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가오는 것들>에 대하여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걷는다. 미아 한센 러브의 영화 <다가오는 것들>(2016)은 나탈리의 걸음을 비춘다. 궁극적인 목적(결과)을 향하지 않는 이 걸음은 나탈리의 태도이기도 하다. 반복 하는 운동과 일관된 태도, 이것이 <다가오는 것들>의 주제에 다가가는 키워드다.
<다가오는 것들>은 서사의 오르내림에 기대지 않는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고등학교 철학 교 사 나탈리의 평범한 일상에 별안간 사건이 몰려온다. 총서 판매량이 저조한 탓에 변화의 갈림길 에 서고, 남편 하인츠(앙드레 마르콩)는 다른 이와 살고 싶다 고백한다. 어렵게 요양원에 모신 어머니(에디뜨 스콥)는 돌아가시고, 같은 철학적 견해를 공유한다 믿었던 제자 파비앵(로만 코 린카)은 자신의 급진적 입장을 주장하며 스승 나탈리를 부르주아 지식인 취급한다. 아이를 출산 한 딸 끌로에의 울음은 나탈리를 당황하게 한다. 사건은 예고 없이 몰아닥치고 영화는 단순한 이야기를 느슨히 풀어 펼친다. '느슨함'은 <다가오는 것들>의 외견상 특징만은 아니다. 우리는 느슨해진 간격에서 정적인 이 미지를 만난다. 예를 들면 나탈리는 애인이 생긴 남편을 붙잡거나 밀어내는 대신 조용히 물건을 정리하거나 사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장례식에서도 긴 호흡으로 노래하듯 파스칼 '팡세'의 한 구절을 '읊는다'. 제자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상대를 설득하지 않고 곁에서 가만히 '바라본다'. 총 서에 가해질 변화도 내키진 않지만 '받아들인다'. 흘끗 스치거나 관조하는 행위는 이야기의 쓸모 에 부응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막연한 눈물을 쏟아내는 일이 고작이다. 말없이 묘사된 풍경은 어떤 극적 맥락이나 최소한의 암시도 지니지 않는 일상의 한순간이다. 햇살이 재잘거리는 파리 공원, 추억이 깃든 부르따뉴 별장과 바다풍경, 산 중턱과 반짝이는 계곡물, 눈 쌓인 시골풍경 앞에서 나탈리는 관람자처럼 우두망찰 서 있거나 프레임 안으로 걸어가 회화 속 주인공이 된다. 아름다운 음악 대신 얹히는 자연의 무수한 소음, 예를 들면 숲 속 풀벌레가 찌르르-윙윙거리는 소리, 출렁이는 물소리, 아이들 웃음소리, 아침을 여는 새소리의 자연 음향이 일상의 일회적인 순간을 부각한다. 자연 풍경이 이야기의 효율과 상관없이 정당한 시간을 부여받으면서 시간은 사건의 인과관계나 자기반성으로 소진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일상적 순간의 느슨한 연결을 바라볼 뿐이다.
문제는 해소되지 않는데 흔들림 없는 나탈리의 태도에서 위안을 얻는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 다. 뾰족 솟은 날갯죽지, 꾹 다문 입술에서 느껴지는 고집을 연기한 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탁월 함이기도 하다. 예상치 못한 사건은 인간 앞에 놓인 세계 자체다. 장례식에서 낭송한 <팡세> 구절이 말해주듯이, 인간은 '회의와 불안의 씨만을 제공하는 자연' 속에서 '개탄할 상황'에 놓여있 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로 절망하고 있다. 끊임없이 걸어나갔다가 되돌아오길 반복하 는 모습은 과거와 미래의 길 위에서 "광대한 중간의 파도 위를 표류(팡세, 파스칼)"하는 중간자인 인간의 모습에 다름없다. 미래는 생의 끝인 죽음에서 불어온다. (L'avenir(미래)는 <다가오는 것들>의 또 다른 제목이 다) 인간은 순간의 일희일비에 사로잡혀 죽음을 잊고 살지만 불현듯 생의 유한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슈베르트 가곡 <물 위에서 노래함> 가사처럼 인간은 물결 위에서 매 순간 사라지면서 동시에 생성되는 시간과 함께 사라질 운명이다. '다가오는 것(들)'은 우리를 선재(先在) 하는 전체인 시간이다.
인간은 무지와 비참, 허무 속에서 방황한다. 그렇지만 나탈리는 격정의 희열이나 위락(慰樂), 상상의 세계로 도피하거나 추락하지 않는다. 인생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철학(책)은 자신의 결함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진리에 다가가는 존재 방법이다. 그녀가 아는 것은 철학 '지식'이 아니다. 내가 당도하기 전에 이미 놓여 있던 자연 풍경처럼, 나의 순간이 전체의 시간 속에 있음을 안다. 손에 들린 책은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에서 한 사람의 시간으로 분기한 성찰이다. 나탈리는 문제투성이로 남겨진 불완전한 순간에 머물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수업에서 인용한 알랭의 <행복론>처럼 인간은 행복하기 전까지만 행복한 존재로, 행복한 '이상'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나탈리는 이미 존재하는, "변화하는 내면성(질 들뢰즈, 시간-이미지)"인 시간 속에서 문제가 있는 자신의 순간을 품는다. 순간을 품는 여유와 지혜를 통찰하는 계기는 시간에 대한 성찰에서 온다. 우리는 이 탁월한 프랑스 영화로부터 시간의 유한함 속에서도 방황하지 않고 질문을 멈추지 않는, '의식 속에 있는 자'의 품위와 광명을 본다. 죽음에 가까워진 노년의 나탈리가 계절의 변화를 묵묵히 바라보고 새로 태어난 생명에게 자장가로 노래하듯, 우리는 행복의 순간을 들이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