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2016)
*스포일러 있습니다.
'강간'은 민감한 소재다. 강간 피해를 본 여성이 가학적 폭력에 쾌락을 누린다고 해서 영화가 진보 또는 예술적인 성취를 거뒀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걸까. 폴 버호벤의 영화 <엘르>에 든 의문.
영화는 주인공 미셸(이자벨 위페르)의 주관적 시점에서만 서술된다. 게임회사 사장인 미셸은 홀로 사는 중년의 여성이다. 어느 날 그녀는 집안으로 침입한 복면 강도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고를 겪는다. 강간 직후 미셸은 어질러진 집안을 차분한 태도로 정돈하고 샤워한다. 이상하게도 미셸은 '왜 다쳤냐'는 질문에 '자전거를 타다 넘어졌다'고 거짓말한다. 경찰에는 신고도 않는다. 그러나 또다시 강간을 겪을까 봐 두려워한다. 망치를 안고 잠들거나 자물쇠를 바꾸고 성병 검사를 하거나 호신용 도구들(스프레이와 망치)을 구매한다. 자신이 게임 캐릭터에게 강간당하는 영상이 회사에 퍼지고, 핸드폰으로 온 익명의 문자가 그녀를 두렵게 만든다. 강간의 기억은 미셸을 괴롭히는지, 쾌락을 주는 것인지, 대비를 위한 것인지 모호하기만 하다.
많은 주변인과의 관계 속에서 미셸은 모호하고 교묘한 인물로 그려진다. 미셸의 전남편인 리샤르(샤를르 베를링)는 미셸에게 폭행한 전력이 있어 그녀와 헤어졌으며 요가강사인 헬렌과 사귀는 상태다. 애인은 두 사람은 서로의 파트너를 질투하거나 견제한다. 미셸의 엄마 이렌느(주디스 마그르)는 젊은 남성과 섹스하거나 미용에만 관심이 있는 노년을 보내며, 쓰러지기 직전까지 수감 중인 아버지를 만나보라 미셸에게 권유한다. 미셸의 아버지인 조지 르블랑은 30년을 복역한 희대의 살인마로 세상을 떠들썩 하게 한 인물이며, 그의 가석방 공판으로 가족은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미셸은 같은 게임회사를 운영하는 친구이자 동업자인 안나(앤 콘시니)의 남편인 로베르트(크리스티안 베르켈)와 바람을 피우는 사이다. 거짓이 싫은 미셸은 로베르트와 헤어지지만, 친구 안나에게 불륜 사실을 고백한다. 자립하지 못한 미셸의 아들 뱅썽(조나스 블로켓)은 임신한 여자친구에게 휘둘리며 엄마에게 손을 벌리며 산다. 이웃인 파트릭(로랭 라피테)은 부인 레베카(비르지니 에피라)와 함께 사는 남자로, 미셸이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유혹하고 응시하는 대상이다. 미셸을 강간한 남자는 파트릭이며 그는 아들 뱅썽에 의해 죽는다.
<엘르>는 미셸이 강간당하는 씬을 반복적으로 노출한다. 강간당한 최초의 순간, 강간의 회상, 강간범을 때려눕히는 상상, 강간범을 인지하는 순간, 강간범과 강간 플레이를 즐기는 순간, 강간범이 죽는 순간으로 여섯 번 등장하는 이 강간 장면들은 매번 다른 의미에서 되풀이된다. 강간의 대상이자 피해자였던 미셸은 후반부로 갈수록 강간을 즐기고 범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교묘한 여인의 모습을 보인다. 미셸이 교묘하게 보이는 이유는 끔찍한 상황을 겪는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제삼자의 모습으로 상황을 조용히 비껴가기 때문이다. 그 교묘함 속에는 '사이코패스' 이미지도 있다. 미셸은 대중에게 '살인마의 딸'로 기억된다. 아버지 조지 르블랑은 27명을 살해한 잔혹한 살인범으로 사회에서는 '사이코패스'로 기억된다. 사람들에게 기억된 미셸의 모습은 재를 뒤집어쓴 10살 소녀다. 대중은 사진 속 초점이 없는 사이코패스의 어린 딸로 그녀를 기억한다. 중년이 된 미셸이 타인과 교감하지 못하는 모습은 여지없이 이 사이코패스 유전적 내력과 연루된다. 강간당한 미셸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사실부터가 이상하지만, 돌이켜보면 강간당한 직후 차분한 모습으로 청소하고 느긋하게 몸 풀듯 샤워하는 모습이 더 이상했다. 미셸은 교감이 없다. 엄마의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비웃으며 조롱하거나, 엄마가 쓰러지는 순간 '뭐가 이래'란 말을 하고, 의식을 잃은 엄마 곁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화내고 있을 거야'라며 텔레비전 채널이나 돌리고 있는 미셸은 결코 온정적인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녀는 죽은 어머니의 유골을 쓰레기 버리듯 무심히 허공에 날려버리며, 교도소에서 자살한 아버지에게 '여기 온 것만으로도 아빠를 죽였네'하고 말한다. 사랑하는 친구에게 가책 없는 표정으로 불륜 사실을 고백하거나 질투 나는 사람을 다치게 하기도 한다. 게임을 지휘하는 그녀는 유저들이 피의 진득하고 뜨끈한 느낌을 느끼도록 지시하는 게임회사의 사장이다. 미셸은 자신이 바라보는 가학적 폭력의 게임의 설계자이자 시선의 주체다.
강간의 피해자가 가학적 폭력에 쾌락을 느끼고 게임을 만들어 가해 남성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이 전복적인 의미를 가지는 걸까? 오히려 손에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가해 남성을 죽인다는 사실, 옅은 즐거움으로 죽음에 즐거워하는 모습이 여성에게 어떤 혐의를 덧씌우는 것은 아닐까? <엘르>를 보고난 후 단정 짓기 힘든 여러 의문이 생긴다. 미셸은 어린 시절부터 사건의 목격자로 생존한다. 살해극은 또다시 강간과 폭력으로 반복되고 피해 입은 미셸은 목격자로 상황을 교묘히 빠져나간다. 죽어가는 강간범 남성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미셸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다. 응시의 주체인 미셸은 강간 게임의 설계자로 범죄적 상황을 게임으로 역전시키고 쾌락을 즐길 줄 안다. 이 시선의 주체는 마음대로 이웃을 훔쳐보면서 자위를 하거나 능동적으로 남성을 유혹하기도 한다. 아버지의 폭력과 희열은 미셸에게 각인되어있고 이 권력자가 만드는 게임 속에서 그녀 자신은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폭력적 주체가 된다. 게임의 설계자이자 응시의 주체에게 가장 강력한 처벌은 모든 상황을 바라보는 '눈알을 뽑아버리는 것'이다. (미셸은 고양이를 향해 '눈알을 뽑아내지는 않을지언정 할퀴는 정도는 할 줄 알았다'고 하거나 아버지를 두고 '그를 보느니 차라리 내 눈을 뽑아버리겠어요'하고 말한다) 미셸은 강간장면을 목격하던 고양이 마티의 눈처럼 유유히 사태를 관망하며 빠져나간다. 아무런 책임 없이 거짓을 이용하는 것, 게임의 규칙을 모르는 이를 또 다른 피해자로 만드는 것, 이것이 엘르의 결론이다. 우리는 욕망이 해방된 그녀(엘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남성적 시선에 갇힌, 고양이처럼 묘사되는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폴 버호멘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여성의 '교묘함'인가, 교묘한 '여성'인가. 어느 쪽이건 고매해 보이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