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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테 Aug 24. 2024

오스카 트로피

[11] 비행기가 지나간 길

새벽 6시 태리는 만족한 듯 나연의 젖을 놓았다. 나연은 태지가 붙은 태리의 이마와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입을 오물오물 움직이던 신생아는 잠에 빠져들었다. 나연은 태리를 한 팔로 안고 신생아실로 걸어갔다. 나연은 신생아실 앞 복도를 바쁘게 서성이던 한 사장을 마주쳤다. 


"아, 나연 씨! 소셜카드. 어제 도착했는데 이따 여권 찾아와서 드릴게요." 한 사장은 나연을 불러 세웠다.

"정말요? 출국 하루 앞두고 받네요! 감사해요." 나연은 중요한 서류를 직접 가져갈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미안한데... 오늘 외부 일정이 있어서 직접은 못줄 것 같고 이따 여기 올려둘게요" 한 사장이 식탁 옆 선반을 가리켰다.

"네 알겠어요. 바로 챙길게요. 오늘 바쁘세요?" 나연이 물었다.

"어제 닥터가 채원 씨 입원시켜야 할 것 같다고 해서 오늘 입원 수속 하러 가야 해요." 한 사장이 말했다. 

"진짜 심각해서 입원하는구나..." 나연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한 사장은 채원의 임신중독증이 심해져 급하게 입원이 결정됐다고 말했다. 최근 며칠 그녀의 다리가 크게 붓고 혈압이 올라가 몇 차례 검진이 있었다. 단백뇨가 심해지며 오늘 제왕절개 수술을 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사실 나연은 채원이 도착한 날 그녀가 조리원 카톡방에 초대가 되면서 그녀의 몸 상태의 이상을 알고 있었다. 채원은 본인의 건강 이상 증상을 성실하게 카톡방에 업데이트했다. 다만 입원 결정은 나연이 몰랐던 사실이었다. 최대한 그녀에 대한 정보를 저장하려 하지 않은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일 수도 있고, 이른 새벽 시간에 그녀의 뇌가 덜 활성화되어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는 손으로 숫자를 세며 채원의 퇴원 날짜를 계산했다. 오늘 분만을 하고 큰 이벤트가 없다면 모레 퇴원이었다. 불편한 건 나연 혼자뿐이었지만 채원과 어색한 안녕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나연 씨 우리는 내일 여기서 아침 아홉 시에 출발해요." 한 사장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네 좋아요. 지금 가면서 신생아실에도 아기 준비해 달라고 다시 한번 리마인더 드릴게요." 나연도 시계를 쳐다봤다. 

"캐리어는 몇 개예요?" 한 사장이 물었다.

"두 개요. 기내용 하나, 수화물용 하나 이렇게요." 나연이 답했다.


