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다이구 Jun 08. 2023

왜 우리 사회는 각박해질까?

사랑을 배운 사람, 사랑을 배울 장소의 부재 / 가정과 사회

    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각박해지는 걸까? 왜 점점 사랑과 희생, 그리고 용서와 같은 미덕들이 그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을까?    

 

    사랑, 용서, 자비와 같은 미덕은 타고나는 것이 아닌 후천적으로 교육을 통해 습득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성악설이 맞는 것 같다. 인간은 폭력적인 모습을 보거나 따로 교육을 받지 않아도 폭력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신경질을 내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심지어는  보호자를 때리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사랑은 사랑을 받아 본 사람만이 사랑을 베풀 수 있다.

    사실 모든 인간은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 당신이 살아서 이 글을 보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인간은 사랑 없이 생존할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사랑과 생존은 아주 강력한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기린을 예시로 본다면, 기린의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네 다리로 뛰어다닌다. 하지만 인간의 아이는 아주 연약하다. 심지어 생존에 가장 기본이 되는 활동조차 스스로 할 수 없다. 숨쉬기, 밥 먹기, 주변을 인지하기 등과 같이 아주 기본적인 것들 말이다. 만약 인간의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두 발로 걷는 건 바라지도 않고, 네 발로 기어 다니기만 해도 엄청난 이슈가 될 것이다. 


    아기는 보호자의 사랑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 또한 인간의 양육과정은 아주 터프하다. 양육 기간부터 아주 살벌하다. 예를 들어, 강아지는 태어나고 2년이면 성견이 된다. 하지만 인간은 최소 16~18년은 걸린다. 사랑 없이는 양육이 불가능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여기서 작은 차이가 발생한다. 세계적인 심리학자 제롬 케이건(Jerome Kagan)은 인간의 성장과정에서는 '주어지는 것'보다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제롬 케이건의 저서 '무엇이 인간을 구성하는가'에 따르면, 같은 수준의 신체적 학대를 받은 아이들 이어도 '정당한 신체적 체벌'로 인식하는 그룹과 '신체적 학대'로 인식하는 그룹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똑같이 같은 사랑을 받아도 대상 아이들이 '사랑'으로 인식하는지, 않는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다면 사랑을 받아 생존하고,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사랑을 교육을 받는데 왜 우리 사회는 점점 사랑이 사라질까? 필자는 사랑을 배운 사람, 그리고 사랑을 배울 장소의 부재가 그 이유라고 주장한다. 


    서론이 길었다. 하지만 요약하자면 사랑은 교육을 통해 배우는 덕목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 사랑을 배우는 장소는 어딜까? 대표적으로 가정, 사회, 그리고 종교 등을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점점 각박해지고 있다면 분명 이 장소들이 제기능을 못하고 있는 뜻일 것이다. 그럼 각 장소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한 번 알아보자.


가정


    가정은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일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의 가정은 아주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한국의 이혼율은 계산법에 따라 결괏값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가장 보수적으로 잡아도 결혼한 커플 중 10%는 이혼을 한다. 동시에 결혼 건 수는 매년 줄지만 이혼 건수는 증가하는 놀라운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사랑은 자신이 직접 받거나 주는 직접경험도 중요하지만 주변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과 환경에 노출되는 간접경험도 중요한데 집에서는 매일 부모가 서로 싸우고 있으니 사랑을 배울 리 만무하다.

    더하여 현재는 맞벌이 가구의 비율이 50%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심지어는 부모의 직접적인 돌봄과 애착관계 형성이 필수적인 6세 이하의 아이도 48~50%는 맞벌이 가정에서 자라고 있다. 사랑을 둘째치고 집에 부모가 있지도 않은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제대로 사랑을 받아, 사랑을 베푸는 법을 배운 사람을 보기 힘들다. 하지만 여기서 더 큰 문제는 이 소수의 사람들 조차 성장과정에 그 특성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큰데, 그 이유는 현대사회에 있다.


