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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a Mar 20. 2019

한국영화가 제기하는 정치적 물음

<1987>, <국가부도의 날>, <공동정범>, <미쓰백>

   

  한국영화는 고통에 잠겨있다. 국가는 부패한 사회지도층들이 공모한 악행의 카르텔 속에서 공공의 기능을 잃었고(<내부자들>(2015), <더킹>(2017)) 공동체를 자기 존립의 근거로 삼는 공권력은 조폭보다 더 비정하고 비열한 암흑세계의 주인으로 군림한다. 선악의 구별이 무용해진 도시 세계의 주인공은 악인보다 더 잔혹한 자가 되어야 하는 고단한 노동과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는 파국의 말로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신세계>(2012), <아수라>(2016)) 장르를 망라한 다수의 영화에서 보통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국가의 무능과 시스템의 부재로부터 온다. <괴물>(2006), <해운대>(2009), <부산행>(2016), <터널>(2016) 등의 재난영화는 국가의 부재를 드러내기 위해 재난을 전면화한다. 역사 속 환란으로 인한 고통 역시 통치자의 무능이 원인이고(<광해>(2012), <명량>(2014), <대립군>(2017), <남한산성>(2017)), 극악무도한 식민통치의 주체인 일본(<암살>(2015), <군함도>(2017)), 위기를 강화하고 핵이라는 파국의 상상을 추동하는 북한의 적대(<인천상륙작전>(2016), <연평해전>(2015), <강철비>(2017))에 대응하지 못하는 주체도 국가다. 이방인 또는 비정상인 사이코패스의 잔혹 범죄(<범죄도시>(2017), <청년경찰>(2017)) 역시 공적인 대응 능력이 부재한 사회상의 일면이다. 역사의 거시적 풍경에서 지금의 삶의 주변부까지 한국영화는 국가와 정치에 대한 질문을 반복하며 국가가 부재한 상황 속에서 적대와 공포를 밑천 삼는 정치적 공허를 전시해 미래 없음의 비관적 정서로 스크린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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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영화의 비관적 정서는 공공적인 것에 대한 불신의 경험과 공명한다. ‘이명박근혜’로 칭해지는 보수 정권 10년의 결과는 텅 빈 국가란 민낯의 목격이었다. 사회적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들(2009년 용산 참사, 2014년 세월호 참사, 2015년 메르스 사태, 2016년 지진 등), 각종 불법과 비리가 만연한 혼란(국정농단, 사법 농단 등)은 국가와 정치의 공백을 지시하는 것이었으며, 일반적 상상을 넘어 영화적 스케일을 압도하는 실재의 일면을 들추는 것들이었다. 참사를 조장하고 방조했던 정권을 퇴진시키고 새 정권을 출범시켰던 촛불시위에도 불구하고 ‘헬조선’, ‘흙수저’의 단어가 표상하는 희망 없는 미래, 자기혐오의 정서는 여전히 남아있다. 처리되지 못한 정의의 공백, 정치의 불신이 상존하는 것이다. 국가의 폭력, 국가의 위기, 국가의 부재… ‘국가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품은 사회에 한국영화는 정의가 정치적 장소에서 폭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정의는 국가의 능력과 힘의 논리에서만 주장될 수 있을까? 본 글은 역사적 사건 또는 실화를 소재 삼는 한국영화에 나타난 정치에 대한 태도와 영화가 수행하려는 정치의 의미를 질문하면서 시작되었다.





폭력의 언어, <1987>과 <국가부도의 날>


  2018년의 시작과 말미를 <1987>(2018)과 <국가부도의 날>(2018)로 매듭지은 한국영화는 역사의 트라우마적 순간을 붙들고 현재의 시간에 질문을 던진다. <1987>에서 6월 항쟁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기, 97년 외환위기로 망가진 채 지금까지 달려온 도시를 비추는 <국가부도의 날>의 엔딩은 국가와 정치에 대한 현재적 요구와 질문을 반영하는 듯하다.

