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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LY Jan 18. 2022

매일 무언가 부서지고 깨지던 집의 아이

다 커버린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정인아미안해 이후의 한동안의 나날들은 하루에 세 개 이상의 안타깝게 죽어버린 아이들의 기사로 시작했다. 오늘은 어디에서 몇 살짜리 아이가 죽었구나, 이번 사건의 가해자는 가족 구성원 중 누구구나... 정인이 이전에 떠났을 무수히 많은 아이들은 잊혀졌지만, 이제 정인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아이들은 단편적으로나마 대중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렇다면 정인이가 되지는 못한, 이른바 조금 덜 불행한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아이들은 모두 신체적 학대 때문에 죽음에 이른 아이들이다. 겉으로 보기에도 상처가 보이며, 누가 봐도 학대를 받은 흔적이 선명한 눈 씻고 봐도 불행한 아이들만이 미디어에 노출되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상처만 상흔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한 마디 말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듯이, 가스라이팅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듯이, 신체적 폭력 이외에도 많은 요인이 여린 아이의 삶에 흉터를 남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은 어른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폭언, 협박 등의 정서적 학대를 가해라고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가해로 인지한다 해도 물리적 폭력보다 더 약한 수준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사회적 시선은 법이 정서 학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선명히 투영되어 있다. 


    정서학대에 대한 첫 판례는 2011도 6015 판결이다. 즉, 201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대법원이 정서학대에 대한 개념 정의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내려진 정의조차 '정서학대'자체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다. 2011도 6015 판결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구 아동복지법(2014. 1. 28. 법률 제12361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17조는 아동에 대한 금지행위로 제3호에서 ‘아동의 신체에 손상을 주는 학대행위’를 규정하고, 별도로 제5호에서 ‘아동의 정신건강 및 발달에 해를 끼치는 정서적 학대행위’를 규정하고 있는데, 아동의 신체에 손상을 주는 행위 가운데 아동의 정신건강 및 발달에 해를 끼치지 않는 행위를 상정할 수 없는 점 및 위 각 규정의 문언 등에 비추어 보면, 제5호의 행위는 유형력 행사를 동반하지 아니한 정서적 학대행위나 유형력을 행사하였으나 신체의 손상에까지 이르지는 않고 정서적 학대에 해당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즉, 신체적 학대의 이전 단계로서 정서적 학대를 바라볼 뿐, 학대의 고유한 종류 중 하나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유추해낼 수 있다. 이는 같은 판례의 "제3호의 행위는 유형력 행사를 동반하지 아니한 정서적 학대행위나 유형력을 행사하였으나 신체의 손상에까지 이르지는 않고 정서적 학대에 해당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라는 문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와 더불어 양형에 있어서도 체학대죄가 내려진 학대 가해자에게만 징역형이 선고되고, 정서학대죄 판결을 받은 나머지 가해자들은 벌금형이 선고되었다. 즉, 정서학대를 신체학대와 동일한 범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 신체학대보다 정도가 덜한 학대로 바라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세원, 2019)


    이처럼 정서적 학대는 신체학대에 비해 소외되어 있으며, 그 피해자들은 다시 한번 갈 곳을 잃는다. 그들은 도움을 받을 길은커녕 한 줄기의 관심을 받기도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 나 역시 그랬다. 우리 집의 물건들은 하루가 다르게 부서졌다. 어느 날은 식탁 의자가, 어느 날은 엄마의 휴대폰이, 또 어느 날은 나의 책들이. 물건이 부서지는 날들은 그나마 평화로웠다. 자신의 화를 못 이겨 소리를 지르다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린 아빠, 울분을 삭이지 못해 벽에 머리를 박으며 울던 엄마, 한밤중에 집에 들어온 아빠의 이유 없는 발길질에 눈을 뜬 나. 가해자와 주변 어른들은 그저 "어른이 그럴 수 있지", "어느 집이나 그렇다"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그래도 가족인데 사랑해야 하지 않겠니?", "너를 사랑하는 서투른 방식이란다"라는 말을 들으며 나는 이 모든 것이 정서적 학대라는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어렵게 학대 사실을 인지한 이후에도,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에 내가 받은 학대는 '정도가 너무 약한' 학대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좌절했다. 


    그러나 내가 받은 학대는 분명히 존재한다. 비뚤어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학대는 나에게 거대한 흉터를 남겼고,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무사히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았다. 우울증과 악몽에 시달리는 날들은 계속 이어진다. 여엇한 성인이 되었음에도 가해자로부터의 실질적인 위협은 계속되고 있다. 문제를 해결한 듯 보이지만, 사회적 시선은 여전히 따갑기만 하다. 이 모든 것은 명백히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문제이며,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분명 나와 같은 길을 걷은 사람들, 아직 그 길을 힘겹게 걸어 나가고 있는 아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 중 적지 않은 비율이 여전히 흉터를 안은 채, 혹은 상처를 입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나의 이야기를 공유해보고자 한다. 





이세원(Lee Sewon)."정서학대와 신체학대의 법적 정의와 관계에 대한 연구 - 우리나라 정서학대에 대한 최초 대법원판결을 중심으로 -." 사회복지법제연구, (2019): 6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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