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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a Aug 29. 2016

절망 끝에서 '엿먹어', 장 마크 발레

<데몰리션>그리고 <와일드>, <달라스바이어스클럽>




   우리는 '일상', '반복', '안정'을 원한다. 일상은 하루하루가 예측가능해야 편안하다. 우여곡절이 없는 일상이 평탄하게 흐르다보면 그 삶의 무게와 속도는 점차 잊혀진다. 어떤 속도로 달리고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관계는 어떤지, 시속300km상태로  정신없이 내달리는 KTX 객실의 정지된 공간에 있는 마냥 마찰없이는 그 상태를 가늠하기가 힘들다.
   

   각성을 위한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육체활동을 늘려 고통을 느껴본다. 많이 걷고 많이 뛰고, 웨이트로 근력을 키우는 등 중력과 아둥바둥 싸우고 나면 몸뚱아리가 끙끙 앓는다. 가벼운 몸살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떤 일에 몰두해 잠과 씨름하고 밤을 꼬박 새우고나면 졸려 죽을 듯한 느낌이 되려 활력을 준다. 난 살아있구나(또는 '아직 살아있네'하는 안도). 모두에게 이런 노하우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은 달리던 기차를 강제로 멈추는 것, 사건에 쾅 들이받고 산산조각 나버린 일상에서 내달리고 있던 속도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내는 것 아닐까. 멈추고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장 마크 발레의 주인공들이 그렇다. 에이즈에 걸려 병과 싸우며 살아가는 론(<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3)), 태평양종주로 고통과 맞서 싸우는 셰릴 스트레이드(<와일드>(2014)), 아내를 잃고 문제를 파헤치려 모든걸 분해하고 파괴하는 남편 데이비스(<데몰리션>(2016)). 이들은 삶의 문제 속에서 적극적으로 문제를 직시하고, 느리지만 고통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려 힘겨운 싸움을 하는 인물들이다.




멈춤



   일상을 멈추게만든 사건은 뜬금없고 갑작스럽다. <데몰리션>의 데이비스는 2주나 물이새는 냉장고를 고치라며 "내꺼 아니다, 내 문제 아니다 이거지?"하던 아내 줄리아와 교통사고를 겪는다. 깨어난 병원에서 아내의 죽음을 전해듣지만 그는 무감각하다. 거울 앞에서 우는표정을 연습할 정도로 무감각한 데이비스의 문제는 슬프지 않다는 것이다.
   몸만큼 크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려 바둥대는 <와일드>의 셰릴 스트레이드는 엄마에 대한 기억과 어떤 남자와의 잠자리를 가졌던 기억 등을 떠올리며 4285km의 태평양 종주하는 배낭 하이킹을 시작한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거지? 의심하면서.
   사기를 치고, 여자를 사고, 게이를 증오하고, 흑인은 차별하는, 술과 마약, 섹스에 쩔은 백인 론 우드루프는 섹스로 인해 에이즈판정을 받는다. 마치 형벌같은 30일의 시한부 판정 이후 그는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호모새끼'라는 혐오를 받으며 죽음 앞에 비틀대며 쓰러진다.
   인물들은 일상의 흐름을 끊어내는 사건 속에 이유없이 내던져진다. 일단 고통에서 출발하기 시작한 그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전진한다. 태평양 종주에 필요한 물품들이 잔뜩 들어있는 짐을 버릴 수 없는 셰릴 스트레이드처럼 슬픔과 고통을 잔뜩 짊어지고, 때론 짓눌릴 듯한 무게를 버티며 서서히 전진해나간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겼나 하는 감상이 아니라 문제를 정확히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뚫고 나가는 것에 열중한다. 약간의 멍함을 느끼며 전진하는 것.





답을 찾는 과정



    <데몰리션>의 데이비스는 왜 아내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걸까? 왜 셰릴은 극도로 힘든 하이킹 과정에 자신을 내던진 걸까? 성차별, 인종차별자였던 론은 왜 트랜스라 차별받는 레이언의 기분을 염려하며, 면허취소된 멕시코의사의 조언대로 에이즈 약(AZT)을 버린 것을까? "전에는 못보던 것들을 본다. 보긴 봤는데 무심히 본 것들. 모든게 은유가 되었다."는 데이비스의 말처럼 이들은 일상의 속도와 관행 속에서 잃었던 것들을 직시하도록 하는 여정 위에 놓인다.