  두 영화는 사건을 알리고 폭로하려는 내부고발자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비춘다. <1987>의 초반부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규명을 외부로 알리고자 하는 검찰과 언론인들의 사투에 주목한다. 최초로 사건을 접수한 공안부장 검사 최환(하정우)은 진상규명을 위해 촉각을 세우는 기자들에게 내용을 간접적으로 흘리고, 모두의 노력으로 사건은 외부로 알려진다. 언론인과 민주화운동세력 간 가교역할을 하던 교도관 한병용(유해진)과 조카(김태리)의 서신교환 역시 진상 고발의 행위에 해당한다. 군부독재를 종식한 6월 항쟁은 은폐된 죽음이 외부에 알려질 수 있었던 순간에 시작되었다. <국가부도의 날>에서 유일하게 재난의 징후를 예감한 인물은 한시현(김혜수)이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인 한시현은 한국 정부에 대한 신뢰 저하로 외국 투자자들의 달러가 빠져나가는 상황을 우려한다. 정부는 해외 투자자가 투자금을 회수해 가면서 발생할 위험에 미리 대비해야 하지만 경고에 귀 기울이는 이는 없다. 한국은행 총장(권해효)이나 경제수석(엄효섭), 재정국 차관 박대영(조우진)과 같은 국가 고위 관료들은 시장위험을 알리기보다 축소하고 은폐하며 위기에 대응하지 않는다.

  내부고발자는 국가란 폐쇄적 억압을 넘기 위해 분투한다. <1987>의 대공수사처장 박처원(김윤석)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정권의 공권력은 증거인멸을 회유하는 ‘청와대 돈 봉투’와 지폐뭉치가 든 ‘현금 상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편하게 아랫도리를 푸는 폐쇄적 술집, ‘받들겠습니다’의 답변으로 알 수 있는 수직적 명령체계로 그려진다. 이 세계는 권력을 나누어 가진 이들이 만든 부패 관계로 밀폐된 의사소통 체계이다. 이들은 실제 대면조차 없는 ‘각하’ 전두환의 명령 아래에서 날뛴다. <국가 부도의 날>의 한시현에게 외환위기보다 더 풀기 힘든 숙제는 국가의 정책결정자들이다. ‘IMF 구제금융’에 반대하는 한시현은 주변 선진국의 국책은행에서 달러를 빌려 채무를 해결하거나 정부 자산을 담보로 금융증권을 발행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한국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IMF의 조건(종금사 부도처리, 금리 인상, 자본시장 개방, 노동 유연화 등) 앞에서는 한국경제의 부도를 인정하는 모라토리엄(빌린 돈에 대해 만기에 상환을 미루는 행위)을 선언하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내부 능력으로 위기를 타개하고자 고심하는 한시현이 부딪힌 장벽은 IMF가 아니라 협상테이블에서 한국의 입장을 반영해야 할 고위 관료들의 태도다. 그들은 시장을 고쳐 쓰기보다 시장이 근본적으로 바뀌길 원하며 IMF 구제금융 외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이 바로 대한민국이 변하는 순간이다. 그냥 외환 위기가 아니다. 노동조합 새끼들 틈만 나면 징징거리고 파업이나 해대고. 그런 나라를 한방에 바꿀 기회다.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 기회’라던 재정국 차관의 대사에서 드러나듯, 이들에게 IMF의 조건은 내부적 결함이 있는 대한민국 경제 시스템 전체를 뜯어고칠 기회였다. 하버드 대학 동문으로 대기업 회장 아들과 동석하는 경제수석과 차관 등의 모임은 국가적인 위기를 기회 삼고자 뭉친 학벌과 권력, 성별 중심의 정계와 재계의 카르텔, 달러로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 중심의 시스템이 해답이라고 믿는 미국 유학파의 편협한 신념을 반영한다. 이들의 관점에서 한시현은 ‘중요한 순간에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여성으로 축소되며 한강에 투신하는 이들의 삶은 새로운 시장체제로의 변화를 위해 배제되고 정리되어야 하는 요소에 불과하다.

