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믿음의 도약, 신 앞에 선 단독자
Q는 입고 있던 코트를 잔뜩 여몄다. 방금까지 지중해 연안의 따뜻한 기후를 즐겼는데 순식간에 혹독한 덴마크의 겨울바람을 맞이하게 되었다. Q는 눈 내리는 덴마크의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눈 내리는 저녁의 풍경이지만 사실 이제 막 오후 3시를 지났을 뿐이다. 이 풍경은 모두를 차분히, 조용히, 가끔은 우울하게 만든다.
Q는 홀로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을 목격했다. 세상의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듯한 모습의 이 신학자는 Q가 찾고 있는 사람이다. Q는 가방에서 시간 이동 장치를 꺼냈다.
K—I—E—R—K—E—G—A—A—R—D
키르케고르,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후대에 실존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그의 철학은 말 그대로 키르케고르 이전과 이후의 세계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그의 위대한 저작과 논문이 덴마크어로 쓰이지 않았더라면 쇼펜하우어처럼 노후에라도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덴마크인이었고, 덴마크 겨울의 저녁처럼 우울하게, 모두에게 인정받지 못한 채로, 홀로 벤치에 앉아 있을 뿐이다.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고 있는 졸업을 코앞에 둔 대학생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현실과 부딪힐 때가 많네요. 안정적인 삶도 포기하긴 쉽지 않고요. 누군가는 20대에 이런저런 도전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지금부터 착실히 준비해야 나중에 후회 없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선택지가 너무 많은 것이 오히려 부담처럼 느껴집니다.
키르케고르에게 상담 부탁드립니다.
이번 상담 내용이다. Q는 내용을 다시 한 번 숙지했다. 그리곤 조심스레 키르케고르 옆에 다가가 앉았다. 키르케고르는 낯선 남자가 자신의 옆에 앉았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계속 땅을 쳐다보고 있었다. 키르케고르의 관심을 끌기 위해 Q는 헛기침을 하곤 “날이 춥군요.”라고 말했다.
키르케고르 | 그렇군요.
Q | 이 추운 날에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키르케고르 |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Q | 혹시 목사님이신가요?
키르케고르 | 아니요. 목사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닙니다. 철학자도 아니죠. 그냥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제가 목사가 되길 바랐지만 말입니다.
키르케고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Q는 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상담 주제로 자연스럽게 넘어갈지 갈피를 못 잡았다. 차라리 괴팍한 헤라클레이토스와의 상담이 훨씬 쉬웠다.
Q | 무슨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까?
키르케고르 | 죽기 전에 제 사명을 다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앞으로 몇 년 더 살지 못할 것 같아서요.
Q |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장난으로도 그런 말을 하시면 안 됩니다.
키르케고르 | 장난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모두 33살이 되기 전에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저희 7남매 중 저와 제 형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렇게 되었죠. 그러니 앞으로 한 2년 정도 남았군요.
키르케고르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입김이 입 밖으로 쭉 나왔다가 금세 사라졌다.
키르케고르 | 뿐만 아니라 상속받은 재산을 매일매일 갉아먹는 인생이라 상속받은 돈이 밑바닥을 드러내면 꼼짝없이 굶어 죽겠죠.
Q | 그럼 일을 해서 돈을 벌면 되지 않겠습니까?
키르케고르 | 그렇죠. 하지만 저는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위해 살기로 저는 선택했습니다.
Q | 누구나 그런 고민을 하죠.
Q는 우연히 상담 내용과 비슷한 주제가 나오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끌기 시작했다.
Q | 도전과 안정적인 삶이죠. 누구나 그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명확한 답이 없어서 더욱 고통스럽죠. 정답이 없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학생의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키르케고르 | 도전을 하십시오. 후회하게 될 겁니다. 안정적인 삶을 선택하십시오. 마찬가지로 후회할 겁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습니다.
Q | 지독한 운명이군요.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하기가 두렵습니다. 특히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을 선택 앞에서는 더욱 그렇죠.