    문제의 본질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문제를 알기위해 사물을 부수고 분해하고 뜯어본들 알 수가 없다. 문제가 에이즈 같은 병에 있다면, 주인공은 그 병이 일으키는 효과나 증상에 주목하고 고통을 없애는 편에 집중하거나,  후회스런 지난 과거가 문제라면 그것의 무게를 직접 짊어져 현실감을 느끼고 삶을 인정하려 노력한다. 남일처럼 방관하던 자신의 문제들을 직접 대면해 깊은 곳에서부터 끄집어내어 글로써 남기고 마주하는 과정, "지금부턴 나와 내 연장이 있을 뿐"하며 분해를 가하려던 데이비스처럼 그들의 '과정'자체가 해답처럼 제시된다.

   데이비스가 아내와의 관계에 무감각했던 것은 매끄럽고 모던한 인테리어의 집 때문은 아니었을텐데, 마치 집이 원인이라는 듯, 그는 신나게 부숴버린다. 으르렁대며 리듬을 타고 결혼을 박살낸다며 해머를 던지고, 불도저로 밀어 화를 쏟아낸다. 남들이 보면 번듯한, 모두가 꿈꾸는 집이지만 데이비스는 캐런에게 '겉만 번드르르'하다고 한다. 사실 그의 인생 전체가 그랬을지 모른다. 실체없는 자본을 사고 팔아 이윤을 남기는 금융인인 데이비스는 '돈'을 쥐지도 않은 채, 숫자만을 다루는 사람이니까. 겉만 번드르르한 매끄러움을 유지하려면 마찰같은 것은 있어선 안된다. 그래서 그는 자의든, 타의든 쭉 무시의 태도로 살아왔을 것이다.

<데몰리션> 집을 박살내며 신나하던 데이비스의 모습



진보적 태도로서의 '엿먹어'


    인생은 매끄럽지 않다. 자연 속에서 자신을 잃고 비통해하던 셰릴은 도전의 끝에서 만난 '신의 다리'에서 삶에 대한 진리에 가까운 성찰을 얻는다. 자신에게서 등돌리고 회피하며, 잡히지 않고 항상 미끄러지며, 자신의 것이지만 영원히 닿을 수 없이 유령처럼 스치고 마는, 자신의 '과거'의 무게로부터 '삶은 다른 삶과 같이 별나고 바꿀 수 없고 신성하다'며 자신이 정말로 자신에게 속해있는 현재성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인 인생 전체로서의 실재. 과거는 나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닌 나의 '전체'란 사실을.
   이런 태도는 론에게서도 발견된다. 트랜스인 레이언과 악수하고 포옹한 론은 그의 죽음을 받아들인 이후, 적어도 돈을 위해서 약을 팔진 않는 것 같다. 사업에 돈 문제가 있지만 론은 찾아온 모든 사람들에게 약을 주라고 지시한다. 성차나 인종이나 계급에 관계없이. 그리고 불합리한 FDA의 약장사에 환자들이 놀아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문제제기하고 인생전체를 '의미있는 것'에 바친다. 누군가를 위해 싸워준 의미있는 행동의 결과로서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론.


    환자를 죽이는 약물이라는 것을 알고도 환자의 몸에 약을 주사하는 의사집단을 향해 'fuck you'라던 의사 이브, 데이비스에게 건물 폭파 현장을 선물로 초대하며 'go fuck yourself'하던 크리스의 추신, 고통 속에서 과거를 끌어안으려 싸우며 벼랑 끝에서 'fuck you, bitch'라 고함치고 나머지 신발도 내던지던 셰릴…. 이들로부터 세상을 향해 취할 수 있는 진보적 태도로서의 '엿먹어'란 메시지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달라스바이어스클럽> 카우보이 모자를 쓴 론은 매튜 맥커너히, 트랜스젠더인 레이언은 자레트 레토가 연기했다. 트랜스인 레이언을 대놓고 빈정대던 티제이의 목을 조르고 '정중히 인사해라, 악수해라'던 론, 레이언과 포옹하던 장면, 비통해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와일드> 실존인물 셰릴 스트레이드 역할을 한 리즈 위더스푼, 정말 멋진 영화여서 모두가 빛났던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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