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가 공격받지 않는 환경
'끼리끼리'라는 말이 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도 있다. 어느 명언에는 '당신은 당신이 가장 친한 친구 5명의 평균치이다'라는 말도 있다. 왜 우리는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이른바 '끼리끼리' 어울리게 되는 것일까? 이를 자아형성 과정의 관점에서 집중해서 풀어보도록 하겠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격 구성으로 원초아(id), 자아(ego), 그리고 초자아(superego)로 구분한다. 원초아는 쉽게 말해 생물학적인 '나'이다. 본능이자 무의식의 영역이다. 초자아는 원초아의 정반대의 영역이다. 완전한 의식의 영역이며, 생물학적인 요소를 거부하는 행위, 즉 양심, 도덕, 그리고 이상 등을 추구하는 '나'이다. 그리고 자아(ego)는 원초아와 초자아 사이에서 항상 갈등하는 현실의 '나'이다.
이는 한 개인의 성격 구성의 3가지 요소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이를 인간의 발달단계의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 원초아의 상태이다. 먹고 싶을 때 먹고, 꼬집고 싶을 때 꼬집고, 울고 싶을 때 울고, 화가 나면 화를 낸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그 상태에 머물면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초자아를 추구하며 원초아를 늘 억누르며 살아간다. 모든 사람들이 초자아 단계까지 가는 것은 아니지만 초자아의 단계까지 가기 위해 노력을 한다. 그렇다면 나, 자아는 언제 생성이 될까? 태어날때부터 천천히 만들어가긴 하겠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시기는 바로 사춘기 때이다. 그리고 끼리끼리, 즉 자신만의 그룹을 만들어 친한 친구끼리만 노는 현상이 두각 되는 시점도 바로 사춘기부터이다.
자기감정에 늘 솔직하던 아이들이 이제 어떤 행동을 하면 학교에서, 사회에서 부끄러워지는지, 남으로 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을지 알게 되는 순간이 사춘기의 시작이다. 마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되는 순간과 비슷하다. 발달심리학의 거장 에렉 에릭슨(Erik Erikson)은 청소년기의 특징으로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차이에 민감하다고 설명한다. 이는 이 시기부터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순간을 아이들만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순간이라고 말한다. 또한, 잘못된 행동으로 혼이 날 때는 조용히 무릎 꿇고 손을 들던 아이가 작은 잔소리에도 문을 박차고 나가고 반항을 한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뿐이지만,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그 아이에게 소중한 '자아'가 생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증거이다. 사춘기의 청소년들이 자신을 좀 더 존중해달라고 소리치는 이유가, 바로 그들에게도 이젠 지키켜야할 소중한 자아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제 사춘기 청소년들이 지적받는 것은, 남으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의 행위가 아닌 바로 어느덧 형성된 그들의 자아, 즉 '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 큰 성인도 마찬가지이다. 몸에 흉터가 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자신의 '자아'에 작은 생채기라고 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자아'가 부정당하는 것은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는 고통이다. 그렇기에 어른들은 '페르소나'라는 방어막으로 자신의 자아를 꽁꽁 싸맨다. 그러면 공격당하는 것은 자신의 '자아'가 아닌 '페르소나'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페르소나가 공격당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아'가 직접 공격당하는 것보다는 낫다. (여기서 '공격받는다'는 자신의 자아가 직접 부정당하는 것을 포함해, 자아가 흔들리는 것, 자아가 의심받는 것 등 모든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제 막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페르소나'가 있을 리가 없다. 말하자면, 매 순간 직격 타을 맞는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지나가는 낙엽에도 웃고 떨어지는 빗방울에도 눈물을 보이는 다이나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춘기 청소년들이 자신의 '자아'를 지키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자아'를 공격받지 않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방 안에서 나오지 않거나, 게임 속 세상에 사는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으론 '자신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친구와 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무리를 만들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이 공동체에서는 모두가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기에 서로 싸울 일도 다칠 일도 없다. 오히려 자아를 강화시키고 더욱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와 비슷한 사람, 혹은 서로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최소한 겉으론 그렇게 보이는 사람)과 지내면 서로의 '자아'가 다칠 일이 없다. 에릭슨은 사춘기 청소년들이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대상은 신뢰할 수 있는 사상, 가치관, 사람을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즉, 자신의 자아를 건드리지 않을,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춘기 시기를 겪고 있는 청소년뿐만 아니라 만 20세 이상의 성인들에게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다 보면 영원할 줄 알았던 친구들과 멀어지는 경험은 누구다 한 번씩은 해보았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거리가 멀어져 자연스레 소식이 끊기는 경우도 있지만 20살이 넘어가며 자신의 자아정체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에서 자신과는 맞지 않는 부류의 친구들과는 연락을 끊는 경우도 못지않게 많다.
끼리끼리 그룹을 짓는 것은 실제 그런 사람들만 만나고 다니는 것도 의미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온라인 모임도 포함된다. 심지어는 알고리즘도 포함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채식주의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채식주의자 SNS에는 알고리즘으로 인해 채식주의에 관한 콘텐츠가 계속 올라오게 될 것이다. 채식주의의 장점, 채식주의 식품 등 채식주의의 정보(대체로 채식주의에 긍정적인)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것이고, 자연스레 온라인상으로 채식주의자 커뮤니티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과 비슷한 신념, 종교, 정치색 등을 가진 사람과 어울리기 마련이다. 이 요소들은 '자아' 구성하는데 아주 큰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이 요소들의 공통점은 서로 물러섬이 없다는 것이다. 즉, 한 번 맞서기 시작하면 서로 물러서지 않고 싸우게 되는 것이다.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에 한해서,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사이가 좋던 부부나 친구도 정치나 종교이야기가 나오면 언성을 높이며 싸우게 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인데, 내가 왜 그렇게 흥분했을까?'라며 자책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문제이다. 자신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선 모두가 전사가 되는 법이다.
'자아'를 공격받지 않는 상태라... 뭐 나쁠 건 없어 보인다. 아니, 사실 필요하다. 계속 강조하지만, '자아'가 공격당하는 것은 곧 자신이 무너지는 고통이다. 그렇기에 '자아'가 공격당하지 않는 환경을 조성하고 그 그룹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자신의 그룹 안에 있으면 구태여 다른 사람의 '자아'를 공격할 일도 없다. 모든 것이 평화로운 상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에서도 아주 치명적인 부정적 요소가 존재한다. 그 부정적 요소란 아래 두 가지이다.
1. 같은 의견만 공유, 다른 의견에 대한 배척 성향
2. 커뮤니티 의견에 맹목적인 동조현상
오늘은 '끼리끼리' 어울림의 이유를 '자아'의 관점으로 살펴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자아'를 계속해서 공격하고 부정하는 환경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런 세상에서 '자아'를 보호할 수 있는 환경이 바로 '끼리끼리' 그룹이다. 이렇게 우린 자아를 보호하고 또 강화시켜 나간다. 그렇다면 '끼리끼리'는 가히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다음 글에서는 '끼리끼리'모임의 안 좋은 부정적 측면도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