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비행기가 지나간 길
한국이 점심시간이 되었을 오후 여덟 시 나연은 남편과 통화 중이었다. 지훈은 나연에게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나연이 홀로 한국으로 귀국해야 해야 하는 사정 때문이었다. 예정보다 4주 이른 출산에 지훈도 휴가를 4주 이상 당겨 써야 했다. 하지만 하필 그 시기에 지훈이 리딩하는 PT일정이 겹쳐 올 수가 없었다. 광고 회사 PD의 숙명이었다. 나연은 혼자 귀국하는 산모들도 많다며 괜찮다고 지훈을 위로했다. 실제로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리원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남편이 봤다면 단박에 그녀가 어색하게 군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리저리 굴리는 눈동자, 뜬금없이 뭉개는 대답 등을 통해 무슨 일인지 물었을 것이 뻔했다. 그녀의 남편은 눈치가 빨랐다. 게다가 채원은 쌍둥이라 3주 뒤에 출산할 것으로 예상됐다. 여기서 운이 더 나빠진다면 지훈이 나연의 전 남편을 조리원 안에서 맞닥뜨리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채원을 알아본 순간부터 나연은 언제든 인생이 자신을 조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뒤통수를 더 세게 얻어맞느니 홀로 신생아를 데리고 비행기를 탈 수 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지훈은 나연에게 미안하다며 가방이나 시계를 사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지훈과 나연은 재혼커플답게 결혼 예물을 하지 않았는데 지훈은 이참에 오래갈만한 물건을 하나 장만하자고 이야기했다. 즉흥적이었지만 자신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는지 지훈은 자신이 돈도 보탤 테고 비행기 값과 숙소비를 아꼈으니 꼭 사라고 당부했다. 심지어 LA에는 그 유명한 진짜 로데오 거리가 있지 않느냐고 했다. 약간의 실랑이는 있었지만 나연은 들을수록 지훈의 제안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연은 남편이 오지 않는 편이 좋았지만, 자신의 선호도를 떠나서 그녀가 미국에서 혼자 아이를 낳은 것도, 혼자 모자동실을 한 것도, 그가 스케줄 조정이 안돼 출국 날에 오지 못하는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그의 성의를 좀 받아둘까 했다. 나연은 알겠다며 지훈에게 무엇을 지르든 각오하라고 했다. 지훈은 그제야 안심한 듯 기대하겠다고 했다.
나연이 로데오 드라이브를 찾은 건 출국 사흘 전이었다. 그 사이 나연은 모유수유에 조금 능숙해졌고 태리는 젖을 거부하지 않기 시작했다. 작은 아기는 피부의 붉은 기가 점차 줄어들었고 예측가능한 수유텀이 만들어졌다. 혜원, 미주, 나랑이 며칠 간격으로 출산을 했고 지혜는 남편과 함께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하이윤 또한 퇴소를 했는데 아마 상해로 갔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아이를 낳은 일수가 지나갈수록 히스테릭해진 하이윤은 급기야 마지막에는 아이를 두고 2박 3일 라스베이거스에 다녀오기도 했다. 조리원의 가십에 강한 이쌤은 하이윤이 중국의 재력가 남자의 아이를 의도적으로 낳았는데 기대한 만큼의 금전적 보상이 원하던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추측이었지만 그녀의 야한 라운지룩, 헤어와 메이크업 스타일을 보았을 때 완전히 허무맹랑한 추리는 아니었다. 하이윤은 한국 산모들의 미스터리로 남았다. 1주일 전에는 유독 배가 남산 만한 딸을 품은 한국인 산모가 도착했다. 자신을 은비라 소개한 그녀는 첫째 딸과 둘째 딸, 친정엄마와 함께 입소를 했다. 조리원은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로 시끌시끌해졌다. 이틀 전에는 한국인 커플이 짐을 파레트째로 배송시켜 두고 갔다. 그 둘은 페블비치에서 골프를 예약해 놓았다며 2박 3일 동안 여행을 즐기고 조리원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LA에 도착한 지 보름이 지난 채원에게서는 아직 출산의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나연은 남편이 2주 가까이 보챈 끝에 로데오 드라이브를 방문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혼자 로데오 드라이브의 가게들을 둘러보기에는 쑥스러워 수유과 몸상태를 핑계 삼아 미루고 미뤘다. 조금은 서먹한 사이였지만 나연은 어제 혜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동행을 부탁했다. 여러 명이 매장을 방문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 아닐 것 같았고 이틀 차이로 출산한 미주와 나랑은 여전히 회음부 절개로 인한 고통이 생생해 함께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나연은 혜원의 안목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연에게 부탁을 받은 혜원도 그런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혜원은 나연의 부탁에 기꺼이 응했다. 혜원의 남편이 렌트한 차를 타고 같이 로데오로 가자고 했다. 혜원의 남편은 혜원의 출산일에 맞춰 미국에 도착했다. 이후 3주를 함께 지내다 출국을 하는 일정이었다. 외출 전 혜원은 나연에게 화장을 하고 최대한 예쁜 옷으로 골라 입고 했다. 나연은 전장에 나가는 기분으로 신중하게 옷을 고르고 미국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얼굴에 메이크업을 올렸다.
