했다. "난 사랑이 많아." 


조리원의 산모들은 LA에서 화장실 5개 짜리 대저택을 두세 달씩 빌리고 집사를 대동해 온 가족이 방문한 민희의 씀씀이로 미루어 그녀가 전용기를 타고 왔을 거라고 멋대로 추측하고 있었다. 통화는 30분가량 이어졌다. 나연은 신생아실에서 찍은 사진을 남편에게 보냈다. 카시트에서 아기의 머리가 흔들려 걱정이 되었다는 이야기, 차에서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을 잘 잤다는 이야기, 신생아실 막내칸에 태리가 들어갔다는 이야기, 병원을 나오기 전에 코딱지를 빼줬다는 이야기, 태리의 옆에는 홍콩 언니의 아들이 누워있고 이름은 노아 권이라는 이야기를 자세히 늘어놨다. 나연은 그녀와 그의 딸에 대한 모든 정보를 공유하고 싶었지만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한국의 새벽은 깊어가고 있었다. 나연은 아기의 동영상을 더 찍어 보내겠다고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연은 우느라 부은 얼굴을 정돈하고 식당으로 어기적 어기적 걸어 나갔다. 


꽃게찜을 담고 있던 박스가 식당 초입에 놓여있었다. 식탁에는 넓은 접시들과 포르토 베이커리 로고가 새겨진 빵 상자들 그리고 한인마트에서 사 온 떡이 두 접시에 나뉘어 수북이 쌓여있었다. 식탁에는 나랑과 미주, 지혜, 헤원이 앉아있었고 하이윤이 방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하이윤은 식탁의 메뉴를 보고는 중국어로 몇 마디 혼잣말을 했다. 하이윤은 이쌤에게 방으로 평소 식사를 담아서 가져다 달라고 말하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이쌤은 이틀째 넘치게 들어오는 음식들이 산모에게는 좋지 않다고 구시렁대었다. 염분 조절이 안 되는 문제도 있었고 하이윤처럼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쌤은 방으로 가져갈 트레이를 두 개로 만들어 준비했다. 하나는 하이윤이 주문한 대로 두부와 밥만 담은 트레이였고 다른 하나는 민희의 방으로 가져갈 꽃게찜과 떡, 빵이 빽빽하게 담긴 트레이였다. 조리원의 산모들은 이틀째 민희의 남편이 가져온 음식을 나눠먹고 있었지만 그동안 민희를 직접 본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조리원에 도착한 뒤 식사 시간에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이를 보러 내려오지도 않았다. 민희를 본 것은 식사를 가져다주기 위해 그녀의 방에 출입하는 이쌤이 유일했다. 이쌤은 그녀 방의 냉장고는 먹을 것으로 가득 차 있고 작은 초콜릿과 과자들이 선반에 쌓여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갈 때마다 민희는 눈물 범벅 상태였다고 했다. 




저녁 아홉 시. 산모들이 각자 방에서 잠을 자거나 쇼츠를 보고 있을 시간이었다. 관리사가 나연의 방에서 수유를 마친 태리를 데려나갔다. 나연은 배가 고팠다. 입에 맞지 않는 생선튀김이 저녁 메뉴로 나와 거의 식사를 못했다. 바로 이어진 수유 타임으로 인해 다른 음식을 먹을 새가 없었다. 나연이 수유를 하기 위해 식당을 떠날 때 이쌤은 민희가 거의 손대지 않은 트레이를 들고 주방으로 돌아왔다. 나연은 한 시간이 조금 넘게 태리와 씨름했다. 신생아에게 젖을 물리는 일은 심히 허기가 지는 일이었다. 점심 때 봤던 포르토 베이커리 박스가 나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샤워를 마친 나연은 조용히 문을 열고 식당으로 내려왔다. 아일랜드 식탁 한편에 베이커리 박스가 놓여 있었다. 더 이상은 임산부가 아닌 산후 산모로서 식단 조절을 해야 한다 다짐했지만 모유 수유 후 몰려오는 식욕을 참기 힘들었다. 특히 포르토 베이커리는 빵을 좋아하던 나연이 LA로 오기 전 유일하게 찾아본 LA의 유명 베이커리 리스트에 있던 가게였다. 꼭 먹어보고 싶었다. 나연은 빈 접시를 꺼내 옆에 내려놓고 소리가 나지 않게 박스를 열었다. 주먹 반만 한 크기의 크림롤이 네 개가 있었다. 하나를 집어 접시에 올려놓고 식탁에 앉았다. 한 입 베어문 롤의 겉은 바삭하게 부서지면서도 적당히 찰기가 있어 지저분하게 떨어지지 않았다. 롤 안에 있는 바닐라 크림은 미국 디저트 답지 않게 은은하게 달았다. 한 입 한 입 아껴먹어야겠다고 생각하던 나연은 신생아실에서 들리는 고함 소리에 깜짝 놀라 빵을 내려놨다. 어떤 여자의 비명이었다. 이어 울부짖으며 비난하는 소리가 따라 들렸다. 나연은 신생아실을 향해 가려고 의자에서 황급히 일어났다. 아랫배가 찢어지는 느낌에 그녀는 다시 주저앉았다. 귀를 기울이니 저녁에 교대로 온 관리사의 목소리가 차근차근 들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커졌고 다시 한번 여자의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아프다고 했는데!" 화가 난 목소리였다.

