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은 필수고, 스노비즘이 독서의 목적이 되어선 안된다.
그런 생각을 했다. 재독은 필수고, 스노비즘¹이 독서의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고 말이다.
최근 흥미가 생긴 책의 리뷰를 살펴보던 중, 흥미로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건 마치 절묘하게 짜여진 해학 같았다.
좋아요가 가장 많은 리뷰 두 개를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아래와 같았다.
“있는 척 썼지만 혼란스러운 의식의 흐름 그대로 휘갈긴 정신병자의 낙서일 뿐인 글”
“멍청한 것들은 이해 못 할 책, 리뷰 보니 한심한 것들 많네요. 나라가 이 모양인 게 이해됨”
나머지 리뷰들도 마찬가지였다. 절반은 책의 난해함을 비판했고, 나머지 절반은 책의 난해함을 비판한 절반을 “한심한 것”이라 부르며 비판했다. 어느 쪽도 잘했다고 칭찬받을 만한 행동은 아니고, 어느 쪽의 의견이 맞다고 이 시점에서는 의미가 없어 보였다.
전자는 재독의 필요성을 망각했다. 자신이 한 번 읽으면 모든 책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다는 많은 독자들의 어설픈 자신감 때문에 발생했다. 동화책조차도 일독으로 모든 내용과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데, 독서 난이도가 높은 책을 상대로 일독으로 모든 것을 이해해 보겠다는 자신감은 오만이다.
심지어 위 리뷰처럼 실제로 “정신병자의 낙서일 뿐인 글”처럼 보이는 작품 중에도 인류의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는 것들이 있다. 나는 위 리뷰의 책을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비교하면, 필요한 정보만 적힌 식당 메뉴판이라고 평가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포함해 니체의 여러 저작들은 심각하게 난해하며, 심지어 일부 텍스트는 니체가 정신병에 시달렸을 때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텍스트들은 수십 번이고 재독을 해도 100%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정신병자의 낙서”라고 매도해 버릴 순 없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떠먹여 주는 텍스트에서 우리가 도대체 무슨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 데이터화된 정보에서 우리는 감동을 느낄 수 없다. 마치 우리가 메뉴판에서 어떠한 감동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수백 년, 심지어 수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랑받는 저작들은 하나같이 이해하기 어렵다. 작가의 의도는 꽁꽁 숨겨져 있고, 독자에게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를 선사한다. 신비주의는 우리를 매혹한다². 그리고 물음표는 적당한 때에 느낌표로 바뀐다.
후자의 경우는 스노비즘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요즘 소셜 미디어에서 인문학 독서를 추천하는 콘텐츠의 공통점이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독서를 통한 내면의 성장, 깊은 사유, 그리고 삶의 변화 등을 독서의 미끼로 삼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솔직함을 콘셉트로 앞세우며 “독서는 똑똑해 보이기 위해”, “지적 허영심을 위해” 읽어야 한다는 후킹을 사용한다. 말 그대로 스노비즘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이는 강력한 후킹임에는 틀림없다. 실제로 지적 허영심, 혹은 지적인 이미지는 독서를 자극하는 강력한 동기부여이다. 하지만 스노비즘이 동기가 될 순 있어도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독서를 하면서 얻어야 할 자세는 “무지의 지”³이지, 남들을 깔보는 태도가 아니다.
게다가 철학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지식으로 남을 깔보는 태도가 얼마나 허무한지 알 것이다. 소설을 충분히 읽어 본 사람이라면 더 넓은 세계관, 더 아름다운 언어, 그리고 수사를 통해 “한심한 것들 많네요” 같은 비난 대신, 완곡하게 재독을 권유하여 지식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독서의 목적은 스노비즘이 아니다. 만약 독서의 목적이 스노비즘이라면,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은 독서가 아닌 정보 수집이다. 지식이 도구화되면 정보가 된다. 그리고 정보의 동사는 “수집하다” 혹은 “조사하다”이지 “독서하다”가 될 수 없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텍스트를 읽는 것을 독서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책은 한 번에 이해할 수 없다. 재독은 필수다. 독서의 목적은 스노비즘이 되어선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