  국가 공권력에 은폐된 진실이 폭로되어야 한다는 절박함, 망각과 어둠 속에 진실이 묻혀있다는 어떤 상상, 이것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지나오면서 겪은 트라우마적 공포의 반응이다. 골든타임을 놓친 채, 산 자들을 데리고 어둠 속으로 침몰해 버린 세월호는 최소한의 재난관리 능력조차 없던 국가의 침몰이었다. 세월호 참사가 죽음을 목격하도록 만든 직접적 공포였다면, 세월호 참사 이후 정치인들과 직접적 사고 책임이 있는 회사의 최고 경영자들이 보인 모습, 세월호 참사 피해자 유족 및 관계자들의 비참한 삶, 사고를 은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재난을 정쟁화했던 박근혜 정권의 국정 농단은 재난을 통해 새로운 재난을 낳는 부차적 공포를 확대했다. 공석에나 다름없던 최고 책임자의 모습, 불법 행위를 비호하던 관료들의 조직적 행태와 해양재난 및 관리업무를 담당하는 해수부 관료가 해양 사업을 점령한 폐쇄적 카르텔, 정치인, 법조인, 기업인 할 것 없이 부패로 뒤엉켜 현재의 기형적 상태에 도달한 한국 사회의 현실은 무고한 이들의 죽음과 함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한국영화는 총체적 불신과 공포에 책임을 묻는다. 불신의 회복과 정의를 구현하는 정치의 문제를 국가와 공동체라는 적대 속에 기입하는 것이다. 80년대 신군부세력의 무소불위 권력자가 호명하던 ‘국민 여러분’의 국민은 민주주의에 직접 참여하는 시민이 되기 위해 87년 항쟁의 광장에 운집했다. 새로운 정치를 꿈꾸던 결과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성취로 그쳤지만, 이전의 정치적 형태를 바꿨다는 점에서 <1987>은 선량한 청년의 희생, 다수의 시민이 만든 광장을 숭고의 순간으로 특권화 한다. 새로운 정치를 위해 87년 민중이 피 흘려 얻어낸 민주주의의 가치는 97년 외환위기의 재난을 발판삼아 새로운 시스템으로 통치하는 국가에 훼손된다. 가라앉는 배를 버리고 탈출한 선장처럼 <국가부도의 날>은 재난 상황에 남겨진 사람들의 유일한 선택이 ‘생존’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다룬 영화<빅쇼트>(2015)에서 시장붕괴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고뇌가 자본주의란 시스템의 근본적인 문제, 즉 원본 없는 시뮬라크르 자체인 합성CDO(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 금융회사 대출 채권을 유동화시킨 신용파생상품)가 축적한 위기인 자본주의 시스템에 내재한 속성과 관련한다면, <국가부도의 날>은 위기의 원인을 국가의 정책 결정 과정에 있다고 지적한다.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는 종금사 직원 윤정학(유아인)의 사회적 성공은 타인의 죽음으로 부를 획득하는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적 신자유주의에 완벽히 적응한 자만이 살아남은 현실을 강조한다. 투기한 강남 부동산 중 빈 집에 목을 매고 죽은 집주인 앞에서 ‘여기가 내 집인데 내가 왜 나가’라던 윤정학의 위악, 아들에게 ‘그 누구도 믿지 마’라며 불신을 강조하고 더 싼 노동력으로 대체된 외국인 노동자를 감시하는 제조업 공장장 한갑수(허준호)의 모습은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적응한 사회의 단면이다. 과거의 한시현처럼 홀로 내부적 결함을 발견한 이아람(한지민)이 도움을 구하는 결말은 과거와 같은 위기의 순간에 동일한 방식의 문제해결로 대처할 것을 암시한다. 바로 선악의 이분법 속에서 희생자 공동체를 구하려는 대표자의 입술에 주목하는 방식이다.

  한국영화는 역사적 사건에 기대어 정의와 정치를 질문한다. 정치가 시작되는 여럿의 목소리는 국가 대 시민, 불의와 정의, 거짓과 진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에 놓인 소수의 윤리적 선택으로 대체된다. 내부자들의 용기나 신념에 기댄 폭로가 아니라면 진실은 영원히 폐쇄적 어둠에 묻혀있을 것이라는 상상, 폭로되는 소수의 말에 희망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한국영화는 규제 완화, 노동 유연화, 민영화라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불러온 죽음과 공포의 현 상황을 87년 체제 이후 급격히 변화한 역사적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공적 가치를 지닌 소수의 진실이 폭로되길 기대한다. 그러나 금지되고 언어화되지 못한 목소리는 이분법적 대립에 호소하는 스펙터클의 재현에 묻히고 정치는 개인의 윤리적 선택으로 축소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를 질문하는 영화는 폭로의 말에 기댐으로써 정치적 사유를 중단시킨다.  

