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규칙이 만드는 단정한 일상
외주 없이 한 달 반을 보냈다. 일시적으로 마주한 마감 없는 삶은 어찌나 사람을 느슨하게 만드는지. 체력이 닿는대로 기분 내키는대로 일 하다 지치면 노트북을 접었다. (외주가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조금씩은 있었다.) 노는 관성이 완전히 자리 잡은 2월 초, 새로 외주가 들어 왔다. 그것도 두 건이나. 요즘 같은 비수기에 철 없는 투정같은 소리일 수 있겠지만, 작년 말 쎄게 번아웃을 겪고 난 후 그 후유증이 여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일이 손에 안잡혔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려니 설상가상으로 무기력증까지 왔다.
해야할 일이 있을 때 오는 무기력증은 정말이지 사람을 갉아먹는다. 무기력증으로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생산성이 낮아진다. 해야할 일을 제때 처리하지 못해 무능력하게 느껴지고, 심하게는 자기혐오가 온다. 부정적인 감정은 다시 무기력증의 수면 아래로 사람을 아주 깊게 끌어내린다. 무기력이 나를 잡아먹기 전에 빨리 일상을 회복해야 했다. 그래서 KMN 기법- 2019년을 강타한 김명남 번역가의 40분 일하고 20분 쉬는 업무 사이클 -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KMN을 하려니 40분을 내리 일해야 하는 것이 꽤 부담스러웠다. 충동적이며 자유분방한 성격, 검사를 받아보진 않았지만 성인 ADHD에 가까운 상태일 것이 분명한 산만한 나에게 40분간 집중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동기 부여를 위해 노션에 KMN 기록 일지 페이지를 만들었다. 매일 목표 KMN을 적고, 달성 KMN을 적는 표를 만들었다. 일자 별 페이지에는 투두리스트로 숫자 + KMN을 적어두고 정해진 KMN을 달성할 때마다 체크해서 진척도를 표기하도록 했다. 학생 때부터 목표로 한 자습서 페이지를 적어두고 그 페이지만큼 공부를 완료하면 줄을 긋는 것이 계속해서 공부를 하게 한 동기부여 방식이었다. 나만의 KMN 성취표를 만들어 줄을 긋는 식으로 성취감을 얻기로 했다.
KMN의 일하는 시간 40분을 보내며 계속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괜히 물 한 잔 마시고 싶고, 과자도 먹고 싶고 트위터에 무슨 재미있는 소식이 없나 궁금했다. 한 번, 두 번 40분 일하고 20분 쉬는 사이클을 반복하며 조금씩 KMN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40분을 꾹 참고 일하면 20분이라는 긴 시간을 마음껏 보낼 수 있다는 자유를 경험하니 그깟 40분 참고 일하는거 뭐 어렵나 싶었다. 그냥 40분을 내리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20분의 쉼이 약속된 40분이라고 생각하니 버틸 힘이 생겼다.
20분이라는 시간이 숫자로 보면 꽤 짧게 느껴진다. 그 20분 간 뭘 할 수 있을까 싶은데, 사실 최근 KMN을 시작해 약속된 20분의 쉬는 시간을 만들며 내 일상은 매우 달라졌다.
설거지, 빨래 돌리기, 테이블 정리 등 10분 내외로 끝낼 수 있는 집안일을 할 수 있다. 내가 집에서 일하기 싫었던 이유는 집이 완전히 정리된 상태가 아니라면 자꾸 집안일에 신경쓰여 집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KMN을 하며 쉬는 20분 동안 잠깐이라도 집을 정리할 수 있어 집이 조금씩 깨끗해졌다. 집안일을 잠시 할 수 있는 20분을 보장받으니 일하며 집안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20분 동안 고양이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우리집 두 고양이 수라와 썬더는 집사와 스킨십을 아주 좋아하는데, 평소에 밖에서 일하니 아침, 저녁 잠깐을 제외하곤 놀아줄 시간도 쓰다듬어줄 시간도 부족했다. 그러나 매 40분 부터 정시까지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되자 자연스럽게 고양이와 함께하는 시간도 늘었다. 시간도 15분이면 충분하다. 10분 놀아주고 5분 쓰다듬어주면 고양이들은 이제 모두 충전 되었으니 그만해도 되었다며 뒤돌아선다. (...)
