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런던으로 이사하기 1

by 얼음발

이민을 두 번가는 사람이 있을까? 여기 있다.


어쩌다 보니 한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또 영국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까닭은, 짧게 말하자면 동거인의 이직이요, 길게 말하자면 요즘 이 나라에 드는 회한과 번아웃과 어쩌고저쩌고 끝도 없이 이어질 것이다.


이유는 차차 풀어낸다 치고, 이민이 결정되고 약 한 달 하고 일주일, 끝없는 짐 정리가 이어지고 있다. 서도호 작가가 그랬던가, 나라를 옮겨 이사할 때는 과거를 얼마나 두고 가느냐는 고민을 하게 된다고. 지금 딱 그런 생각을 하며 짐 정리를 하는 중이다.


고작 둘이 살고 있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짐이 많은지. 마리에 콘도가 와서 보면 다 버리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를 것 같다. 대체 언제부터 모았는지 모르는 엽서와 팸플릿, 다시 펼쳐보지 않을 편지들, 선물로 받은 자잘한 물건, 언젠가는 할 거라고 사다 놓은 크래프팅 도구들, 쓸데없이 쟁여놓은 화장품과 이제는 맞지 않는 옷들, 눈길이 가지 않은 작은 장식품들, 여기저기서 사 모은 초. 쌓이는 물건들을 보며 한숨이 나오고 이렇게 이고 지고 살았나 싶다.


특히나, 지적 허영의 무게가 이다지도 무거운 건지 처음 알았다. 책은 가지고 있던 것에서 절반을 덜어냈는데도 열 박스나 나와서, 나머지는 기부해야 할 것 같다. 앞으로 지금 있는 책을 다 읽지 않고 또 산다면 손목을 잘라... 아니 그치만 버지니아 울프 미 발표 소설이 곧 나온다고 했는데. 손목을 거는 것은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가구를 정리하고 파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 결혼했을 때는 각자 가져온 가구들을 합쳐서 중구난방인 느낌이라 이 집으로 이사할 때는 꽤 돈을 들여 인테리어도 하고 가구도 새로 맞췄는데, 이 모든 것을 보내줘야 한다니. 몇 년 쓰지도 않았는데 절반도 안 되는 값으로 팔고 있다. 꽤 싸게 올렸다고 생각하는데 좀처럼 나가지 않는 가구도 있고, 안 팔릴 거라 생각한 가구가 페이스북 마켓에 올리자마자 나가는 경우도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한 리딩 체어는 제값을 받고 팔고 싶은데, 내 눈에만 예뻐 보이는 거지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지 않은지 입질도 없다. 시장의 흐름이란 알 수 없다..


짐을 정리하면서 무엇이 내 삶을 구성하고 무엇을 덜어내도 되는지 생각하게 된다. 아무래도 나 자신의 코어와 가깝다고 느끼게 되는 것들을 끌어안고 가게 되는 것 같은데, 예를 들면 다이어리, 앨범, 좋아하는 책, 손수 만든 인형, 제일 좋아하는 옷 등등. '나'를 반영하고 기록하는 물건들은 꼭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러한 기록도 결국 과거니까 버리고 가야 하는 걸까? 얼마큼의 과거를 가져가야 나를 구성하는데 무리가 없고 또 나아갈 수 있는 걸까? 다시 펼쳐보지 않는 편지에 다이어리에 얼마나 의미가 있는 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고, 그저 놓아버릴 용기가 없다는 변명으로 상자에 다 때려 넣었다. 아무래도 이 뿌리는 잘라내지 못할 것 같다.


반면에 '내가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몰라서 사긴 했는데 결국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 둔 물건'은 기부했다. 어려운 퍼즐, 일회성 게임, 만들기 세트 등등. 손으로 사부작 거리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작정하고 달려들어야 하는 것들은 마음먹기가 쉽지 않다는 핑계로 시작도 못한 채 다락에 올라가 있었다. 이미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산 것들도 하기 힘든데 한번 해볼까? 하고 사모은 물건은 손이 잘 안 가게 되나 보다. 이렇게 나이를 먹고도 나 자신을 잘 모른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좀 지치기도 한다.


기부는 보통 페이스북 마켓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동네 커뮤니티 사이트에 내가 이런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면 필요한 사람이 코멘트하는 방식으로 보통 여러 개의 물건을 한 번에 가져가는 사람에게 다 주었다. 시간을 맞춰서 주는 것도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는데, 막상 받아간 사람들이 좋아하고 고맙다고 메시지를 보내주고 하는 것을 보면 또 마음이 따뜻해졌다.


있으면 언젠가 필요해서 한 번은 쓸 것 같은데 자주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물건이 제일 애매하다. 예를 들면 자 (ruler). 수평을 맞춘다던가 할 때 필요할 것 같은데 과연 그런 순간이 올지 모르겠고 있다고 해도 다른 물건으로 대체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또 거의 공간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애매하다 애매해.


이런 물건 때문에 사람이 너무 모든 것을 이고 지고 살게 되는 것 같다. 지구는 너무 많은 인간을 수용하고 있고, 인간은 그보다 더 많은 물건을 만들어내고 저장하고 있다. 조금 덜 가지고 덜 사용하고 나누는 사회가 되었으면 싶다.


어쨌든 그렇게 삶의 흔적을 조금씩 지우고 있다. 이 아파트에서는 거의 4년 반을 살았고, 뉴욕에서는 거의 20년을 살았는데, 시간만큼 추억도, 물건도 많이 쌓였나 보다. 착실히 비우면서, 카타르시스가 있는 것 같다가도 그만큼 쌓여가는 박스를 보면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점점 비어 가는 집을 보면서, 마음이 공허해졌다. 나의 한 모서리가 깎여나가는 허무함. 비버가 열심히 지어놓은 집을 제 스스로 무너뜨려야 할 때 이런 기분 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