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의 반의어는 죽음이 아니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했다. 생존의 반의어는 죽음이 아니라고.
생존의 반의어는 죽음이 아니다. 생존의 반의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이다. 반면, 죽음의 반의어는 살아감이다. 생존하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매일 죽음을 경험한다. 죽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매 순간 죽음을 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애초에 죽음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모든 생명체는 모든 생명 활동이 정지된 상태로 부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또한 자신이 언젠가 그런 멸망의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병든 동물은 그저 자신의 신체적 고통과 신체적 결함에 의한 정신적 불안감만 느낄 뿐, 자신의 생명 활동이 곧 정지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낮은 인식 수준에서 비롯된 이러한 현상은 동물에게는 오히려 큰 축복이다. 그들은 살기 위해 살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은 죽기 싫어서 살아간다.
사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개념의 정의상 죽음은 삶의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인식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다. 다만 타인의 죽음을 목격한 경험에 자신의 상상을 덧붙여 공상적인 경험을 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기어코 삶의 바깥에 존재하는 죽음을 자신의 삶 안으로 가져왔다. 이는 진화론적인 관점에서는 큰 이익이 될 수 있다. 살아감보다는 생존하는 쪽이 말 그대로 생존에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과 함께 살아가야 할 인간 개인의 차원에서는 이보다 끔찍한 저주는 없다. 동물은 살아가지만 인간은 죽어 간다. 적어도 인간 본인 스스로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언젠가 자신에게 닥칠 죽음을 기다리며 약 80년짜리 시한부 인생을 살아간다.
이러한 논리에서 지구에서 죽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다. “죽다”라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그 개체가 살아서 경험을 해야 하지만, 죽는 그 순간 바로 직전에 그 개체의 경험은 종말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와 죽음을 기어코 경험해 낸다.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짐승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적이 없다.” 오직 인간만이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는 운명과 함께 에덴에서 추방당했다 ¹.
조르주 바타유는 내재성을 잃어버린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재성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보존하는 세계, 지속적 현실을 위해서만 창조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². 생존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즉 자신이 죽지 않을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생존하는 사람에게는 오직 유용성만이 가치 있으며, 위버멘쉬의 대척점에 있는 마지막 인간을 닮았다. 그들은 위험과 고통을 제거한 인간이며, 오직 자신의 건강만을 신경 쓰며, 결과적으로 가장 오래 살게 될 존재다 ³.
삶의 의지를 인간의 가장 중요한 미덕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니체가 왜 마지막 인간을 혐오했는가? 마지막 인간은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닌 생존의 의지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매일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은 “살아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는 산 송장 같은 존재다.”⁴
1. 창세기 2장 17절
2. Georges Bataille. Religion Theory. 1985.
3. Friedrich Nietzsche. Thus Spoke Zarathustra. 1883.
4. Byung-Chul Han. The Agony of Eros.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