또 다른 20분 활용법으로 책을 읽는다. 예전에 KMN을 할 때 쉬는 20분 동안에도 컴퓨터를 붙잡고 있었다. SNS에 새로 올라온 포스트를 확인하거나 웹서핑을 하거나 온라인 쇼핑을 했다. 일하던 장소에서 일하던 도구로 다른 행위를 해보았자 그 시간이 전혀 쉬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20분 동안 컴퓨터에서 멀어지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평소에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할 때, 비행기를 탈 때, 자기 전에 잠깐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려고 꾸준히 노력했지만, 생각보다 책 읽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쩌다 여유시간이 생겨도 영상 콘텐츠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책 대신 넷플릭스나 유튜브 세계로 다이브했다. KMN에서 활용하는 쉬는 시간 20분은 책 읽기에 딱 좋은 정도의 시간이다. 영상콘텐츠는 계속해서 다음 영상을 소비하게 만드는 중독성이 있는데, 책은 한 챕터를 읽고 잠시 멈출 수 있다. 그렇게 읽던 책 중에 진도가 안나가던 책을 KMN을 시작하며 100페이지 가까이 읽었다.
얼마전 일과 쉼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글을 썼다. 여유시간 없이 일에만 함몰되어 보낸 시간은 매 순간이 불행했다. 비우고 채우는 균형이 없이 일하는 것은 여러가지로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사실 내가 일과 쉼의 균형을 맞추지 못했던 이유는 어떤 일이 있으면 그 일을 끝낼때까지 마음을 쉬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쉬지 못한다면, 물리적 시간을 정해 쉬게 만들어야 한다. 그 방법이 KMN 작업법이다. 아직도 쉬는 20분에 더 일하고 싶은 생각이 계속 솟아오르지만, 원하는대로 보내는 20분의 매력을 느끼며 점차 쉬는 20분에 적응하고 있다.
어제는 아침 10시부터 1시까지 3KMN을 하고 점심을 먹고 2시부터 5시까지 3KMN을 했다. 5시부터 7시까지 외부 일정을 소화하고 저녁 식사를 하며 잠시 쉬었다. 그리고 7시부터 10시까지 3KMN을 추가로 했다. 보통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면 일을 끝내고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데, 중간중간 쉬며 일했더니 일을 마치고도 책을 읽을 힘이 남아 있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규칙은 답답한 감옥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유분방하고 예측불가능한 하루하루가 삶의 활기를 만들어낸다고 믿었다. 물론 그런 시기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작은 규칙이 삶의 생기를 만드는 근간이라고 느낀다. 마음 먹는대로 사는 것보다 일상에서 작은 습관과 규칙이 더 넓은 범위에서 내가 살고 싶은 방식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비로소 일과 쉼의 균형을 맞출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3x년을 살며 정립한 몇 가지 삶의 원칙 중 하나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포기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매일 운동을 하기로 했다. 4일 째 운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 쉽게 포기한다. 역시 나는 안된다고. 4일 째 운동을 하지 못했어도 5일째 다시 하면 된다는 걸 몰랐다. KMN도 마찬가지다. 사실 KMN을 시작하고 이틀째 되는날 바로 정해진 KMN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다. 내일 또 하면 된다.
일이 많아지면 20분의 쉼이 무색하게 몇 시간이고 앉아 일을 할지도 모른다. 번아웃이 오고 무기력이 강해질때면 40분을 집중하는 것조차 어려워질수도 있다. 힘들게 만든 습관이, 규칙이 또 무너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다시 하면 된다. 일이 많을 땐 50분 일 10분 휴식으로, 일이 너무 안될 때는 20분 일 10분 휴식으로 나에게 맞는 방식을 찾고 적용하면 충분하다.
무너지더라도 포기하지는 말자고 되뇐다. 어쨌든 계속 일할 것이고, 지치지 않고 나를 돌보며 하루를 보내야 하므로.
프리랜서의 번아웃을 주제로 한 팟캐스트 '큰일은 여자가 해야지'에서 더욱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김명남 번역가님이 소개하는 KMN 작업법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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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은 여자가 해야지'는 일과 여성, 프리랜서의 이야기를 다루는 팟캐스트입니다. 매거진 <딴짓> 박초롱과 매거진 <프리낫프리 Free, not free> 이다혜가 공동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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