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죽은 사람과 '곧' 죽을 사람들이 한데 엉킨 아사리판
큰 수레바퀴들 사이에 껴 빙글빙글 돌아가는 작은 톱니가 움직이길 '그만'두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밀리고 밀리는 힘의 맞물림으로 완성된 견고한 운동의 관성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이가 하나 빠진 톱니바퀴는 매끈한 운동의 의지와 마찰을 일으키며 듣기싫은 소음을 내다가 결국은 전체의 속도를 늦출 것이다. 몇개의 이가 빠진 고장난 톱니바퀴는 전체를 와해시킬 치명적 결함을 들추어내고, 기어이 작은 톱니하나가 탈출에 성공한다면 서로에게 의지해 견디던 힘 전체는 시스템 전체와 함께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영화 <아수라>(2016, 김성수 감독)는 검사, 시장, 죽어가는 아내, 살인죄 등등의 커다란 수레바퀴들 사이에 껴 강제로 등떠밀려 움직이는 작은 톱니바퀴 한도경(정우성)을 따라 전체의 '실패'와 '파국'을 그린다. 강력계 형사 '한도경'은 부패와 비리, 목끝까지 권력에의 욕구로 가득찬 정치꾼 시장 '박성배(황정민)'를 도와 돈을 위해 무슨 일이든 받아 처리한다. 검사 '김차인(곽도원)'은 재개발 사업 비리의 핵심증인을 살해한 박성배 시장의 비리 전체를 캐려하고, 사고로 벌어진 살인을 작대기(김원해)에게 덮어씌운 짓, 불륜영상 등을 암투병 중인 아내에게 공개하겠다며 한도경의 겁박하고 그의 모가지를 잡아 죈다. 한도경은 김차인 검사에게 박성배와 핵심증인 간의 증거녹취를 강요받지만 도저히 회피할 수가 없는 처지이고, 한편으로는 멋진 미래를 보장하던 이복 매형 박성배 시장 역시 피할 수 없다. 더군다나 친동생처럼 챙기던 후배형사 문선모(주지훈)가 박성배처럼 변해가는 모습에 박성배에 대한 적대감 역시 커진다.
권력과 권력, 권력의 하수인들이 서로의 이해와 협박으로 떠밀려 전개되는 한도경 중심의 단선적인 서사는 '장례식장 유혈참극'으로 치닫고야 만다. 모두가 실패한 채 피흘리고 널부러진 이 잔인한 풍경은 남성적 허세를 까발리는 액션의 결과물인지, 우스꽝스러움을 남기려는 허망함의 전시인지, 폭력의 황폐함에서 오는 피로외에 별다른 유의미함을 남기지 못한 채 엔딩을 맞는다.
돌이켜보면 한도경은 유혈참극을 과감히 '선택'한 듯 하다. 검사쪽 진영에서 이 악물고 버티고, 박성배 진영의 달콤한 회유에도 갈등하다가(정확히는 자기가 버려졌다는 걸 인지하면서) 도저히 서로의 이해가 합의되지 않는 어떤 지점에서 모든걸 까발리고 자신은 그 '아사리판'에서 탈출하리라 작정했기 때문이다. '갓'죽은 사람과 '곧'죽을 사람들이 한데 엉킨 아사리판 '장례식장'. '계속 이렇게 지옥에서 살꺼야' 묻는 검사에게 '검사님, 저 이제 그만하면 안되요'하며 고통스럽게 애원하던 한도경은 박성배 앞에서 맥주잔을 깨물어 우드득 씹으며 피를 머금고 '그래서 난 언제 죽느냐, 은실장도 지가 죽는거 알았냐'며 결단을 내린 것이다. 누군가의 하수인으로써 명령과 허락으로 행동하던 한도경은 스스로의 결단을 내린 결과로서 파국 속에 놓인다.
파국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판단이나 경계 없이, 시장과 하수인, 검사와 수사팀, 형사들, 여성, 동남아 청부살인업자 등 구분없이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죽음을 향한 열망같은 것이 장례식장을 휩쓸고 간 후, 한도경의 몸뚱이는 모든 힘으로부터 비로소 풀려난다. 죽음만이 이 아사리판의 출구였다는 듯. 도덕이나 윤리적 판단이 결여된 채 행동하던 한도경은 죽기 직전 '좆이나 뱅뱅이다'이란 무의미한 말을 내뱉는다. 자신을 짓누르던 과도한 폭력 앞에 투사로 저항하는 결기를 보이면서 기껏해야 '씨발'같은 욕이나 내뱉을줄 밖에 모르는 언어의 빈곤은 그가 왜 이런 출구없는 지옥에 빠져나올 수 없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어떤 말로도 설명할 언어가 없지만, 정작 자신은 변해가는 문선모를 향해 "정신차려 빙시나, 니가 지금 뭘하는지나 알고있는거야?"하며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할 언어가 부재하다. 그래서 이 믿을 수 없는 파국을 보고도 '좆이나 뱅뱅'하고 옹알이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참극은 그들 전체를 지배하던 시스템에는 흠집조차 내지 못한다.
고장난 시스템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고 그것을 해체해 다시 세우려면 모든 것이 사라진 백지에서 시작해야하는 걸까? 최근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란 한 철학자는 트럼프와 힐러리 양자 대결로 진행되는 미국 대선에 트럼프를 공개적으로 택하며, 힐러리를 "진정한 위협"으로 표현했다. (동영상 참조: http://youtu.be/b4vHSiotAFA) 트럼프가 승리하면 미국은 정치를 기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할 것이고, 이를 통해 정치가 무엇인지 재고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트럼프는 파시즘을 도입하진 않을 것이며 "거대한 각성"의 계기를 줘 새로운 정치가 시작 될 것이라 보았다. 정말로 그러한가? 정말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 미국이 빨리 망하고 새로운 세계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우리는 그의 말대로 '절망적 희망'으로, 우파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트럼프 정권을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진짜 미국이 트럼프 식으로 망하면 근본적으로 새로운 정치가 도래하는가? '이명박근혜' 정권을 이를 악물고 버틴 우리는 지금 희망을 말하기에 부끄러운 지경에 놓여 '국정농간사태'를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결과적으로 10년 전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민주주의를 덜 찾는건 아닌가? 돌이키기 힘든 갈등으로 가득 찬 총체적 '헬'상태를 파국으로 쓸어버리고픈 열망, 이것이 진짜 위험천만한 생각아닌가? 희망希望을 끊어내는 절망絕望으로 곧 망亡할 상태를 기다리고 있는 느낌적인 느낌…. 시스템은 피흘리지 않는다. 피를 흘리는 것은 사람이다.
+한도경이 도로 위에서 청부살인업자들과 싸우며 달리던 장면, 한쪽은 무자비한 힘으로 자신을 난간으로 밀어부치고, 다른 한쪽은 도로난간에 부딧혀 스파크가 튀고, 자신은 피를 흘리며 귀가 들리지않는 공포에 휩싸여 전속력으로 앞으로만 돌진하던 장면, 이 사면초가의 형국이 지금의 우리와 닮아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