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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a Jul 15. 2016

공포에 기생하는 폭력: <곡성>(2016)

폭력이라는 미끼에 현혹될 운명의 피해자


※ 본문에는 스포일러가 가득합니다. 영화를 본 후 읽어주세요.




  “괜찮아, 우리 효진이. 이거 다 꿈이야. 아빠가 해결할게.” 2시간 40분의 악몽이었을까? 피투성이로 주저앉아 홀로 읊조리던 종구(곽도원)의 마지막 대사다.

  무엇이 '악'이었을까? 종구는 실패한 꿈을 꾼 것일까? 이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일광(황정민)은 또 뭘까? 무수한 질문을 남긴 채 끝난 영화는 악몽으로 남았다. 영화 <곡성>은 남겨진 질문에 답할 것을 강제한다. 영화를 열어젖혀 답을 꺼내놓지 않으면 심연을 들여다보는 악마의 시선을 거둘 수 없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곡성>의 엔딩부, 카메라를 들고 집안을 들여다보는 일광(황정민)의 모습



  굽이굽이 곡(曲)을 이루는 구불길 끝, 안개 자욱한 산 속 마을 '곡성'에 연쇄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경찰 종구는 현장에서 끔찍한 모습으로 죽은 피해자들과 굿을 한 흔적을 불안하게 수사한다. 그는 주변에서 마을 외지인인 일본인의 소문(벌거벗은 채 산짐승의 내장을 파먹는 것을 목격했다는)을 듣고 일본인이 악마로 나오는 악몽에 시달린다. 일본인이 일련의 사건들과 관련할거란 종구의 의심은 그를 일본인의 집으로 이끌었고, 신당에서 딸의 실내화를 본 후, 모든 의심은 확신으로 뒤바뀐다.

   종구가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 즉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고 일본인에게 분노를 쏟아내며 일광을 집에 들이면서부터일 것이다. 일광의 굿에 딸의 상태는 점차 악화되고 종구는 굿을 중단시킨다. 어떻게든 딸을 지키고 싶은 아버지 종구는 마을 친구들과 일본인을 죽이려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우연히 차로 죽인다. 일본에서 온 외지인이 마을을 어지럽히고 가정을 혼란케 한 원인이라 믿기에, 그는 경찰임에도 사람을 해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딸에게 돌아온 종구는 이 외부인을 죽임으로써 악을 응징하고 정의를 바로잡았다고 착각했을지 모른다.

알 수 없는 힘에 대항하는 무당의 굿



  내면의 '공포'는 종구의 폭력에 확신을 준 강력한 힘이다. 공포에 전염된 마을 친구들은 곧장 폭력에 동원될 수 있었다. 외지인이 행한 성적타락(부녀자 강간)과 이상행동(짐승의 내장을 먹고 정체 모를 신당을 모심)은 곧장 범죄와 연결되고,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이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와 경외감은 마을을 불안 속에 가두었을 것이다. 그들의 공포가 형체도 없이 떠도는 소문, 이야기, 꿈같은 환상에 근거하더라도, '우리'라는 내(內)부를 더럽히는 외(外)부의 침입은 의심할 여지없이 악의 혐의를 뒤집어쓴다. 외지에서 온 사람은 무당 일광과 일본인이 유일한데, 끝까지 종구는 일광을 의심하진 않는다. 마을 모두의 삶을 와해시킬지도 모르는 믿을 수 없는 사태는 바로 저 알 수없는 '타자'에서 비롯된 것이라 지목된다. 내가 명명할 수 없는, 무시무시하고 악마적인 힘의 타자를 처단코자하는 광기는 공포로 폐쇄된 공간의 비상사태 속에서 집단적 폭력으로 폭발한다. 공포는 폭력의 가장 효과적인 힘인 것이다.

  종구에게는 한번의 기회가 더 남아있었다. 불안과 공포가 그의 내면을 옥죄고, 마을 전체가 악마와도 같은 폭력에 현혹되었을지라도, 무명 여인의 말을 믿었더라면 그는 살아남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확신에 찬 종구는 과학적 증거로 제시된 '독버섯'도, '말해도 믿지 못할 것'이라던 일본인의 말도, 무명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믿음만을 믿는 인간의 모습은 부제가 동굴 속 일본인을 찾아가 정체를 묻는 씬에서도 드러난다. 부제는 '너는 누구냐'고 묻는 대신 '네가 악마가 아니라고 말해달라' 애원한다. 악마의 모습을 한 일본인은 부활의 증거(성흔)를 내보이며 '이미 너는 날 악마라고 믿고있다'고 비웃는다. 낫을 들고 상대를 '악'이라 확신하는 가톨릭 부제 역시 종구와 다를 바 없다.  자기확신에 찬 인간에게 '살과 뼈'가 없는 그녀(무명)의 말은 아무런 권위가 없는 것이다. 무명과 일광사이에서 갈등하던 종구는 사내의 목소리를 따름으로서 파국을 맞이한다. 그리고 파국의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아버지가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딸을 위로하며, 자신을 달랠 뿐이다.

악이라 지목되었던 일본인


  자신의 믿음만을 믿는 인간의 눈은 적이 제 코앞까지 와도 당최 보지를 못한다. 반면 일광의 카메라는 편견 없는 기계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본다. 관객은 이 모든 사태가 영화라는 형식, 카메라의 눈으로 경험된다는 것을  본다. 플롯 간의 당위적 연결을 모두 관객의 착각으로 돌리면서 선악의 대립은 사라지고, 은폐되어있던 주인공(피해자)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이런 결말은 모든 플롯을 다시 이어붙이고 피해자의 운명에 대해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특수함을 경험하도록 한다. 관객은 모두가 피를 뒤집어쓰고 주저앉아 실패를 믿지 못해 꿈이라 위로하고, 여전히 정의를 바로잡을 아버지의 허구를 믿고, 지금껏 행했던 폭력을 반복할, 곡성(哭聲)으로 가득 찬 종구의 내면을 본다. 내 안의 공포를 몰아내고자 자기확신으로 '악'을 응징하려는 집단적 욕망의 씨앗, 악(惡)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자신이 악인(惡人)되어버리는 역설, 모든 공포에 들러붙은 폭력이란 미끼에 현혹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애초부터 참극의 피해자가 될 운명에 있던 것이다. 이 슬픈 이야기에 한 가지 질문을 덧붙이고 싶다.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은 아니냐"(야고보서 2:4)고.

시종일관 멍청한 표정의 종구(곽도원), 이리도 답답한 연기를 강렬히 잘 할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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