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2017)
일제 식민 지배 시기를 그리는 영화 속 주인공은 국가와 민족을 대변한다. 식민지배란 역사적 사실은 선악의 단조로운 구도에 액션이 가미된, 오락적 소재이곤 했다. 역사는 영화의 이야기를 위해 소진되는 듯 보였다. 이준익의 전작 <동주>(2016)는 투사의 영웅적인 면모가 아닌 한 시대를 살던 개인의 고뇌를 비추며 윤동주와 송몽규란 독립운동가를 성공적으로 그렸다. <박열> 역시 유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박열은 화려한 액션이나 언변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박열은 건들거리며 웃고 예리한 눈으로 꿰뚫는다. 장난하듯 세상을 조롱하지만 사실 그는 집요하고 진지하다. 권력을 조롱하고 비꼬는 젊은이의 결기와 뜨거운 분개는 초라한 행색을 뚫고 나올 정도다. 냉철하면서 객기부리고, 뜨거우면서 느긋한 박열은 이제훈이란 배우의 탁월한 연기로 완성된, 영웅 같지 않은 영웅이다
박열은 전혀 영웅 같지 않다. 후미코(최희서)는 <조선청년>지에 실린 박열의 시 '개새끼로소이다'를 읽고 박열에게 반한다. 양반 가랑이 아래에서 오줌을 맞지만 반대로 양반에게 오줌을 갈길 수도 있다는 그의 태도는 자신을 '아나키스트'라 소개하는 일본인 후미코와 같은 저항 정신을 공유한 인물이다. '폭동'이라는 말만 들어도 설레는 이 여성에게 박열은 일본인인 것에 아무 거부감이 없는 듯하다. 그는 '일본 권력에 반감이 있지만 민중에겐 오히려 친밀감이 들지!' 하기 때문이다.
박열은 영웅 같은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 그가 투옥된 사유는 간토대지진 이후 대책이 필요한 일본 정부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국가 주요시설에 폭탄을 던지려 한다는 소문을 알게 된 정부가 표적이 될만한 인물로 박열을 선정하고 -물론 박열은 폭탄 밀반입을 계획하긴 했었다- 조선인 단체들이 대지진 폭동을 선동했다는 방향으로 몰아가려 한다. 박열은 '치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고 조선인 대학살 사건은 보도통제와 조선인 배후설로 잊힌다. 박열은 영웅이 아니라 어처구니없는 시나리오의 희생자다.
박열이 영웅 비슷한 면모를 보이는 건 비범한 구석이 있기 때문인데, 바로 권력이 자기 정당화를 위해 사용하는 사법체계를 이용해 역으로 숨겨진 학살사건을 공론화하는 등 발언 무대로 삼아 권력을 공격한다. 박열은 '불량사' 회원들이 폭탄의 존재 여부를 모르며 홀로 히로히토 황태자에게 폭탄을 투척하려 했었다며 단독범행으로 허위자백한다. 박열은 사형이 무서워 할 말을 안 하는 사람은 아니다. 두 커플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
박열과 후미코는 근대화되었다는 일본 정부의 미개하고 야만적 체제를 고발한다. 조선인을 닥치는 대로 학살한 일본 자경단과는 달리 일본 정부는 '야만'에서 벗어난 상태여야 한다. 그래서 미즈노 렌타로 남작(개그맨 김원효 님을 닮으신)은 학살 사실이 외부에 새어나가지 않게 '보도 통제'하고 고문행위가 없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본 사법부는 대지진 폭동의 배후에 사회주의 조선인 선동이 있었다는 결과를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밝혀내야 한다고 지시하고, 박열에게 '정신감정'을 하려 한다. 심지어 단식하는 박열의 입속에 음식을 억지로 넣고 일본 사법부는 재판에서 피고의 요구를 일부 들어주거나 발언을 막지 않는다.
국제사회의 이목을 두려워하는 일본은 스스로 야만의 상태를 벗어났다고 믿고 싶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서구사회의 법과 합리에 기대지만 일본인 후미코가 보기에 이것은 민중을 기만하는 것이다. 일본이 유지하고 있는 천황제는 진보없는, 무지몽매한 상태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영화 <박열>은 '나는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는 박열과 후미코의 시선으로 일제강점기를 다시 보게 한다. 우리는 '일제강점기'라는 단어를 접하자마자 반사적으로 적의와 분노가 이글거리는 피해자 의식에 사로잡힌다. 국가와 민족이 아닌, 권력에 저항하는 이의 시선은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박열이라는 조선인과 후미코라는 일본인은 동거서약을 했고 아나키즘이라는 이념으로 저항했다. 일본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의 삶을 짓밟는다. 특히 후미코는 같은 일본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과 상관없이 '(민중에)고통 주는 자들에게 복수'하려 하고, 천황과 황태자를 향해 '평등한 인간 세상을 짓밟는 악마적 권력'이라 단언한다. 천황제는 '권력이 이익을 탐하기 위해 아름다운 형용사로 포장한 것', '민중을 희생하려는 권력자의 잔인한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개인을 희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관동대학살'이라는 엄청난 일을 자행했다. 바로 서구 제국주의를 흉내는 근대 사법체계의 정당화를 통해서 말이다.
박열의 과외선생이라는 후미코는 불쌍한 계급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자신을 알린다. 1919년 3.1 만세운동을 목격한 그녀는 '권력에 대한 반역정신이 일었고 남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감격'에 휩싸였다고 말한다. 이 비극적 사태는 후미코를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조건에서 사고하도록 일깨웠다. 일본의 반인륜적 행위를 사죄하고 박열을 응원하는 일본 민중을 기억해달라던 나카니시 선생의 말처럼 우리는 국가와 민족이 아닌 평범한 민중들, 권력의 억압에는 저항했지만, 결코 권력을 찬탈하고자 한 적은 없었던 피지배계급의 상태에서 역사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박열>은 한국영화이기에 이 사실이 왜곡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실화', '실존 인물'을 강조했다. 이 이야기는 일본에서 일어난, 일본인이 진술한 이야기라고.
영화 <박열>은 권력의 쟁취가 아닌 생존을 위해 저항했던 보통의 민중의 시각에서 역사를 재고하자고 말한다. 저항의 시점에선 응집해있다가 어느 순간 흩어져 보통의 삶을 사는 민중의 모습은 가장 최근 '촛불시위'로 나타난 바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박열이 '허황된 이상주의자'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다. 일본인과 조선인이 연대하고 사랑했던 뜨거운 인간애의 전리품인 '사진'처럼 우리는 국가와 민족의 프레임이 아닌 보통의 인간으로부터 역사를 바라볼 것을 요청받는다. <박열>은 이 역사적 사실을 대중영화의 제물로 만들지 않는다. 끝나지 않은 문제를 생동하게 만들어 현재화시키고 유효한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박열과 후미코를 살아 숨 쉬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