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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a Sep 22. 2016

사는 대로 생각하는 범인(凡人)의 그늘

<밀정>(2016)

※ 본문에는 스포일러가 가득합니다. 영화를 본 후 읽어주세요.



   1933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우던 한국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을 기억하는가? 영화<암살>(2015)에서 조선 총독과 친일자본가의 암살을 위해 만주에서 경성에 도달한 안옥윤은 암살 표적인 강인국(이경영)이 자신의 친부임을 깨닿는 순간에 놓인다. 출생의 비밀을 깨닫는 순간, 확고함으로 표적을 쫓던 그녀의 눈동자는 운명의 선택(독립군 또는 미츠코) 앞에서 분명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미츠코(전지현)의 안온한 삶이 아닌 자신의 신념을 택한다. 아내와 딸을 죽인 패륜, 친일이라는 반민족적 행위로 용서받을 수 없는 강인국은 모두의 바람대로 죽는다. 안옥윤을 대신해 방아쇠를 당긴 건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이었지만. 애국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의 친부를 죽이고 자신의 운명을 결단한 안옥윤은 그야말로 범상치 않은 위인의 모습이었다.
  교과서적 위인은 단단한 애국심과 의리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는다. 갖은 수난과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는 결기와 신념이 위대해 보이긴 하지만 사실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특별한 사람 같다. 일제강점기는 모두가 '투사'이거나 '친일'이거나 하는, 극단을 살았을까?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최근 대중영화의 단골배경이 된 일제 식민통치기를 보며 자주 들었던 의문.





