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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테 Aug 24. 2024

LAX

[12] 비행기가 지나간 길

출국 날 아침 메뉴는 미역국과 두부 부침이었다. 나연은 미역국을 국물을 조금 마시고 두부 한 개를 베어문 뒤 자리를 일어났다. 식당의 사람들은 그녀가 30분 뒤 출발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속하게 식사를 마친 그녀를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나연은 방으로 들어가 주황색 종이백을 몰래 품에 넣고 나왔다. 복도를 건너 나랑이 묵고 있는 방문을 열고 화장대 위에 선물을 올려놓았다. 종이백 위에는 '그때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나연'이라고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나연은 전날 저녁 조리원에서 포스트잇을 찾는 게 의외의 난관이었는데 신생아실 관리사들이 사용하는 도구함에서 겨우 찾아 메모를 남길 수 있었다. 나연은 2층으로 내려와 신생아실로 갔다. 태리는 싱크대에서 방금 목욕을 마치고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나연이 한국에서 가져온 하얀 배냇저고리와 리본이 달린 모자, 장갑이 기저귀 갈이대 옆에 놓여있었다. 나연은 다시 방으로 올라와 이를 닦고 세면도구와 입고 있던 잠옷을 모두 가방에 넣었다. 어제 꺼내놓은 노란색 수유 원피스를 입고 후드를 걸쳤다. 그 위에 아기띠를 메었다. 손목에는 롤렉스가 초록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나연이 묵었던 방이 텅 비었다. 가방을 옮기려던 나연의 방에 한 사장이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캐리어를 옮겨 주겠다고 했다. 출발을 약속한 9시까지는 15분 남았지만 일찍 출발하는 것은 늘 현명한 선택이었다. LA 공항으로 가는 길은 항상 막혔다. 신생아실에서는 태리의 외출 준비를 모두 마쳤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아기는 카시트 한켠에 조용히 기대 졸고 있었다. 캐리어를 차에 모두 실은 한 사장은 아기가 든 카시트를 들고 내려가며 출발하자고 했다. 나연은 흰 숄더백을 어깨에 메고 식당으로 갔다. 미주와 나랑, 은비가 아이들과 함께 후식으로 나온 오렌지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연은 가보겠다며 인사를 했다. 나연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미주와 나랑이 일어나 배웅을 나가겠다고 했다. 쉬라고 했지만 그 둘은 나연의 등을 밀며 같이 내려갔다. 카시트 설치가 끝나있었다. 나연은 태리 옆자리에 올라타고 인사했다. 나랑과 미주가 한국에 가서 모이자고 말했다. 나연은 미소를 지었다.


"아유 참, 이번 산모들은 돈독하네" 한 사장이 출발하며 나연에게 말했다. 

"다들 이런 게 아닌가요?" 나연이 옆으로 구부정한 태리의 몸을 펴주며 물었다.

"서로 서먹할 때도 있고 그때마다 다른데 나랑 씨가 유독 사람들을 잘 챙기는..." 한 사장이 차선을 변경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어제도 어떻게 쌍둥이랑 혼자 모자동실 하냐고 나랑 씨가 하도 뭐라 그래서 쉬고 있는 선생님 한 분 연락해서 채원 씨한테 보냈어요."

나연도 어제 데이오프인 관리사가 늦은 오후 채원의 병실로 파견 갔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채원 씨는 오늘 남편이 오니까 좀 낫겠죠." 한 사장이 후련한 듯 이야기했다.

"오늘요?" 나연이 깜짝 놀랐다.

"네, 채원 씨 남편이 일정 당겨서 오늘 오전에 와요. 지연 소식 없으니 곧 도착할 거예요." 한 사장이 말했다.

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밖을 봤다.

"같은 항공사니까 나연 씨가 채원 씨 남편이 타고 온 비행기 타고 한국 들어가는 거네요."

"네, 그렇네요..." 나연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조리원을 떠난 지 1시간 뒤 도로 위 표지판에 LAX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출발하고 서서히 교통체증이 시작돼 나연은 한 시간이나 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래도 조금 일찍 출발한 덕에 나연은 출발 두 시간을 남기고 도착할 수 있었다. 차는 곧 공항 출국장에 멈춰 섰다. 나연이 카시트의 안전벨트를 조심히 풀러 아기를 카시트에 안고 내렸다. 그 사이 한 사장은 나연의 캐리어 두 개를 차에서 내려놓고 카트를 찾으러 갔다. 


"사장님 덕분에 애기 잘 만나고 가요. 감사해요. 제가 밀고 갈게요" 나연이 카트를 밀고 오는 한 사장에게 말했다.

"애기엄마가 어떻게 이걸. 제가 카운터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한 사장이 말했다.

"아녜요. 저 이거 밀 수 있어요." 아기띠를 앞으로 맨 나연이 한 손으로 카트를 밀어 보이며 말했다.

"어 나연씨 잠깐만요." 한 사장이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아 네네 채원 씨 남편분이시죠. 입국 심사 줄이 짧았나 보네요. 저 지금 출국장이에요. 산모 한분 내려주느라고." 

한 사장은 통화를 하며 수화물 캐리어 하나를 카트에 올렸다. 나연은 한 손으로 태리의 몸을 잡고 한 손으로 기내용 캐리어를 카트 위에 올렸다.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났다. 어서 공항 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사장님 저 진짜 괜찮아요. 갈게요!" 나연이 태리를 두손으로 카트를 밀며 말했다.