사회

    

    현대 사회가 이전에 없던 변화를 보이고 있다면, 그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이전의 사회와 현대의 사회가 뭐가 달라졌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정보의 접근성에 집중해보려고 한다. 현대 사회는 그 어느 시대보다 정보 접근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누구든지 핸드폰만 열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는 시대이다. 하지만 정보의 편향성은 구시대에 구전으로 입소문이 퍼지는 것과 별 다를 바가 없는 수준이다. 

뤼트허르 브레흐만(Rutger Bregman)


    

    언론의 정보는 부정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기분 좋은 소식, 즐거운 소식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지만, 범죄, 부패, 자연재해 같은 부정적인 소식은 모두가 집중한다. 휴먼카인드의 저자 뤼트허르 브레흐만(Rutger Bregman)은 이러한 현상은 정보의 부정편향이다. 긍정적인 정보와 부정적인 정보를 같이 들어도 부정적인 정보를 더 생각하는 부정편향의 현상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정보의 부정편향은 애초에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정보가 대부분 부정적인 소식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가 사회를 인식하는 과정에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인식하는 사회는 길거리 곳곳에 범죄자가 들끓고 정치인들은 나라를 망칠 계획만 세우고 있고, 가정 안에는 폭력이 서려있고, 학교는 지옥이며, 종교기관은 부패했다. 만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정말 이 모양 이 꼴이면, 진작에 모든 체제가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이런 사회가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이 사회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극단적 정의론이다.


    모든 범죄자는 무기징역 또는 사형시켜 버리고, 정치인들은 전부 감옥에 넣고, 가정과 학교는 해체시키며, 종교는 무너뜨려야 한다. 이것이 극단적 정의론이다. 이러한 철학은 범죄자와 같은 사람을 넘어 천천히 자신 주변 사람에게도 적용되어 간다. 조금이라도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하는 사람은 매장시켜 버리고, 한순간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게 용서의 미덕은 사라진다. 오히려 용서를 베푸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한다. 다신 같은 행동을 할 수 없게 철저히 응징하지 않으면 다음에 또 같은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같은 피해가 발생하면 처음에 그 사람을 용서한 사람까지도 같이 힐난한다.


    물론 극단적 정의론의 논리가 맞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정말 깨끗한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라고 믿는가? 공산주의의 논리도 틀리지 않다. 나치즘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제국주의 논리도 옳다. "나치즘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미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사상에 수 천만 명, 수 억 명이 동조하고 따를 수 있다고 믿는가? 모든 사상은 저마다의 논리가 있는 법이다.


    용서가 없어진 사회에는 살아갈 수 없다.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라는 속담이 왜 있겠는가? 우리 모두 당당하지 못한 구석이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우리도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정말 당당해! 나는 잘못한 행동을 하지 않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첫째로 본인은 그렇게 생각해도 주변 사람은 그렇게 생각안 할 가능성이 높다. 일단 가족이나 친한 친구에게 먼저 물어봐라) 물론 정말 그런 사람이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 사람의 핸드폰만 뺏어서 탈탈 털면, 다신 고개 못 들고 다닐 사람들이다. 모든 행동에 cctv로 촬영하고 모든 말을 녹음하면 80억 인구 중 한 명이라도 당당한 사람이 있을까? (그런 면에서 트루먼 쇼의 트루먼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본인조차 허점 투성이인 주제에, 그거 잘 숨기면서 살아왔다고 다른 사람이 저지르는 사소한 잘못에 용서 못하는 것은 좀 뻔뻔하다. 그리고 그런 철학으로 뭉쳐진 사회는 뻔뻔한, 가식적인, 그리고 각박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글이 생각보다 많이 길어졌다. 이 글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현대 사회가 각박해져 가는 이유가 사랑을 배울 장소가 점점 줄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장소로 이번 글에서는 가정과 사회를 알아봤다. 다음 글에서는 종교와 문화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다음 글에 계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