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7): 생존하는 인간 (2)

내재적 인간, 위버멘쉬, 그리고 시지프스

by 이다이구

이전 에피소드, "생각(6): 생존하는 인간"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번에는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생각해보자.


바타유의 내재적인 인간일까. 그들은 유용성을 의도적으로 파괴한다. 그들은 오직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며 외부 기준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스토아적 철인상과 비슷하지만, 미래를 향한 목적성을 완전히 부정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그들은 고통과 슬픔마저도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 어찌 되었든 그것은 자신의 삶의 일부이고, 자신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를 향한 목적성을 부정하는 인간을 과연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목적이 없다면 인간이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 목적 없는 세상에서 그저 살아가는 카뮈의 시지프스 ¹는 말 그대로 신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은 아닐까? 니체의 말대로 우리는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² 때문에 고통받는다. 인간은 고통이 의미를 가져다준다는 확신만 있다면 오히려 고통을 찾아다니는 존재다. 이는 고행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의 신체적 고통은 완벽하게 의미화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고통을 체험한다. 인류의 역사는 현대 사회와는 달리 원래 고통을 회피하는 역사가 아니라 의미를 찾는 역사였다. 고통 자체는 악이 아니며, 오히려 "고통이 없다면 지구는 우주라는 사막 속 모래 한 알에 불과하다."³


인간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없다. 반드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의미가 사라진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고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미 안에는 목적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목적성은 기본적으로 미래를 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을 부정하는 내재적 인간은 살아가는 인간의 후보가 될 수 없다. 내재적 인간은 살아가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그저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생존하는 인간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삶에 대한 강한 의지도 결여되어 있다.


그렇다면 니체의 위버멘쉬일까? ⁴ 니체의 위버멘쉬 역시 고통을 긍정한다. 하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고통도 내 성장의 수단이 된다"는 의미 속에서 긍정된다. 또한 동시에 "성장"이라는 목적성도 갖는다. 이처럼 위버멘쉬는 무의미한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해 나아가는 사람을 지칭하며, 이는 살아가는 인간을 잘 설명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충분하지는 않다. 위버멘쉬의 목적은 오직 현실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위버멘쉬는 이상을 숭배하지 않는다. 니체의 위버멘쉬는 자신만의 가치를 현실 속에 창조해내야 한다. 위버멘쉬는 불가능한 꿈을 꾸지 않으며, 니체는 현실에서 벗어난 초월적인 꿈을 혐오했다.


꿈에 대해 생각해보자. 꿈은 실존적 존재의 특권이다. 꿈은 오직 인간만이 꿀 수 있다. 신(본질적 존재)은 꿈을 꾸지 않는다. 본질적 존재에게는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념적 정의상 신은 어디서나 언제나 존재해야 한다. 모든 가능성을 이미 이루고 있어야 하며, 그 순간 가능성은 필연성이 된다. 하지만 인간은 찰나에만 존재하며, 대부분을 가능성으로서 존재한다. 지금은 내가 방 안에서 글을 쓰고 있지만, 한 시간 뒤에는 밖에서 눈을 맞고 있을 수도 있고,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을 수도 있으며, 부엌에서 밥을 먹고 있을 수도 있다. 심지어는 죽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지금이라는 찰나의 순간을 제외하면 오직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실존적 존재의 가능성은 곧 꿈을 꿀 수 있는 능력으로 이어진다. 신은 계획대로 인도할 뿐 꿈을 꾸지 않는다. 가능성에서 발생한 꿈은 실현 가능성이 100%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만약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꿈이라고 할 수 없다. 꿈은 현실에 묶여 있을 수 없다. 니체의 위버멘쉬는 이상의 세계에 있는 꿈을 계속해서 현실로 가져오려 한다. 하지만 꿈은 완전히 현실이 되어서도 안 되고, 완전히 이상의 세계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꿈은 현실과 가능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만 숨 쉬듯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존재하는 꿈은 계속 우리 눈앞에 아른거리며 우리를 유혹한다. 우리는 금방이라도 잡힐 듯 보이는 신기루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살아야 해."


살아가는 인간은 위버멘쉬처럼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창조해내는 존재다. 내재적 존재처럼 자신이 창조해낸 가치를 위해 유용성을 의도적으로 파괴할 수도 있는 존재다 ⁵. 하지만 살아가는 인간이 유용성을 파괴하여 미래를 불안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은 미래를 부정하고 현재만을 긍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불안한 미래 속으로 자신을 던지기 위함이다. 살아가는 인간은 불안한 미래를 긍정한다. 현실 속에서 이루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하지만 초월적인 꿈을 추구한다. 니체의 우려와 달리 초월적 꿈은 현재를 약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막의 방황자가 신기루를 목격했을 때처럼 인간을 누구보다 현재에 몰입하게 만든다.


신기루는 죽어가는 인간조차 최후의 한 걸음 너머의 걸음까지 걷게 만든다. 시지프스는 계속 돌을 굴린다. 영원한 형벌, 영원한 무의미성에 갇힌 그는 계속 삶을 버틴다. 그는 형벌에 대한 반항으로 계속 돌을 굴리며, "우리는 그가 행복할 것이라고 상상해야 한다." ⁶


살아가는 인간도 계속 돌을 굴린다. 그에게는 초월적 꿈이 있고, 그 가능성 때문에 행복하다. 초월적인 목적성은 그의 형벌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그 꿈이 실현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살아가는 인간은 가능성 속에서 계속 돌을 굴린다. 그는 철학적 자살을 거부하면서도 초월적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현재에 몰입하며 행복하다.


살아가는 인간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다.




주석


1. 신들을 기만한 죄로 영원히 돌을 굴려 산의 정상에 올려다놓는 형벌을 받은 그리스 신화 속 인물. 알베르 카뮈는 에세이 "시지프스 신화"에서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신의 실존 자체를 긍정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상징한다.

2. Friedrich Nietzsche.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1887.

3. Anatole France. The Garden of Epicurus. 1894.

4. 니체 제시한 인간상으로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며 자신의 고통마저도 긍정하는 존재를 의미

5. Georges Bataille. Theory of Religion. 1973.

6. Albert Camus. The Myth of Sisyphus. 1942.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