"앗 제가 바로 다시 전화드릴게요." 한 사장은 카트를 밀고 신호를 기다리는 나연을 보고는 통화를 급하게 끊었다.

"요 앞이에요. 괜찮아요. 그리고 가서 바로 휠체어 타면 돼요" 나연은 한 사장에게 인사를 하며 움직였다.

"아구. 그럼 무슨 일으면 바로 전화해요. 잠깐동안은 공항일 테니까." 한 사장은 나연을 더 말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네 그럴게요. 고맙습니다. 사장님!" 나연은 바뀐 신호를 따라 공항으로 들어갔다.


나연은 카트를 밀고 항공사 카운터에 태리와 자신의 여권을 힘겹게 올려놨다. 휠체어 서비스를 신청했다고 이야기했다. 직원은 세 가지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해 달라고 했다. 탑승게이트 앞에 내려주는 옵션, 탑승교까지 들어가 항공기 문 앞에서 내려주는 옵션, 마지막으로 기내의 자리까지 밀어주는 옵션이 있었다. 그녀는 당초 탑승게이트까지만 밀어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지만 항공기 앞까지 밀어주는 서비스를 선택했다. 나연은 기내용 캐리어를 감당할 정신과 힘이 없었다. 방금의 경험에 비추어 아기띠를 하고 있더라고 아이를 안고 캐리어를 미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아까는 한 사장의 휴대폰에서 들리던 한때 익숙했던 남자의 목소리가 나연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빠르게 도망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나연은 탑승 수속을 마치고 이내 아이를 안고 휠체어에 앉을 수 있었다. 출국 검색대로 들어가는 길은 신발을 벗고 겉옷을 벗는 사람들로 매우 복잡했다. 나연도 예외 없이 아기띠와 후드 재킷, 신발을 벗어야 했다. 그녀는 아이를 안은 채 휠체어에서 일어나 검색대를 통과했다. 보안검색요원은 나연의 기내용 가방을 검사해야 한다고 했다. 캐리어 안의 24개들이 액상분유가 분유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지혜의 조언에 따라 캐리어 맨 위에 분유를 넣어 놓아 가방이 크게 헤집어지지 않았다. 액상분유를 하나하나 살펴보던 보안검색요원은 이상이 없다고 이야기하며 열린 캐리어를 검색대 끝으로 밀었다. 아기띠가 아직 검색대를 통과하지 않아 태리를 안고 있던 나연은 요원에게 캐리어를 닫아주기를 부탁했다. 그녀는 가방을 닫는 것은 자신의 의무가 아니라며 나연에게 닫으라고 했다. 나연은 태리를 한 팔과 턱으로 잡고 두 손을 힘겹게 뻗어 지퍼를 닫았다. 캐리어를 내려놓자 휠체어를 밀어주던 직원이 뒤에서 다가왔다. 아기띠와 숄더백까지 챙긴 나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휠체어에 앉았다. 그렇게 나연은 드디어 공항 안으로 들어왔다. 탑승게이트로 가는 길에는 에르메스, 구찌와 같은 브랜드 면세점 매장이 있었지만 나연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태리의 수유텀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연은 게이트에 휠체어를 세우고 직원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낑낑대는 아기를 안고 수유실 방향으로 빠르게 걸었다. 나연은 태리의 기저귀를 갈고 액상분유를 따 먹였다. 태리는 천천히, 하지만 착실하게 두 통을 비웠다. 배가 부른 아기는 잠잠했다. '11시 30분, 120ml.' 나연은 휴대폰의 베이비 앱을 열고 태리의 수유시간과 수유량을 적었다. 탑승게이트로 돌아온 나연은 거대한 항공기를 바라봤다. 항공기 리버리와 동일한 색상의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게이트 앞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곧 이륙 준비가 시작됐다. 휠체어 직원은 탑승교까지 나연을 밀어주고 짧은 인사를 한 뒤돌아섰다. 나연은 아기띠에 아기를 넣느라 잠시 서있었다. 친절한 미소를 띤 직원은 나연을 기다렸다가 그녀를 기내로 안내했다. 나연은 캐리어에서 액상분유 네 개와 겉싸개를 뺐다. 승무원은 나연의 짐을 선반에 올려줬다. 배시넷은 이륙 후에 설치해 준다며 아기는 안고 있으라고 안내했다. 나연은 다시 아기띠를 벗어 무릎에 놓고 아기를 안았다. 아기가 팔에 잘 안긴 덕에 나연은 두 손이 자유로워져 가족과 남편에게 곧 이륙한다는 톡을 보냈다. 창 밖의 계류장은 화물차와 정비요원들로 분주했다. 승무원은 나연이 휴대폰 사용을 마칠 때까지 잠시 옆에 서서 기다린 뒤 그녀에게 마실 것이 필요한지 물었다.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승무원은 언제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알려달라며 자리를 떴다. 


나연은 비로소 태리와 단 둘이 남았다. 비행기 안은 고요했다. 몸이 편안하고 아기는 따듯했다. 전력을 다해 도망쳐 들어온 공항에서 혼이 빠질 듯 정신없는 출국장을 막 지나온 터라 기내는 더 강렬하게 조용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순간 한 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채원의 남편이 타고 온 비행기.' 나연은 씩 웃었다. 등골이 서늘하고 한동안 찝찝한 기분이 들 수는 있었지만 운이 좋게 잘 비껴갔다. 이미 지나간 사건이었다. 그녀는 곧 LA를 이륙할 비행기에 앉아 있었다. 자신이 이동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시속 수백 킬로미터로 날아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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