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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a Sep 11. 2016

바벨의 언어, 비극적 결말에 대한 의심

바벨(2006)






  인간은 죽음 앞에서  절실하게 신을 찾지만, 신은 아무 관심이 없다.  우리는 이렇게 버려져 있다, 폭력에 찌들어 피비린내가 말라붙은 이 거리에, 모래와 자갈, 죽일듯이 내리쬐는 볕으로 황폐한 이곳에, 관계맺음에 실패한 무수한 우주들로 반짝이던 대도시의 어둠에서, 온몸을 던져 애정을 갈구하지만 말라버린 관계 속에, 죄도, 회개도, 살아서는 그 어떤 구원의 희망도 없는 듯 척박하고 메마름에 몸부림치는 모습으로.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영화의 인상이다. <아모레스 페로스>(2000)나 <21그램>(2003)처럼 <바벨>(2006)은 연관이 없는 듯 보이는 몇개의 에피소드들이 퍼즐을 맞추듯 하나의 주제로 모여들어 말미엔 전체적인 상이 제시되는 식의 전개를 보인다.  




  모로코의 한 가정집. 아버지가 자칼을 잡으려고 총을 사왔다. 염소를 지키라며 두 형제(아흐메드와 유세프)에게 총을 맡기고 아버지는 떠난다. 둘은 장난을 치며 서로 총을 쏴보다가 총을 조금 더 잘 쏘던 동생이 우연히 길가던 버스를 맞추고 만다.  
  미국의 한 가정집. 유모 아멜리아는 마치 친엄마처럼 백인 아이들을 돌본다. 다음날이 아들 결혼식이지만 사장이 전화로 아이들을 봐달라하고, 아이를 맡길 곳이 없던 아멜리아는 아이들과 함께 결혼식에 가려 차에 오른다.  
  미국인 부부는 화해를 위해 여행을 왔다. 남자(리처드)에게 후회와 원망을 내비치며 눈물을 흘리던 부인(수잔)은 관광버스에서 잠깐 잠이 든 사이 갑작스럽게 총에 맞는다.
  배구선수이자 청각장애를 가진 일본인 소녀(치에코)는 처녀딱지를 안뗐다며 친구들에게 놀림 받는다. 엄마의 부재로 아빠(야스지로)와는 서로 서툴고 어색하다. 마음에 들던 남자아이가 다가와 말을 걸지만 그녀가 청각장애를 가진걸 알곤 등돌려버린다.

  두 형제, 유모, 부부, 소녀…. 아무 연결고리가 없어보이던  4개의 에피소드들은 사건의 발단이 된 '윈체스터 총'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이야기였음이 드러난다. 모로코의 두 형제가 쏜 총, 그 총탄에 맞은 리처드의 아내 수잔, 그리고 리처드는 수잔이 총상으로 위급하다는 소식을 유모 아멜리아에게 전하며 아이들을 봐달라 하고, 아멜리아는 아이들과 새벽 어둠을 틈타 국경을 넘어 돌아오다가 사막 한가운데에 버려진다. 이 총은 치에코의 아빠인 야스지로가 모로코에 갔을때 가이드를 해준 핫산에게 준 것으로, 치에코 엄마가 자살에 썼던 것이다.
  총의 여정…. 치에코 엄마는 이 총으로 자살했고, 총을 판 핫산 부부에게는 모로코 경찰의 가혹행위가, 수잔의 총기사고를 테러로 간주해 생긴 모로코와 미국 간 외교분쟁이, 이 미국인 부부의 부재가 아이들에겐 죽음의 위기를, 아멜리아에겐 불법체류로 쫓겨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중 최악의 결말은 총을 쏜 동생 유세프가 아닌 형 아흐메드가 모로코 경찰이 쏜 총에 죽은 것이다. 유세프는 '윈체스터 총'을 바위에 내리쳐 산산히 박살내고 형을 살려달라 눈물로 호소한다. 총을 박살낸들 죽은이가 살아 돌아오겠는가. 두 형제가 나란히 서서 두 팔 벌려 바람을 타는 엔딩에 가슴을 죈다. 어린 아이가 그 죄책감의 무게를 버티고 살 수 있을지.







