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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테 Aug 24. 2024

트레이더조

[9] 비행기가 지나간 길

나연은 사람들의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한 번 만났어도 이름은 물론 당시 나눴던 사소한 대화 몇 마디를 그대로 재연할 수 있었다. 이런 능력은 언론사 행사 때 막내 기자들 기를 살려주거나 인플루언서 초청 행사에서 그들의 존재감을 높여주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평소 그녀의 자랑거리였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식당으로 올라와 짐도 풀지 않고 산모들 사이에 앉는 임산부를 보며 나연은 자신의 기억이 틀렸길 간절히 바랐다. 9년 전 본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그 사진은 심지어 얼굴이 정면으로 나오게 찍힌 사진도 아니었다. 이름도 그 이름만 아니면 됐다. 그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일 거라 부정했다. 미주가 붙임성 좋게 자신의 나이와 이름을 이야기하고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그녀가 친절하게 대답한 이름과 나이는 나연의 기대를 간단히 깨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나연은 스물여덟, 결혼식장에서도 6년 전 한 번 본 여자의 정체를 정확하게 기억해내지 않았었는가. 스파게티를 만들던 그녀의 이름은 유채원이었다. 동그란 이마와 굵은 머릿결, 긴 목이 우아한 여성이었다. 키는 아담한 편이었지만 팔다리가 가늘어 늘씬해 보였다. 배만 볼록 나온 임산부들의 워너비 체형이었다. 채원은 임신 34주에 쌍둥이를 배고 있다고 했다. 


나연은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새벽 퇴소라는 드라마의 막장을 목격한 증인으로서 대답해야 할 사사로운 질문들이 아직 남아있었고 각자 새로운 입소자와 통성명을 하던 터라 자리를 뜰 명분이 없었다. 태리가 예정보다 일찍 깨서 젖을 달라고 보채기만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채원은 초산이고 서른다섯 살이라고 했다. 쌍둥이는 둘 다 딸이라고 했다. 나연은 초산이라는 말에 조금 안도했다. 미주는 나연을 시작으로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이 모두 여아라고 이야기했다. 산모들은 재미있는 우연이라고 맞장구쳤다. 이어 암묵적으로 미주 옆에 앉아있던 지혜가 본인을 소개할 차례였다. 지혜는 자신이 서른일곱, 의사라고 소개했고 혜원은 서른여섯, 아버지 회사에서 일을 돕고 있다고 했다. 이어 나연이 자신을 소개할 차례였다. 나연은 서른일곱에 홍보회사를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채원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채원은 그녀의 이름이나 나이, 하는 일을 듣고도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나연을 처음 본 사람의 표정이었다. 나랑은 서른둘이고 자기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한다며 자리에 있는 사람들끼리 팔로우할 것을 제안했다. 활성화된 계정을 가진 사람은 나랑, 지혜, 혜원뿐이었다. 나머지 셋은 이러한 사교적 제스처에 대비해 만들어둔 유령 계정만 가지고 있었다. 서로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하느라 정적이 흐를 때 신생아실 관리사가 식당으로 나와 나연을 찾았다. 나연은 반가운 티를 숨기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태리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점심이 지난 오후 나연은 현관으로 나섰다. 식사 중에 마트에 가고 싶다는 나연과 나랑의 대화를 들은 한 사장이 오후에 그녀들에게 라이드를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나연은 한국에서 챙겨 온 안심팬티가 다 떨어져 가고 있었고, 출산하고 5일째 실내에만 있던 터라 마트를 가볍게 도는 정도는 산책으로 좋을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랑만 마트에 간다고 이야기해 단둘이 있을 이 기회에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고 했다. 나연의 남편도 나랑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분만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고 이야기했다. 어제 나연 부부 사이에서는 작은 선물이라도 해야겠다는 대화가 오고 갔다. 


회갈색 오딧세이는 성실하게 현관에서 시동이 걸린 채 대기하고 있었다. 한 발을 먼저 차에 올려 조심히 올라탄 나연은 뒷 자석에 앉아있는 채원과 눈이 마주쳤다. 나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인사를 했다. 뒤에서 커다란 배를 붙잡고 걸어오는 나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채원도 과일과 샴푸 등을 사고 싶다며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는 나랑의 활기찬 설명이 이어졌다. 채원은 친구들에게 트레이더조가 유명한 마트라고 들었다며 가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트레이더조 에코백도 있으면 살 계획이라고 했다. 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여자는 트레이더조와 타겟이 나란히 붙어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한 시간 뒤 데리러 오겠다며 사장은 자리를 떴다. 나연은 자신은 식료품은 살 게 없으니 나랑과 채원에게 나중에 마트 앞 카페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연은 빠르게 몸을 돌려 타겟으로 들어가 여성용품 코너로 직행했다. 한국에서 파는 것과 같은 종류의 안심팬티가 없어 대신 오버나이트 생리대를 한 봉지 집었다. 그리고 검색대로 가 캔들 코너의 위치를 검색했다. 타겟의 향초일 뿐이지만 나연은 여러 향을 느긋하게 비교해 신중하게 고르려고 했다. 앞으로 3주 간 지낼 방을 더 아늑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생리대와 양초가 연관이 없는 품목인 탓에 캔들 코너는 너무 멀리 있었다. 나연은 반도 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춰야 했다. 아랫배의 통증이 강하게 그녀를 붙들었다. 고통이 사그라들 때까지 눈을 감고 선반을 잡고 섰다. 캔들은 다음 기회로 미루자며 생리대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생각보다 쇼핑이 빨리 끝난 탓에 나연은 트레이더조 앞 카페에 가 자리를 잡았다. 원하던 음료가 없어 탄산수를 집어 자리에 앉았다. 나연은 멍하니 푸른 캘리포니아의 하늘을 쳐다봤다. 희미한 비행운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각자의 목적과 각자의 사연을 가진 수백 명의 사람을 실은 비행기가 지나간 길이었다. 나연은 눈을 내려 마트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피부, 체형, 머리색과 눈동자색이 모두 다른 사람들 속에 머리가 똑같이 까만 한국인 임산부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나랑은 선글라스를 머리에 올려 쓰고 있었고 채원은 챙이 넓은 라피아햇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팔에는 식료품이 담긴 트레이더조 에코백이 걸려있었다. 채원은 나랑보다 4주 늦은 34주 차 임산부였지만 배 크기는 나랑과 비슷하게 불룩했다. 마트에서 나온 나랑은 나연을 발견하고는 팔을 휙 들어 인사하고 팔자걸음으로 느릿느릿 카페로 들어왔다. 나랑은 나연과 같은 탄산수를 들고 나연이 앉아있는 자리로 왔다. 채원은 마차라떼를 시켜 카운터에서 기다렸다가 자리로 온다고 했다. 나연은 나랑에게 트레이더조에서 무엇을 샀는지 물어보려고 했다. 나랑이 탄산수를 탁 내려놓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음, 나랑 같은 초이스! 언니 뭐 샀어요?" 나랑이 물었다.