  

 




사실의 언어, <공동정범>  


  상업영화가 절대 악에 대항하는 정의, 보통의 삶을 구할 윤리를 주장한다면 다큐멘터리 영화<공동정범>(2018)은 정치가 국가와 시민사회 간 대립 및 윤리적 호소로 해결될 수 없는 정치의 문제를 전면화한다. 김일란, 이혁상 감독은 <공동정범>에서 2009년 1월 20일 새벽, 경찰의 무리한 진압 작전이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기억된 ‘용산 참사’를 다룬다. 전작 <두 개의 문>(2012)은 경찰 채증 영상, 증언, 보도 기사와 현장 기자의 인터뷰, 변호인단과 인권활동가의 다양한 기록으로 참사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했다. 증거와 증언을 고려하지 않은 법적 판단의 허위성을 지적하고 국가와 사법적 판단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 정리된 <두 개의 문>과 달리, <공동정범>은 생존자이자 희생자인 철거민에게 참사의 책임을 지우고 사건을 종결시켜버린 재판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죽음의 원인을 찾고자 바깥에서 망루 내부를 비추던 카메라는 <두 개의 문>에서 생략된 2013년 출소한 생존자(김주환, 김창수, 이충연, 천주석, 지석준)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공동정범>에는 세 개의 망루가 있다. 하나는 공동정범이란 죄로 철거민들을 하나로 묶는 참사 현장인 망루, 두 번째는 생존자 각자의 기억 속에서 서로 다른 증언으로 일치하지 않는 각자의 망루, 세 번째는 연대의 가능/불가능 사이에 놓인 새로 지어져야할 망루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공동정범’은 각기 다른 배경의 철거민들을 하나의 죄로 묶는다. 망루는 연대투쟁의 상징이지만 화재가 일어난 죽음의 장소이기도 했다. 공동정범이란 죄목은 ‘2인 이상의 책임 능력이 있는 자가 서로 공동으로 죄가 될 사실을 실현하고 공력한 정도를 불문해 전원을 정범자로서 처벌’하는 내용이다. 각자가 분담해 범죄를 이행했지만, 각자는 전체에 대해 사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망루는 용산 철거민과 이들을 돕기 위해 온 다른 지역 철거민의 연대가 만든 구조물이다. ‘통신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기 만지는 일을 해서 망루 옥상에 전기를 끌어다 줬다’는 김창수씨, ‘철골 비계 조립을 잘해서 망루 짓는 일에 도움을 줬다’는 김주환씨는 자신이 잘하는 일이라 망루 짓는 일을 도왔다. 망루 투쟁으로 교섭을 예상했던 지석준씨도, 망루로 집중되는 언론 인터뷰가 반가웠다는 이충연씨도 망루에서 참사가 일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김창수씨의 말처럼 그들을 망루로 오르게 한 것은 유례없는 진압작전이 준 두려움이었다. 망루는 연대의 결과물이자 교섭의 수단이었지만 공동정범이란 사법적 판단은 연대를 공동의 죄로 묶었다. 공동체를 보호한다는 명분은 복수의 철거민을 단수의 치안 대상으로 만들어 공동체에서 배제한다.