세 사람은 사명감을 띤 얼굴로 차에 올라탔다. 혜원의 남편이 빌린 차는 남색 BMW X7이었다. 혜원과 남편은 반드시 나연이 한 가지는 살 수 있게 돕겠다고 약속했다. 나연은 이 커플과 함께 출발하는 마음이 든든했다. 출발한 지 30분이 지나지 않아 차는 로데오 드라이브에 들어섰다. 조리원이 있던 동네와는 다르게 로데오는 서울의 도산대로처럼 독일과 이탈리아 브랜드의 자동차들이 길가에 즐비했다. 길거리를 구경하던 나연의 옆으로 테슬라의 사이버트럭이 조용히 추월했다. 길가의 사람들은 요가 셋업이나, 더블 버튼 슈트, 고져스한 원피스, 깃이 잘 접힌 폴로셔츠 등 잘 정돈된 옷을 입고 있었다. 보도 블록 위에는 구겨진 캔 하나 버려져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노숙자가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이 탄 차는 고전 영화 '귀여운 여인'이 묵었다던 호텔 앞을 지나갔다. 그들의 첫 목적지는 에르메스 매장이었다. 혜원은 많이 걸을 수 없으니 핵심만 치고 빠지자고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하지만 농담은 아니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딱 두 곳뿐이었다.
혜원의 남편은 에르메스 매장 앞에 차를 세웠다. 그는 입구의 직원에게 키를 주며 발레파킹을 맡겼다. 혜원의 남편은 혜원에게 차를 업그레이드하길 잘했다고 말했다. 혜원은 입구의 직원에게 '푸시 베이비' 기프트를 사러 왔다고 이야기했다. 점원은 출산을 축하한다며 친절하게 세 명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혜원은 좋은 사인이라며 나연을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려 웃었다. 백인 여성이었던 셀러는 작은 방으로 들어온 그들 앞에 박스 세 개를 가지고 왔다. 골드 컬러의 린디, 에토프 컬러의 에블린, 선홍색에 가까운 루즈비프 컬러의 콘스탄스가 들어있었다. 혜원은 한국에서는 이렇게 워크인으로 구할 수 없는 라인업이라고 감탄했다. 혜원은 콘스탄스의 색상은 호불호가 강하니 린디를 추천한다고 했다. 켈리나 버킨은 한 매장에서도 오래 신용을 쌓아야 살 수 있으니 미련을 버리라고 했다. 혜원은 검은색 켈리를 얻기 위해 필요 없는 부츠와 그릇을 얼마나 많이 샀는지 한탄처럼 이야기했다. 혜원의 남편은 그래도 가치 있는 소비였다고 그녀를 다독였다. 나연이 머릿속으로 대충 한화로 환산한 눈앞의 가방들은 가격은 린디가 1400만 원, 콘스탄스가 1800만 원 정도였다. 다만 LA는 택스리펀도 없었고 9.5%의 세금이 택에서 추가되기 때문에 한국 매장에서 사는 것보다 더 비쌌다.
나연은 이런 고민은 남편과 함께 하고 싶었다. 일생일대의 큰돈을 쓰는 소비라 혼자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가방을 메고 그녀와 잘 어울리는 것인지 지훈에게 듣고 싶었다. 고민의 시간이 30분을 넘어가자 셀러는 결정하면 카운터로 와서 알려달라며 자리를 떴다. 혜원과 남편은 한국보다 비싸도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다고 나연을 설득했다. 나연은 30분이 더 지나도 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것 같아 다음 행선지로 가자고 이야기했다. 혜원은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가방에 천만 원이 넘는 돈을 쓰는 것도 이상하다며 나연을 격려했다. 매장을 나서기 직전 나연은 살 것이 있다며 돌아가 점원에게 스카프 코너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혜원과 그녀의 남편이 발레 맡긴 차량이 준비되기를 기다리는 사이 나연은 핑크색 무늬가 들어간 트윌리를 샀다. 작은 스카프는 원통형 오렌지 박스에 담겨 나왔다. 혜원은 작은 쇼핑백을 들고 나오는 나연에게 이따 가방이 생각나면 다시 매장으로 오자고 이야기했다.