"생리대요. 한국에서 가져온 게 다 떨어졌어요." 나연이 말했다.

"아 언니~ 그런 거면 얘기하지. 내가 사다 주면 되는데... 지금도 아픈 거 아니에요?" 나랑이 걱정스러운 듯 이야기했다.

"앉으니까 괜찮아졌어요. 겸사겸사 산책하고 싶었구." 나연이 카페 밖 행인들을 바라봤다.

"두 분 다 탄산수네요. 단 거 안 좋아하세요?" 채원이 음료를 들고 오며 물었다.

"라떼류를 별로 안 좋아해요." 나랑이 말하고 늘 라벤더 마차를 마시던 나연의 대답을 궁금해했다.

"저는 지금 모유 수유 중이라 카페인 들어간 거 먹으면 안 돼서요." 나연이 답했다.

"그럼 저 아까 트레이더조에서 콤부차 사봤는데 이거 마셔보실래요?" 채원이 에코백에서 핑크색 음료를 꺼냈다.

"고마워요. 근데..." 나연이 말을 얼버무렸다.

"아 맞다, 언니 대박인 게 저랑 채원언니 남편이랑 같은 업계 사람인 거 알아요?" 나랑이 갑자기 생각난 듯 나연에게 말했다. 

"음? 그래요?" 나연은 최대한 관심 없는 듯 대답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네, 한 다리 건너면 남편들끼리 알겠더라구요." 나랑이 신난 듯 이야기했다. "언니 남편분 회사 이름이 아까 뭐라고 하셨죠? 이따 남편 일어나면 물어보게요."

나연은 제발 그 네 개의 알파벳이 아니길 바랐다. 

"아 저희 남편 CCCP요." 채원이 말했다.


나연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들려서는 안 되는 이름이었다. 나연은 한 번도 그의 안부가 궁금한 적이 없었다. 채원이 초산이라고 했을 때 시기 상 그 남자일리 없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아니어야 한다고 바랐다. 스파이처럼 정체를 숨기고 앉아 전 남편의 아내의 입을 통해 그의 근황을 현현하게 밝혀내길 원치 않았다.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갈 데가 없었다. 한 사장이 약속한 시간까지 27분이나 남아 있었다. 이 자리의 뉴비로서 채원의 시시콜콜한 결혼 이야기는 계속 업데이트됐다. 채원은 3년 반 정도 연애를 한 후 결혼한 지는 5년이 조금 넘었다고 했다. 처음 3년은 신혼을 즐기자며 임신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채원은 남편이 일이 바빠 생각을 못한 것도 있다고 했다. 그는 저녁 회식 자리가 많고 출장도 많다고 했다. 시부모님의 기대를 더 이상 무시하기 힘들게 되어 1년 동안 자연 임신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클리닉을 찾았고 운이 좋게 두 번의 시도 만에 아이를 가졌다고 했다. 이미 알다시피 채원은 쌍둥이를 가졌고 성별은 둘 다 딸이었다. 


나연은 대화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그녀가 말한 연애 기간과 결혼 시간을 합하면 두 사람이 이혼 시기와 그대로 맞닿아 있었다. 그는 여전히 '바쁘게' 살고 있다는 점이 여전하다고 느껴지다가도 점차 나연의 깊은 곳에 묻혀있던 나쁜 기억이 떠올랐다. 머리가 돌고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나연은 이렇게 넓은 땅과 서로 다른 수많은 시간대가 있음에도 어떤 연유로 이 공간에서 이 시간에 이 사람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게 된 것인지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는 문득 그의 자식의 성별이 딸이라는 지점까지 생각이 닿았다. 카르마, 업보, 사필귀정과 같이 식상한 단어만이 나연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인과관계라는 섭리가 그에게도 적용되었다고 생각했다. 나연은 그가 부디 죄 없는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녀들로 인해 회개하며 살아가길 바랐다. 영겁 같던 27분이 지나고 한 사장이 카페 앞으로 찾아왔다. 


배가 나온 세 한국인 여자는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카페를 나서며 나연이 채원에게 말을 건넸다. 차마 이름은 부르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그녀를 불렀다.


"그... 콤부차에 알코올이 있을 수도 있어요. 성분 봐보세요. 임산부이시니까 여러모로 조심해야 하니까..."


채원은 고맙다며 살펴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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