나연은 요 며칠 짐을 단출하게 만들었다. 기내용 캐리어는 아기 짐이었다. 액상 분유 한 박스와 기저귀가 3분의 2를 차지했고 겉싸개와 속싸개, 아기 옷, 휴대용 기저귀 갈이대, 수건 등으로 가방이 가득 찼다. 장문의 출국 후기를 남긴 지혜의 조언에 따라 짐을 쌌다. 아웃렛에서 산 옷이나 과자, 비타민 같은 선물들은 일주일 전 미리 택배로 부쳐 짐을 줄였다. 수화물로 부칠 캐리어에는 나연이 입고 생활했던 옷들과 마사지기, 액상 분유 한 박스와 기저귀, 초록색 물결무늬의 롤렉스 박스 등이 들어있었다. 내일 출발 전에 세면도구와 잠옷만 챙겨 넣으면 됐다. 여권과 지갑, 핸드크림 같은 짐은 한국에서 가져온 흰색 숄더백을 쓰기로 했다. 숄더백에는 할리우드거리에서 사 온 오스카 트로피 키링이 달려있었다. 로데오에서 돌아오는 길에 혜원 부부와 함께 관광센터에 들려 하나씩 산 기념품이었다. LA에 자주 와본 것도, 앞으로 자주 올 수는 없을 거라는 점에 동의한 세 사람이 즉흥적으로 구매한 것이었다. 나연이 지난 4주 간 LA에서 산 물건 중 유일하게 LA를 연상시키는 물건이었다. 새끼손가락 만한 금색의 키링이 나랑의 흰 숄더백과 잘 어울렸다. 짐을 모두 확인한 나연은 출발 전 휠체어 서비스가 제대로 신청이 되어있는지 확인했다. 아기를 안고 앉아서 들어갈 수 있으니 지혜가 잊지 말고 예약하라고 한 서비스였다. 비행 편은 지연 공지가 없었다. 인천 공항에는 친정부모님과 남편이 나와있겠다고 했다. 4주 간의 LA 일정은 그렇게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짐을 며칠에 걸쳐 싸뒀지만 출국 전날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나연은 아침 식사 후 한 사장이 식탁에 올려둔 태리의 여권과 소셜 카드를 챙겨 방으로 돌아왔다. 여권을 열어 사진을 확인했다. 신생아실에서 찍은 태리의 여권 사진은 우스꽝스러웠지만 우스꽝스러운 대로 소중한 얼굴이었다. 태리의 사회보장번호가 적힌 소셜카드는 얇은 종이 한 장이었는데 잃어버리기 좋은 봉투 사이즈였다. 나연은 이 작은 두 개의 서류를 위해 미국까지 온 것이 한편으로는 우스웠다. 그리고 귀한 서류 두 개를 자신의 흰 숄더백 안쪽에 깊숙이 넣었다. 이제 나연이 정리해야 할 짐은 한 개뿐이었다. 서랍 안쪽에 있던 작은 원통형의 에르메스 트윌리 박스였다. 나랑에게 어떻게 트윌리를 전달해야 할까 고민했다. 다른 산모들의 눈을 피해, 나랑의 낮잠과 수유시간, 식사와 외출 시간을 피해 몰래 전달해야 했다. 거리를 두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게 옳은 일일까 마지막까지 고민이 되었다. 머릿속으로 여러 시뮬레이션을 돌려봤지만 직접 전달하면 나랑과의 접점이 늘어날 수밖에 없어 부담스러웠다. 생각 끝에 나연은 떠나기 직전 새벽에 나랑의 방에 몰래 놓고 오기로 마음먹었다. 나랑의 성격 상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보낼 것이었고 나연은 그때부터 점차 선을 그으며 멀어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베푼 호의와 친절을 배신하는 것 같아 씁쓸했으나 묻어두기로 했다. 또한 그녀의 성정이면 멀어지는 나연을 그대로 인정할 것 같았다.


짐을 정리하던 나연의 방 밖이 약간 소란스러웠다. 문을 열어 보니 채원이 입원을 위해 조리원을 나서고 있었다. 친절한 나랑은 입원하러 가는 채원의 짐을 정성스레 챙겨주었으며 응원의 말도 잊지 않았다. 나연은 더 이상 채원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안도가 되었다. 배웅의 현장을 보며 문에 기대 쉬었다. 추측해 봤을 때 채원의 남편이 그녀에게 스스로를 이혼남이라고 지칭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가 한 번은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을 그녀가 모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정확한 결혼식 날짜까지는 모르겠지만 채원은 자신이 남편을 만난 시점을 대략적으로 알았을 것이고, 알았다면 시점을 수상하게 여길 법도 했다. 당시 그도 친척과 친구 수십 명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뚫고 결혼식에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백 명에 가까운 인원이 그의 결혼 사실과 시점에 대해 함구 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와 결혼을 했고 곧 쌍둥이를 낳으러 가는 중이었다. 나연은 채원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의 남편의 의뭉스러운 과거는 두 사람의 사랑으로 극복했을 것이라고 추리했다. 특히 채원이 나연을 몰라본다면 그녀는 그렇게 과거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고 그만큼 이혼 사유에도 큰 관심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여전히 출장을 이유로 한 외박이나 술자리가 많다는 그녀의 말을 토대로 짐작해 본다면 나연의 전 남편의 생활 습관은 예전 그대로인 것 같았다. 그리고 여태까지 도망치지 않은 그녀의 선택을 미루어 봤을 때 그의 폭력적인 말과 행동은 채원에게 문제가 되지 않거나 혹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을 것이다. 나연은 이 사실이 놀랍다가도 이내 수긍을 했다. 아마 그의 폭력성은 상대가 나연이라서 발현이 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연은 관계의 모습은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주고받는 작용과 반작용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혼을 겪으며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나연이 한 시간에 15만 원씩 현금으로 지불하고 받은 심리 상담 8회 차에 눈물을 쏟으며 받아들인 사실이었다. 과거 나연은 그녀의 이혼을 두고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조언하는 어르신들이 그렇게나 싫었는데, 이곳 LA에서 그 증거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빠져들수록 나연은 채원에게 파이팅을 외치는 해맑은 나랑의 뒷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서둘러 LA 떠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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