"엄마... 이래야 멍울이 풀린다니까?" 관리사의 말이 이어졌다. 

"애를 제때제때 안 보내주니까 그렇지! 아아!" 여자가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쿵 하며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배의 통증이 가라앉은 나연은 신생아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관리사가 민희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들어갔다. 둘이 대화하는 소리가 웅웅 울렸다. 하지만 이내 고함소리가 이어졌고 관리사는 문을 닫고 나왔다. 신생아실 입구에 서있는 나연을 발견한 관리사는 아랫입술을 팔자로 내려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사장이 묵고 있는 1층 방으로 내려갔다. 나연은 딸이 잘 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민희의 옆 호실에 묵고 있는 지혜가 문을 열고 나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신생아실로 들어가 아들에게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하이윤의 아들도 조용했다. 민희의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지혜는 노아를 달래려 안으려다 민희 방문 쪽을 흘긋 쳐다보고는 그대로 아이가 울게 뒀다. 그리고 나연과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 방금 전 일어난 사건의 전말에 대해 조용히 설명했다. 관리사 교대가 바뀌며 인수인계가 잘 되지 않아 노아가 민희의 방으로 수유를 하러 갈 시간을 한 타임 놓쳤고, 젖몸살이 온 민희가 가슴마사지를 받다 폭발한 것이었다. 두 명의 산모가 신생아실에서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을 때 민희가 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내 포효하고 꺽꺽 우는 소리로 발전했다. 간간이 나가야겠다는 고함이 들렸다. 사장이 민희의 방으로 들어갔고 산모들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나연은 고함 소리에 각성이 되어 잠에 들지 못했다. 이런저런 소란을 들으며 멀뚱히 천장을 쳐다보던 새벽 두 시, 나연은 차 한 대가 조리원 앞에 주차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연은 상체를 일으켜 창 밖을 내다봤다. 민희가 아이를 안고 차에 올라탔다. 깜깜한 밤 민희와 아이를 태운 차는 조리원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다음날 아침 식사 시간이 지나서도 네 명의 산모들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홍콩 언니'를 주제로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가슴 마사지는 원래 그만큼 아프다거나 혹은 마사지로 해결할 수 없는 수준으로 증상이 악화되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 맞섰다. 혹은 관리사가 잘못했거나 수유타임을 놓친 게 결정적으로 그녀의 인내심을 건드렸다는 추측도 오갔다. 남편이 사실 그녀를 조리원에 격리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짓궂은 농담도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 새로 조리원으로 오는 산모가 있다고 했다. 민희가 새벽에 방을 갑작스럽게 비운 덕에 바뀐 스케줄이었다. 그녀는 원래 하이윤의 방으로 배정을 받아 하이윤이 퇴소하는 4일 뒤에 올 산모였는데 방이 일찍 비었다는 소식에 입소일을 앞당기게 됐다. 이쌤에게 듣기로는 남편이 갑자기 귀국하는 바람에 어제부터 홀로 호텔에서 묵고 있던 한국인이라고 했다.


마침 한 사장의 오딧세이가 조리원 마당에 주차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문을 닫고 신발장 위치를 설명하는 등의 이야기가 들렸다. 새로 온 산모가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왔다. 식당에 앉아있던 산모들은 대화를 멈추고 모두 고개를 들어 인사할 준비를 했다. 먼저 동그란 이마가 보였고 어깨까지 내려온 단정한 생머리가 보였다. 얼굴은 나연은 아는 얼굴이었다. 9년 전 발리에서 몰래 열어본 휴대폰 속에서 수줍게 스파게티를 만들고 있던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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