키르케고르 | 누구나 그렇습니다. 인생의 중대한 결정 앞에 우리는 큰 불안을 느낍니다. 왜 그렇죠? 이성적으로 옳은 선택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성적인 계산으로 뭐가 더 나은지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선택 앞에서 어떠한 불안도 느끼지 않겠죠. 더 좋은 선택을 하면 되니 말입니다.
Q |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용기가 필요한가요?
키르케고르 | 믿음이 필요하죠. 저는 이것을 믿음의 도약이라고 부릅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확신할 수 없어도, 가끔 우리는 그 불확실성으로 몸을 던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그저 믿음을 가지는 수밖에는 없죠.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선택을 뒤로 유보해 버릴 것입니다. 미루고 미루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말이죠. 선택권이 사라지는 상황 말입니다.
Q | 그렇게 믿음의 도약으로 선택을 하고, 또 그 선택을 후회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요? 그건… 뭘랄까. 너무 비관적인 생각 아닐까요?
키르케고르 | 그렇죠. 하지만 후회가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마냥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느 선택을 하든 후회가 필연적이라면 후회는 실패를 의미하지 않죠. 그저 선택 뒤에 따라오는 필연적 조건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에 의한 책임을 오롯이 본인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Q | 도전을 선택했다가 실패한다면 그 리스크는 본인의 몫이라는 것이군요.
키르케고르 | 맞는 말이지만 제 함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신 앞에 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신이 당신에게 묻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 심판의 때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길래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라든가 “부모님이 이렇게 하라고 했어요.”라고 변명할 순 없습니다.
키르케고르는 붉어진 손을 슥슥 비비며 말을 했다. 시선은 여전히 땅을 향하고 있다. 마치 Q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말이다.
키르케고르 | 우리는 평생을 군중 속, 사회 속 일원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것이 마치 우리의 신분인 양 착각하고 말죠. 하지만 우리는 결국 언젠가 신 앞에 홀로 서야 하는 단독자입니다. “왜 그렇게 살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 옆에는 가족도, 군중도, 사회도 없습니다. 신 앞에 선 단독자, 그것이 우리의 진짜 신분인 것입니다.
Q | 그 말은 마치 안정적인 삶이 아닌 도전하는 삶을 살라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사명을 선택하고 신 앞에 당당히 서라는 말… 맞습니까?
키르케고르 | 하하. 제 말을 전혀 듣지 못했군요. 제 말은 저에게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택이 단순히 당신의 직업을 선택하는 일이라면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선택은 자기 자신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신 앞에 어떤 모습을 설지 정하는 일입니다. 그런 것을 제가 어떻게 대신 정해 드리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발견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알려드리죠.
키르케고르는 한바탕 웃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르케고르 | 도전을 선택하십시오. 당신은 후회할 겁니다. 안정된 삶을 선택하십시오. 마찬가지로 후회할 겁니다. 옳은 선택은 없습니다. 잘못된 선택도 없습니다. 우리는 선택한 삶과 선택하지 않은 삶을 비교할 수도 없는 처지이지 않습니까? 다만 스스로 선택하십시오. 신 앞에 섰을 때 여러분 대신 변명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Q | 선생님은 사명을 선택했지요? 어떤가요? 그런 삶은?
키르케고르 | 아주 많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크게 웃었다. 그는 손을 흔들며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멀어졌다.
Q는 키르케고르와의 짧은 대화를 다시 곱씹었다. 마치 한겨울 덴마크의 날씨같이 우울한 철학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철학이다. 동시에 몽상가적인 철학이기도 하다. 이 묘한 철학을 Q는 벤치에 한동안 앉아 정리해야 했다. Q는 노트를 펼쳤다.
1.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2. 어떠한 선택은 이성적인 계산의 범위 밖에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무한정 선택을 유보하는 것이 아닌 믿음의 도약을 해야한다.
3. 신 앞에 선 단독자. 선택의 책임은 나 자신만이 질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나의 선택을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