  망루는 기억이다. 공동정범의 죄목은 철거민들을 배제의 집단으로 묶지만 이들의 기억은 하나의 기억으로 수렴하지 않는다. 참사 이후를 살아온 시간 동안 생존자들 간 갈등의 골은 깊어져 있다. ‘용산은 용산 싸움이 아니라 연대싸움’, ‘연대 사람들이 더 죽고 더 다치고, 더 감옥 갔다’는 천주석씨 외 다른 지역 철거민은 ‘구속자 연대 동지회’ 모임을 통해 감정적 고통을 나누길 원한다. 이들은 ‘용산 철거민 대책위원장’인 이충연씨가 새로운 연대에 동참하지 않는 것을 두고 용산에 외면당했다고 생각한다. 생존자이자 희생자 유가족인 이충연씨는 감정적 고통을 나누는 것보다 다른 투쟁 활동에 동참해 용산 참사의 진상규명 활동을 알리고 잊히지 않도록 연대를 확장하는 노력이 실질적 위로를 줄 것이라 여기며 책임감을 느낀다. 삶이 박살 난 철거민은 누구의 희생이 더 고통스러운지, 누가 망루에 가라고 지시했으며, 누가 전체를 책임져야 하는지 고통의 무게를 재려 한다. 이런 생존자들에게는 수치와 죄책감이 묻어있다. 누군가 망루의 진실을 털어놓았더라면 모두의 희생이 경감되었을지 모른다는 실패의 수치, 세녹스(인화 물질)를 뿌린 자신의 행위 때문에 화재가 발생했을지 모른다는 자책, 아버지와 연대 철거민을 뒤로하고 먼저 탈출했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은 살아있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생존자의 감정일 것이다. 이런 각자의 감정은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는 가운데 더욱 자신을 방어하도록 만들며, 망루의 기억은 각자의 망루에 고립된 채 반복된다. 그날 망루 안 진실을 밝히는 일은 가능한가? 진상규명이란 무엇인가? 생존자의 질문이 실패로 귀결되는 것은 공통의 언어로 증언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망루의 진실은 죽은 자에게만 속한 것일지 모른다.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불타는 망루를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불타는 사건 ‘속에’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감정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기억의 대립은 철거민들 개개인의 얼굴과 목소리를 남긴다.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이충연씨가 말을 멈추고 눈물을 흘리는 순간까지의 침묵, 잔뜩 격앙된 천주석씨가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며 언성을 높이는 추궁, 냉담한 어조로 미안하다는 이충연씨와 말을 잇지 못하는 이들 사이의 감정적 고립상태와 얼굴들. 카메라는 진실을 구하기 위해 갈등하는 얼굴과 감정을 삭제하지 않는다. 눈물 흘리는 순간 휴지를 건네주거나 고통을 소리 없이 경청하는 영화는 이 갈등 속에 진실이 있다고 말하려는 듯하다. 카메라는 어떤 증인도 남겨두지 않은 사건과 기억을 언어화할 수 없는 불가능과 가능 사이를 비추지만, 생존자의 기억으로 진실이 드러나길 바라는 관객의 바람은 채워지지 않는다.

  각자의 망루로 흩어진 생존자들의 새로운 망루는 가능할까? 은폐된 진실의 말이 사회를 구할 것이라 믿으며 국가와 정치에 분노와 적의를 쏟아내는 한국영화들 가운데 <공동정범>은 진실을 증언하는 것의 불가능성, 연대의 불가능한 조건에 놓인 생존자 각자의 불안과 두려움, 갈등의 목소리와 얼굴을 비추며 새로운 감각으로 ‘용산 참사’를 구성한다. 고통과 갈등은 폭로로 주장되는 진실의 ‘말’이 아니라 특정 집단과 담론에 묻혀있던 개개인의 목소리, 증언의 힘겨움으로 고독에 몸부림치는 ‘소리’에나 다름없다. 다섯 명의 생존자는 진상규명을 위한 두 번째 모임에서 진실을 구하고자 각자의 기억을 꺼낸다. 고통에 호소하며 타자의 책임을 추궁하던 감정은 내려두고 대화와 관계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망루에서 먼저 탈출한 이충연씨의 죄책감은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는 동지의 위안을 얻는다. 사망한 윤용현씨, 이성수씨에게 탈출을 도움 받았다고 기억하는 지석준씨의 기억은 타인의 기억과 영상 간 대조과정을 거쳐 마음의 부담을 덜게 된다. 기억을 꺼내는 일을 힘겨워하던 천주석씨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시퀀스는 끝이 나고 ‘화재 원인은 여전히 의혹으로 남아있다’는 자막이 공백을 채운다.