  '바벨'이라는 제목은 창세기 11장 1-9절의 야훼가 내린 벌로 자주 인용되는 '바벨탑 이야기'를 자연히 떠올리게 한다. 태초의 세상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모든 것이 존재했다. 언어가 하나 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던 세상에서 사람들은 도시를 세워 탑을 쌓고, 탑 꼭대기가 하늘로 닿게 하여 이름을 알리고자 했다. 그러자 주께서는 그들의 말을 뒤섞어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고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셔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자연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알고 그것을 명명하는 아담의 언어는 신이 되고자 했던 인간의 오만에 대한 벌로 타락한 바벨의 언어로 흩어지게 되었다.


  바벨의 언어로 흩어진 각기 다른 인종과 다른 배경의 에피소드들에서 '소통의 불능' 이란 주제는 곳곳에서 보인다. 부인 수잔이 총상을 당해 위급한 상황에서 리처드는 난감한 상황들에 봉착한다. 일단 그는 가이드의 통역이 없으면 현지인과 대화하지 못하고, 유일한 이동수단인 관광버스에 탄 외국인들은 부부를 남겨두고 떠난 것이다. 특히 프랑스인은 생사가 걸린 그들의 처지따윈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다. 가장 큰 난관은 아내의 사고를 '테러'로 간주하는 미국의 태도다. 미국은 이 피격사건을 두고 테러조직을 의심하며 수잔을 위한 구급차를 취소시킨다. 외교적 문제때문에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범인이 누군지 꼭 색출해 내겠다는 대사관의 말은 리처드와 수잔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출혈이 심한 수잔에게 필요한 것은 구급차와 응급조치다.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다른 국가, 다른 '역사'를 갖는 인종 간의 소통은 불가능하고 이는 최악의 결말을 예감케 한다. 경찰은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국경을 넘어가려는 아멜리아일행을 거의 범죄자 취급한다. 아멜리아가 실제로 아이들의 보모노릇을 했다, 자기가 아이들을 모두 키워냈다고 말해도 불법체류자가 국경을 넘을 순 없는 것이다. 1세계인 미국에서 3세계인 멕시코로 넘어가는 것은 쉽지만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힘들다. 그 위계를 따라 아멜리아는 삶의 터전이었던 미국에서 추방당한다. 인간 간의 소통이란건 영원히 불능일지 모른다. 말을 못하는 치에코가 온몸으로 사랑을 갈구하지만 관계맺는 것에 반복적으로 실패하듯이. 바벨의 언어 속에서 영원히 불가능한 소통….





  
  '소통의 불능'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상황이지만, 슬픈 현실은 누군가가  반드시 헐벗고 추방당하거나 죽임당하는 제물로서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사실이다.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위계, 1세계와 3세계의 위계를 따라 인물들의 운명은 사건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이미 결정된 듯한 인상을 받는다. 서구의 관광객들이 관광 온 중동의 풍경 속에서 살고 있는 두 형제, 그 중 유세프는 누나의 벗은 몸을 힐끗 거리고 바위 뒤에서 자위를 한다. 어느 곳에서나 매춘부를 볼 수 있고, 길바닥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닭의 목을 빙빙 돌려 따 죽이고, 총기를 아무렇게나 사용하고, 술에 취해 운전대를 잡는 멕시코의 풍경은 '미개'와 '야만'에 대한 묘사다. 버스 안에서 안락하게 구경하던 관광객들은 돌연 '모두의 목을 딸지도 모르는 곳'이라며 중동의 풍경에 위협당해 달아나고, 멕시코의 풍경을 처음 접한 리처드의 아들 마이크는 경악의 표정으로 답한다. 영화에서는 일본인이 모로코인에게 준 총, 그 기원을 따지자면 '윈체스터 총'은 미국에서 온 것일텐데, 유세프는 모든 일이 자신의 죄인냥 두 팔을 벌려 처벌을 기다린다. 마치 '미개'와 '야만'에 대한 처벌을 받는 냥. 이런 손쉬운 결말은 현실의 고백인가, 편협한 시각인가?


(좌) 닭의 목을 빙빙 돌려따는 모습

(중) 결혼식 총탄 소리에 놀라는 마이크를 달래는 아멜리아

(우) 죽은 형을 뒤로 죄를 시인하며 경찰에게 용서를 비는 유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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