혜원이 정한 두 번째 행선지는 롤렉스 매장이었다. 한국에서는 매장 방문 예약도 전쟁이고 한 번 방문하면 한 달 동안 방문이 막힌다고 했다. 이렇게 매장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라고 했다. 혜원의 남편은 주차장을 찾는데 20분을 썼다. 두 산모를 내려주고 혜원의 남편은 다시 주차 자리를 찾아 떠났다. 매장에 방문하자 셀러가 그녀들을 반갑게 맞았다. 에르메스 매장에서처럼 혜원은 푸시 베이비 선물로 여자 시계를 보러 왔다고 말했다. 셀러는 축하한다며 그녀 둘에게 '럭키걸'을 연발했다. 그는 곧 여성 시계 세 개를 꺼냈다. 며칠 전 재고가 들어와 여성 시계가 이렇게 남아있었다고 덧붙였다.
28mm 초록색 다이얼에 스틸 브레이슬릿, 28mm 다이아몬드 베젤에 다이아가 박힌 로즈골드 다이얼과 플래티넘 브레이슬릿, 31mm 핑크 다이얼에 스틸 브레이슬릿. 나연은 평소 가방이나 시계에 대한 열망이 크지 않은 편이었으나 이 순간에 나연의 마음에는 망설임이 들지 않았다. 첫눈에 초록색 다이얼이 본인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즐겁게 읽었던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음식'에서 주인공 케이시가 선물 받은 시계가 초록색 다이얼의 롤렉스였다는 게 문득 생각이 났다. 그 책을 읽었을 때부터 나연은 언젠가 롤렉스가 생긴다면 케이시처럼 시계를 찬 손목을 머리에 갖다 대며 천연덕스럽게 머리가 아픈 연기를 해보고 싶었다. 20년쯤 뒤에는 태리에게도 이 시계를 물려주는 상상을 했다. 그녀의 딸도 그녀처럼 이 초록색 시계를 좋아하기를 바랐다. 조심스레 확인한 가격은 에르메스의 린디보다 낮았다. 셀러에게 가져가겠다고 이야기하고 카드를 꺼냈다. 나연이 이런저런 감상에 빠져있을 때 혜원의 남편이 도착했다. 셀러는 아쉽게도 남성 시계는 재고가 없다고 했다. 혜원은 남편과 몇 마디를 조용히 나누고 나연의 시계 옆에 있던 다이아 베젤의 로즈골드 시계를 샀다. 나연은 혜원 부부를 바라보며 데려와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자신만 샀으면 미안했을 거라며 혜원도 살 수 있어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혜원은 나연에게 덕분에 운이 좋게 재고가 있는 매장에 올 수 있다고 말했다. 혜원이 산 모델의 가격은 나연의 것보다 다섯 배 높았지만 나연은 상관없었다.
조리원에 도착한 나연은 롤렉스 박스를 들고 방 안을 둘러봤다. 조리원 사람들을 못 믿을 건 아니었지만 귀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놓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녀는 서랍장 안쪽에 시계 박스를 넣고 가방 아래에서 리본으로 장식된 오렌지 박스를 꺼냈다. 나랑에게 줄 선물이었다. 그녀가 양수가 터졌던 나연을 돌봐준 데에 대한 보답이었다. 나연은 그녀가 베푼 호의를 떠나 지난 4주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지켜본 나랑이라는 사람은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함께 또래의 아이를 키우며 친한 친구로 발전할 수 있는 사이었다. 하지만 나연은 포기해야 하는 관계였다. 그녀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과거의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결정이었다. 9년이 지난 일이든 19년이 지난 일이든 일어났던 일이었고, 과거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나연의 현재와 미래를 방해했다. 하지만 나연은 괜찮았다. 그녀에게는 피난처가 있었고 가족이 있었고 동료가 있었고 일이 있었고, 이제는 지훈이 있고 얼마 전부터는 태리가 있고 오늘은 롤렉스도 있었다. 그녀는 점진적이고 충실하게 행복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