  <공동정범>은 죽음의 망루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각자의 망루에서 나와 자기가 가진 기억의 조각을 꺼내놓으면서 회복될 수 있는, 공통의 문제에 다시 관계 맺음으로 근접할 진실의 가능성을 비춘다. 참사의 현장은 공터에서 숲으로, 재개발부지로 변한다. 국가시스템을 자처해 살인을 명령하고 방조한 김석기 전 경찰청장은 한국공항공사 사장에서 국회의원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이 정치보복이라 일축하는 일관된 삶을 살아간다. 영화는 사실을 진실이라 말하지 않는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무를 찍은 쇼트는 장소에 대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참사를 둘러싼 목소리와의 관계 속에서 죽음과 비참에도 무상이 흘러가며 세상의 변화 속에 묻히는, 그럼에도 현재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남겨진 사건에 대한 감각으로 재구성된다. 우리는 망루의 진실이 하나의 결정적 언어로 점유되거나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조각난 목소리를 통해 구성될 수 있음을 곁의 자리에서 지켜본다. <공동정범>은 치안이 분할한 경계 밖의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도록,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말로써 듣게 만드는 개입의 정치로 공동의 망루를 다시 지을 수 있음을, 새롭게 구성될 수 있는 진실의 가능성을 비춘다.


 

수평적 관계의 언어, <미쓰백>

  

  폭력으로 망가진 피해자의 삶은 회복될 수 있을까. <미쓰백>(2018)의 백상아(한지민)는 홀로 고립된 피해자이다. 유년기 가정폭력으로 보육원에서 자랐고, 학창시절에는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은 성폭력 사건으로 살인미수라는 낙인이 새겨졌다. 세차, 마사지 같은 육체노동에만 죽도록 몰두하는 백상아는 주변에도, 자신에게조차도 감정을 주지 않는다. 과중한 노동은 상처를 잊기 위해 육체를 소진하는 몸짓 같다. 그녀는 곁에서 걱정하는 장섭(이희준)의 마음도 차단한다. 고립을 자처하는 백상아에게 관계 맺음은 죽음만큼이나 무거운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부부라는 관계로, 어린 백상아는 부모라는 관계 속에서 폭행당했다. 자신이 버려졌다 믿으며 어머니 죽음에 애도할 기회조차 박차버리는 것은 관계를 단절하려는 의지에나 다름없다. 주변의 모든 이들을 무심히 스치기만 한다면 이미 지옥인 세상을 유령처럼 통과할 수 있기에, 그녀는 말이 없다.

