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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a Nov 30. 2016

사막 위 황폐한 먼지로 남겨진 삶

<로스트 인 더스트>(2016)


   사막은 건조하고 황폐하다. 사막의 평원은 하늘과 마주해 끝없이 수평으로 이어지고, 마치 바다처럼 막연해 시대와 방향을 가늠하기 힘들다. 최근작인 <디시에르토>(2016)의 도망치는 이민자들처럼 한낱 인간은 대자연 속에서 동서남북의 감각을 잃기 십상이고, 이 곳을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야만적 질서를 따라 인간은 짐승만도 못한 처지가 된다. 사막은 모든 생명체를 말려죽일듯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만이 지배하는 곳. 이 땅 위에선 인간은 개미처럼 땅에 납작 엎드려 마실 물을 찾고, 하루 또 하루를 연명해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서부는 '기회의 땅'이란 열망으로 가득찬 개척과 정복의 장소, 총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다. 미국의 기원으로부터 내려오는 폭력의 비극이 곳곳에 새겨져진 곳. <슬로우웨스트>(2015)는 자신의 연인(로즈)을 찾으러 온 제이(코디 스밋 맥피)란 스코틀랜드 소년을 통해서 '여행 책자의 서부'가 아닌 '진짜 서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디언들을 닥치는데로 학살하던 1870년, 총을 든 잔혹한 사냥꾼들은 현상금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모든 걸 태워버릴 기세다. 누구도 믿지 못하고 오로지 총에 의지해 자기가 자신을 지켜야만하는 쓸쓸함, 오래 전 부터 돈에 눈이 먼 악당들이 가슴에 칼을 꽂는다는 이 서부의 황폐하고 쓸쓸한 정서는  미국 남부 텍사스를 배경으로 한 <로스트 인 더스트>(2016)에도 이어진다.

좌: <디시에르토>, 우: <슬로우 웨스트>


   <로스트 인 더스트>(2016)에서 우리는 몇몇 낙서마냥 새겨진 흔적들로 방향을 가늠한다. '이라크 파병 세번 갔다와도 정부에서 한푼 도와주질 않더라'는 분노의 낙서, 도로 위로 자주 노출되는 '채무 구제', '신속 대출'의 거대 표지판, 땅 이곳 저곳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들, 사람이 살지 않는 텅빈 집 등등. 발전된 도시와는 정반대처럼 보이는 서부의 대자연에서도 지긋지긋한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족쇄를 채운다.               

   돈에 대한 열망은 사막의 건조하고 퍽퍽한 공기처럼, 사람들도 그렇게 만들었다. <로스트 인 더스트>의 토비(크리스 파인)와 태너(벤 포스터)는 격정적인 정욕도, 욕심도, 웃음도, 슬픔도 없어보인다. 두 형제 중 동생 토비의 경우가 그렇다. '은행털이'라는 처음 치루는 거사에도 차분하게 상대를 배려하는 토비는 형에게 '취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철저히 계획대로 움직이고, 어머니의 죽음에도 담담하다. 은행털이범을 수사하는 경찰들 역시 건조하다. 그들은 정의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레인저들이 아니다. 해밀턴(제프 브리지스)은 포크송의 리듬으로 느긋하게 수사하고 은퇴를 앞둔 '노인'이며, 인디언 경찰인 알베르토(길 버밍)는 이 노인의 인종차별 농담을 들어가며 함께 여유롭게(?) 수사한다. 헤밀턴은 누워있는 알베르토에게 '목사의 설교를 듣는 인디언이 어딨냐', '너희(인디언)는 연기 피우며 모닥불 주위나 빙빙 돌아다녀야 하는거 아니냐', '멕시코피가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이 곧 나올 거다', '풋볼은 대체 누가 만든거야 아즈텍인? 풋볼은 코만치에게나 어울리겠다'며 돌아누운 알베르토에게 인종차별 농담을 쏘아붙인다. 사실 두 경찰들의 살벌한 농담 뒤에 가려진 진짜 걱정은 '은행털이 사건'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인생(노후)인듯 하다. 헤밀턴은 은퇴 후 삶을, 알베르토는 은퇴를 맞이할때까지 이 직업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두 경찰이 마주치는 텍사스 지역 주민들도 냉장고에서 하루지난 치킨마냥 푸석푸석하다. 화재로 대량의 소떼를 대피시키는 한 카우보이 목동은 '21세기에 왜 불 피해서 소떼나 몰고다니는지 모르겠다, 왜 애들은 이 좋은걸 안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린다. '더위가 사람을 친절하게 만든다, 뭐가 먹기 싫으냐'던 식당 할머니는 식사주문을 하려는 두 경찰에게 44년 동안 티본스테이크만 했으니, 다른 건 주문할 수 없도록 한 가지 메뉴를 강제한다. 그들의 삶은 인간적 감정이 증발되고 퍼석하게 말라 먼지로만 남겨진 듯 하다.