  김지운 감독의 8번째 영화인 <밀정>(2016)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 '황옥 경부 폭파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다. 한때 독립군에 몸담았었지만, 친일행위로 일본 경찰이 된 조선인 이정출(송강호)은 상부의 지시로 의열단 핵심인물인 김우진(공유)에게 접근한다. 김우진 역시 이정출이 어떤 자인지 알지만 필요하기 때문에 속내를 감추고 서로를 탐색한다. 두 사람의 거리가 조금 좁혀졌을 때, 의열단장인 정채산(이병헌)이 모든 것을 드러내놓고 이정출에게 도움을 청한다.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할 폭탄을 상해에서 경성으로 들여오려는 의열단을 도울 것인지, 잡아 가둘 것인지는 온전히 이정출의 선택에 달렸다. 동료 경찰 하시모토(엄태구)의 의심을 받는 이정출은 의열단원들이 발각되지 않게 그들의 눈을 따돌리려 노력하던 중 의열단 내 이중간첩이 있음을 알고 김우진에게 다급히 알린다. 김우진이 이정출과 식당칸에서 접선할 때, 이 둘이 내통하는 현장은 하시모토에게 발각되고 만다. 격렬한 몸싸움 끝에 하시모토와 정보원을 모두 죽인 이정출은 일본 경찰인 자신의 신분으로 일을 뒤처리하는 한편, 의열단은 색출한 이중간첩 조회령(신성록)을 사살한다. 의열단은 폭탄을 소지하고 경성역에 도달하지만, 일본 경찰들에 신분이 드러나 붙잡히고 만다. 산 중 외딴집에 폭탄을 숨긴 김우진을 도우려 이정출이 찾아온 순간, 이정출은 히가시 부장(츠루미 신고)이 놓은 미끼에 속았음을 깨닿고, 두 사람은 현장에서 경찰에게 잡힌다. 재판에서 일본경찰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진술하며 억울함에 흐느끼는 이정출과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 그러나 가출소 한 이정출은 총독부 고위관료, 중추원 친일파들이 모인 파티에 숨겨둔 폭탄의 일부를 터뜨리고, 나머지 폭탄을 다른 조직원에게 넘겨주고는 뒤돌아서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주인공 이정출이란 인물은 애매하다. 거짓으로 접근해 거짓을 보고하고 거짓이 탄로 나자 거짓을 진술한다. 그러나 법정에서 한 진술조차 거짓이다. 그는 의열단이 아니지만 마치 의열단원 같다. 과거 몸담았던 독립군을 배신한 전력이 있는 데다가 별다른 신념이 있어 보이진 않는데 누구보다 열심히 의열단을 지키려 한다. 해방운동을 '이미 기울어진 배'에서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라 회의하고, 자기 자신조차 '녹봉이나 먹으며 내 잇속이나 쫓는 놈'이니 '(언제든)생각이 바뀔 수 있다'고 말하던 이정출. '다시 만날 땐 내가 어떻게 변해있을지 모른다'는 말 속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다. 절박한 김우진 앞에서 "대체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내가 바로 밀정이라고!" 라며 거사를 앞둔 두려움에 자신이 반간이고 스파이라 재차 강조해보지만, 또 어느새 김우진을 돕고 있다. 이런 이정출의 모습은 발가락을 제 손으로 뜯어내며 '사람이 쥐새끼와 함께할 수 없다'며 자결하던 김장옥이나 고문에 자신의 혀를 깨물어 버린 김우진의 결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확신으로 해방을 위해 행동한 인물들과 달리, 이정출은 해방운동에 끝없이 회의하고 불안해하며 흔들리는 모습으로 등 떠밀린다. 의열단을 다 돕고 난 후에야 이정출은 감정이 터져나온다 . 임시출소 후 길 가다 마주한 죽은 연계순(한지민) 앞에서 그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끝내 괴로움에 오열하고 만 것이다.  
  조국과 친구를 배신한 친일행각의 오명으로 괴로웠을 이정출에게 뭔가가 '될' 기회를 준 건 정채산이다. 적의 첩자를 우리 첩자로 만들자며 이정출을 이용하려는 정채산의 계획에 의열단원들은 밀정의 전력이 있던 이정출을 당연히 믿지 못한다. 그러나 정채산은 '이중첩자에게도 조국은 하나뿐이다, 마음의 길을 열어주자, 마음의 움직임이 중요한 것 아니겠냐'며 이정출을 만나 부탁한다. 정채산의 실낱같은 희망으로 이정출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본의아니게)김우진의 그림자로, 결단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달리던 기차에서 떨어져나온 이정출은 다시 일본 경찰로 돌아갈 수 있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던 동지들이 붙잡히고 고문당하는 장면과 함께 흐르던 Louis Armstrong의 When you're smiling. 이 가볍고 느긋한 재즈 음악은 돌연 이정출과 관객을 이야기로부터 분리시켜 무언갈 생각하도록 한다. 생사가 걸렸던 거사가 수포로 된 것에 대한 회의일까, 달리던 기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친, 결단을 회피한 것에 대한 수치스러움일까, 그들을 끝까지 돕지 못했단 죄책감 때문일까, 흔들리는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일까, 어쨌거나 동료가 겪는 고문과 괴로움이, 출퇴근하듯 일과의 한 부분이 된 일본 경찰 이정출은 홀로 경성의 어둠에 묻혀 외롭고 쓸쓸하다. 그가 퇴근한들 몸과 마음에 그 어떤 휴식이 가당키나 할까 싶었던건 "퇴근 안 하세요?" 란 부하 직원의 대사 직후에 따라온 생각이었다. 이정출은 아마도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정해야 할 때가 온다. 그러니 어디에 올리겠느냐'란 정채산의 질문에 내내 붙들려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 시간을 이형(이정출)께 맡긴다'며 정채산이 건넨 회중시계를 받아들고는 그 시간에 내내 붙들려버린 건 아닐까.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폴 발레리의 글귀를 떠올린다. 제대로 생각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생각과 행동의 시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난 보통의 평범한 인간이다. 실제 역사 속 인물 '황옥'이 조국을 위했는지, 일제를 위해 일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영화 속 '이정출'은 나약하고 평범하지만 약간의 부채감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다. 확고한 생각과 신념으로 행동하는 의열단원과 달리 이리저리 휩쓸려 사는 대로 생각하는 평범한 인간 이정출. 갖은 고초를 겪고 독방에 갇힌 신세지만 작은 성과에 기뻐하며 손바닥만큼 내리쬐는 볕 아래 누워 희미하게 미소 짓는 김우진의 평온과 대비되는 이정출의 초라하고 쓸쓸한 뒷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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