  <미쓰백>은 트라우마로 고립된 백상아와 김지은(김시아)을 가정폭력과 아동학대란 관계 불능의 지점에서 마주 세운다. 백상아가 별다른 대화 없이도 어린 지은의 처지를 한눈에 알아본 것은 아이의 상처와 아픔에 온몸으로 감응하기 때문이다. 지은의 맨살에 새겨진 멍 자국과 상처, 추운 겨울 겉옷 한 장 없이 맨몸으로 거리에 선 지은의 고통은 트라우마적 고통을 안고 살아온 백상아 자신의 모습에나 다름없다. 그래서 상처를 망각하려 애쓰면서도 아이의 고통에 감응하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아이는 그 모습을 거울처럼 반사한다. “‘미쓰백은 미쓰백이 싫어요?”라고. 아마 둘의 관계는 백상아가 자신을 ‘미쓰백’이라 알려줬을 때, 지은에게 불리고 응답하길 자신에게 허락했을 때 시작되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희미한 소리는 서로라는 관계에서 의미 있는 말이 된다. 폭력의 피해자가 짊어진 고통은 현재의 당사자가 해결할 수 없는 과거란 시간의 불가능성 속에 있다. 폭력으로 남은 상처는 자기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으며 어떠한 관계도 피해자라거나 동정이라는 말로 환원되는 이중의 고립상태로 귀결된다. 어떤 말을 해도 그 말의 결과가 자기 고립의 결과를 가져온다면 대화의 쓸모는 사라진다. 말을 포기했고, 말을 상실한 백상아가 지은에게 상처를 보이는 것은 경험이라는 공통의 말을 공유함으로써 서로를 평등한 전제 위에 놓으려는 시도이다. 백상아는 지은에게 상처를 나누면서 위로받고 과거의 유폐된 시간에서도 나오게 된다. 어머니(김선영)에게 버려졌다고 믿는 백상아의 과거는 폭력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어머니의 ‘보호’로 재의미화되면서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과거 전체를 끌어안는 애도가 이뤄진다. ‘나’를 벗어나지 못하는 고립은 상처의 서사를 반복하지만 외면할 수 없던 타자와의 만남은 ‘우리’라는 관계의 확장과 함께 나의 이야기를 수정하는 계기가 된다. 이웃으로도, 동네 꼬마로도, 그저 불쌍한 아이로도 환원할 수 없는, 지은이라는 유일무이한 존재와 관계맺음으로써 말이다. 백상아도 어머니에게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영화의 시작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반복되는 미장센, 몇 발자국 거리에 나란히 마주 선 지은과 백상아의 풀 숏(Full shot)은 두 사람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함축한다. 지은과 백상아의 관계는 사회적 관계로 기입되지 않는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학대하는 아버지들, 보호자 역할을 하지 못하는 가정은 실패된 관계다. ‘결혼’하자고 고백하거나, 며칠이라도 ‘엄마 노릇’하라고 했던 장섭의 말 역시 실패한다. 백상아는 지은을 살리기 위해 달려간 응급실에서도 ‘보호자’란에 서명하지 못한다. 지은을 구하고 지키는 백상아의 노력은 ‘엄마’ 또는 ‘법적 보호자’일 사회에 승인된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수직적 위계를 포함하는 사회적 관계는 허울에 불과하다. 아이를 내려다보는 부모의 시선이 반영하듯 위계는 힘 있는 자에게서 힘 없는 자, 더 가진 쪽에서 덜 가진 쪽이라는 하나의 방향만을 전제한다. 장섭의 청혼이 백상아에게 지긋지긋한 ‘동정’이었던 것은 두 사람이 불균등한 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백상아와 지은의 관계는 위가 아래에 베푸는 수직적 위계가 아니라 흐르는 물처럼, 수면 위 파동이 다른 파동을 만들듯 수평하게 맺어진다. 백상아와 지은, 두 사람의 상처는 서로라는 관계 속에서 의미를 구축하며 모두를 살린다. 힘 있는 말이 약자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엄마는 지옥에 있다는 미쓰백의 머리를 쓰다듬는 지은의 손길처럼 손잡아주고 상처에 눈물 흘리며 서로의 곁에 있겠다는 진심과 평등한 관계가 두 사람을 구한다.

  영화는 두 사람이 도달한 관계로부터 상처의 치유 가능성을 비춘다. 그것은 바로 몇 발 떨어진 ‘거리’이다. 가족, 친척, 친구, 이웃… 어떤 관계로도 정의되지 않지만 누구보다 내밀하게 서로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동등하고 수평적인 관계, 혼잣말로 그칠 작은 웅얼거림도 의미 있는 말로 소통할 수 있는 근거리에 서로가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를 ‘곁을 파괴하고 편을 강요하는 사회’로 진단했던 엄기호는 지지나 적대의 말로 힘에 의지하는 정치가 동질성에만 머무르는 사회를 낳는다고 해석한다.(『단속사회』, 엄기호, 2014) 이질적 타자의 만남은 차단하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단속(斷續)사회에 남겨진 과제는 고통의 곁에서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연속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서로의 곁을 트는 관계 맺음으로 두 피해자는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들의 관계가 남성/여성, 가족/이웃의 경계를 허무는 주변인(장섭과 장섭의 누나)의 관심과 도움이 있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피해자에게 말을 하도록 곁을 내어주는 힘이 고립된 망루를 허물고 주변과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한다. 우리는 사소한 말, 미처 공동체에 닿지 못한 웅얼거림을 의미 있게 만드는 관계 속에 희망이 있음을 확인한다. <미쓰백>은 서로가 동등하다는 평등의 전제에서 출발하는 개입, 공동체에 받아들여지지 않던 소리를 말로써 기입하는 정치를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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