   잔뜩 말라버린 얼굴에 주름만 가득 남긴 사막의 열기처럼, 이 땅을 지배하는 시스템은 그들을 더욱 무겁게 짓누른다. 주인공인 두 형제가 한번도 해본적 없는 은행털이를 계획한 이유는 어머니가 계약한 '역담보대출(reverse mortgage)'때문이다. 토비는 석유가 채굴된 자신의 농장을 가지고 있는데, 불행하게도 토비의 어머니가 계약한 '역담보대출'로 인해 저렴한 값에 땅이 매각될 위기에 처한다. 이 '역담보대출'은 은행이 토비의 땅을 담보로 그들에게 일정 금액을 빌려주고, 어머니 사후에 이 부동산을 매각해 부채를 청산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토비는 땅을 매각하지 않기 위해서 일정량의 거금이 필요하고, 이 거금으로 '근저당말소'를 해야만 한다. 농장을 지키기 위해 이 두 형제는 은행을 털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가난은 대물림되어 아이의 미래를 지배할 것이다. 토비를 찾아온 헤밀턴에게 그는 직접적으로 말한다. "난 가난하게 살았다. 가난은 전염병 같아서 대를 이어 전해지면서 사람을 괴롭힌다. 내가 아는 사람을 모두 감염시켰다. 하지만 내 아이들은 안된다. 이 농장은 그 녀석들 것이다."라고.

  아버지로서 토비는 자신의 아들에게 삼촌이나 자기(기성세대)처럼 살지 마라고 한다. 그는 총으로 사람을 위협하는 형을 향해 조심하라고 잔소리하고,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피해주지 말 것을 끝없이 당부한다. 총으로 위협당하는 위험한 순간에도 토비는 형에게 왜 상관도 없는 사람을 총으로 쐈냐고 따진다. 그는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 한다. 그러나 선택지는 단 하나임으로 괴롭지만 감내할 수밖에 없다.


   토비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약탈하는 죄를 저지르고, 또 어쩌다 사고로 사람을 죽였고, 사랑하는 가족과 형을 잃었다. 모든 것을 바쳐 겨우 얻어낸 저당말소를 위해 은행을 찾아간 토비는 달랑 은행 서류 한장으로 모든 상황을 끝낸다. 그리고 은행 담당자는 '거래 즐거웠습니다'라며 토비에게 악수를 청한다. 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지난 러닝타임이, 이 은행 담당자에겐 그저 '거래'에 불과하단 느낌에 헛웃음이 나온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다음 장면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토비는 자신이 턴 은행의 금고에 다시 자신의 재산을 신탁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카지노에서 한번 돈세탁을 거친 돈을 안전하게 거치시키기 위해선 그럴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허탈한 것이다. 사실 토비에게 겨우 연명할 정도의 푼돈을 주고 그의 농장을 앗아가려했던 사악한 은행을 떠올리면 은행털이라는 건 통쾌한 부분이 없잖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은행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헛웃음을 불러일으킨다.

   헛웃음과 동시에 환멸을 불러일으키는 땅. 해밀턴과 알베르토는 은행털이가 예상되는 지점에 앉아 기다린다. 알베르토는 헤밀턴에게 '은퇴를 미루려고 일부러 시간끄는거냐고, 여기서 살꺼냐'고 그에게 질문한다. 인디언인 알베르토에 따르면 "외지인들이 와서 무너뜨리고 차지한 이 땅은 150년 전만해도 우리 조상의 땅이었다. 지금 보이는건 저들의 증조부모들이 빼앗기고 이제 후손들에게 착취당한다. 저 개자식(은행)들에게 착취당한다."고 말한다. 알베르토는 경찰의 임무로 은행의 돈을 지켜야하지만 유형과 무형의 형태로 그들을 착취한 이 땅의 역사 전체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알베르토가 걱정하던대로 그는 은퇴를 맞이하지도 못하고 죽고만다. 어떤 자비도, 보상도 없는 잔혹함.    


  <로스트 인 더스트>의 엔딩은 석유채굴로 파해쳐지는 비옥한 땅을 수평으로 바라보며 카메라가 아래로 이동한다. 풀위에 조용히 가라앉은 먼지처럼 평원을 바라보는 엔딩은 헤밀턴과 토비 사이 해소되지 않은 긴장을 담고 있기에 더욱 쓸쓸하다. 아마도 토비는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홀로 버티고 싸울 것이 예상되므로. 아버지를 죽인 형이라도 죽지 않고 곁에 있는편이 덜 외롭지 않았을까 해서. <슬로우 웨스트>에서 사람들이 처참히 죽은 살육현장 위로 카메라가 스쳐가며 생의 무위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먼지처럼 가라앉은 카메라의 시점은 쓸쓸하고 외롭다. 지금껏 행해진 행위에 대한 선악의 판단을 유보시키고 그저 먼지처럼 사라질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욕망과 죽음에 합당한 애도를 보내라는 듯 인간의 시선이 아닌 다른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는다.


뭐 그렇다.


* 브런치 앱으로 처음 처음부터 끝까지 글을 작성해보았어요. 저장 후 부분부분 사라져버린 단락들 때문에 3번을 다시 썼습니다. 다음부터는 브런치 앱으로 글을 쓸 순 없겠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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